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2)
우리는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풍요롭지 못하다. 시각이 표면적이고 단조롭다. 서기관은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고,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불행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묶여 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한다. 실제로 그래야만 어려움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사람과 삶과 세상을 표면적으로 느슨하게 보면 이게 옳은 것 같지만 근원의 깊이에서 보면 틀렸다.
서기관이나 과부나 모두 사람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쪽은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지렁이가 아니라 둘 다 똑같이 사람으로 세상에 실존하고 있다. 설교 중에 하이데거 용어를 빌려서 모든 사람은 세계-내-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 엄청난 사실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서기관과 과부의 차이가 미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 시각이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사람과 삶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위의 글을 읽고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당신 이야기는 설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서기관과 과부 사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지 않느냐?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사람과 삶을 판단한다. 서기관이 되면 존경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고, 자식들 혼사도 잘 풀린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일상은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자녀들 교육도 어렵고, 그래서 자식들이 ‘후레자식’이라는 표현처럼 삐뚤어질 수도 있다. 사람은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난한 과부의 운명을 벗어나려하고, 더 나가서 서기관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세상살이이다.
위에서 이미 짚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과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뚫어 봐야한다. 똑같이 숨을 쉬어야 하고, 똑같이 먹고 배설해야한다. 똑같이 인간으로 잠시 세상에 살다가 갈 뿐입니다.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다른 차이가 더 중요하다. 예수는 가난한 과부가 서기관을 비롯해서 많은 헌금을 바친 부자들보다 더 귀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다른 시각을 배우는 게 신앙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