10월9일
모두 죽는다(3)
죽음을 생각하는 삶과 생각하지 않는 삶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일리가 있는 질문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서 삶의 문제들이 다 해결된다거나 마음이 늘 평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골치만 아파지고, 더 심해지면 우울증에 빠질 수 있으니,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 부산에서 속초까지 운전을 하거나, 또는 자전거를 타고, 또는 걸어서 간다고 하자. 속초가 목적지다. 거기서 그는 아무개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그는 속초까지 가면서 중간에 많은 지점을 거쳐야 한다. 갈림길도 있을 것이다. 날씨에 따라서 기분도 다르고 가는 속도도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목적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목적지에 가는 이유도 생각해야 한다.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길을 잘못 들던지 다른 장소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으로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지금 길을 가는 과정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삶의 목적지는 원하든 않든 죽음이다. 하이덱거는 그래서 현존재(Dasein)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고 해서 특별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다. 그러나 그걸 들은풍월로 아는 사람이 있고,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금의 삶을 공연한 것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성격을 실존적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만 오늘의 삶이 방향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미 충만한 차원을 획득할 수 있다.
요즘 독일에 있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 선생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시간의 향기>라는 책의 한 부분이 너무 크게 다가왔습니다.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던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삶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어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과정은 불시에 끊어지고 만다.
이 책을 읽고는 어떻게 죽는 것이 제때 죽는 것이고 그 것을 위해 오늘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