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3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5)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을 가난한 과부와 동일시할 수 있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하는 서기관을 유대교로 보았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의 구성원들은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노예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기독교가 부자 종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의 종교였다. 바울의 편지인 고전 1:26-29절은 아래와 같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 기독교인 개인이나 교회가 일부러 가난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난하면 배고프지 않으냐, 가난이라는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고 배부를 수 있느냐, 하는 말이 가능하지만, 배부른 거를 찾으려면 자본주의라는 신을 섬기면서 살면 된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준비만 된다면 영혼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에 목숨을 거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전통을 소홀히 여기면 그때부터 우리는 두 렙돈의 과부가 아니라 외식에 신경을 씀으로써 영혼이 초라해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 ‘일상에의 퇴락’에 떨어지는 서기관이 되고 말 것이다.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함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현실 사이에서 늘 갈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아니면, 이 둘을 뛰어 넘는 어떤 세계가 또 있어서 그 세계를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