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7일
영생
지난 설교 후반부에서 하나님 사랑을 말하면서 요 3:16절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신학생이나 젊은 목사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A4 용지 10장 분량으로 주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를 보라.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등등이다. 이 단어들 자체의 깊이도 깊이지만 이 단어들이 연결되어서 지시하는 세계는 더 깊다. 그걸 헤아릴 수 있어야만 성서 텍스트를 아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독생자와 영생의 관계만 설명하겠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둔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말이긴 하다.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처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는다. 성서의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비교될 수 없다.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분이 바로 성서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독생자라니,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독생자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말하려는 핵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있다. 곧 성육신이다. 우리와 똑같은 질료로 된 몸을 지닌 나사렛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성육신 된 하나님인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우선 영생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를 피해야 한다. 이것을 선(線)적인 시간 개념으로 보면 곤란하다. 시간이 무한하게 지속되는 생명이라고 말이다. 영원하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유한한 삶이 극복된다는 것이지 무한하게 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만으로 유한이 극복되는 생명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 또는 통치 방식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 통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서 지금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참여하는 근거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요 3;16절 말씀은 옳다.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을 실제로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사건..."
모태신앙으로 50년을 넘게 예수를 믿고 살아왔다고 자처했는데
지금 보니 이제서야 그 진수에 조금씩 눈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사건...
존재론적 구원사건이라...
오늘은 이 "존재론적" 이란 단어가 가진 함의를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