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5일
하나님 사랑
지난 설교의 본문인 신 6:4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게 ‘쉐마 이스라엘’이 가리키는 핵심이다.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안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요 3:16절이 가리키듯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그 사랑이 한 순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열려야 할 어떤 거룩한 사건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동굴 탐험가를 상상해보라. 하나님은 끝이 없는 동굴과 같다. 그 탐험가가 100미터만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온다면 그는 동굴을 다 아는 게 아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새로운 동굴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신명기 기자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에 기록하라는 말은 그렇게 집중해야만, 마치 탐험가가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신비로운 경험을 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오늘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데는 혼신의 힘을 쏟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자기들끼리 즐겁게 지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게 무슨 사태인지를 종잡지 못한다는 말 외에 어떤 말로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지.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기도때마다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우리는 내 이웃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며 살까요?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늘 찬송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나는 내 이웃들을 얼마나 사랑할까요?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얼마나 자책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아파하며 살까요?
하나님 사랑의 진정성을 내 이웃을 향한 시선과 마음가짐으로
달아볼수 있다는게 맞는 해석이라면
여전히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내게 유익이 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밖에 사랑할줄 모르는
내 이웃 사랑의 민낯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만든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셈이겠죠?
하나님 사랑은 내가 경험한 십자가 사랑의 무게와 깊이에 비례할수 밖에 없겠죠?
그래서 내 영혼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압도당하여
이웃사랑으로 곧 하나님 사랑으로 녹아나는 것이겠죠?
당신이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의 크기와 넓이의 어떠함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수년째 간구하고 있는데 쉬이 응답을 안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ㅎㅎ
늘 우리끼리만 모여 하나님 사랑을 입에 올리며 감사를 달고 있긴 하지만
지적하신대로 그게 뭔지도 제대로 모른채
스스로를 속이며, 내가 혹시 구원과는 관계없는 자리에 가있는건 아닌지
왜 한번쯤은 의심도 안해보는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