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21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 같이 공부할 욥기 순서가 18장입니다. 1절부터 21절까지 있어요. 빌닷이라는 욥의 친구가 두 번째로 나서서 욥을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있죠.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들이 나서서 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욥은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하는 게 쭉 계속됩니다. 욥기 3장부터 거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계속돼요. 비슷비슷한 이야기들도 많이 있는데 우리가 잘 따라가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약의 신앙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그리고 신약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의 한 부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1절부터 21절까지 읽겠습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2.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여러분들이 아멘을 하지 않으셨네요. 됐습니다. 이거는 빌닷이 욥을 비난하는 거라서 우리가 아멘하기에는 조금 적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크게 틀리지 않죠. 우리가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성경만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을 잘 따져서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옳은데 어떤 경우에는 옳지 않는 그러한 일들이 제법 있는 거예요. 그거는 성경 이론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런저런 규범들이 있잖아요. 몇 가지 원칙들도 있고요. 그런 게 옳은 것이기는 한데 그걸 너무 절대화시키면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영혼을 덧나게 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규범들, 원칙들을 소홀하게 대하면 안 되는 거라서 그런 면에서 신앙생활은 긴장이 있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나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서 그러한 규범이나 원칙들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걸 굉장히 약화시켰어요. 규범과 원칙이 없으면 안 되지만 그 자체가 교회생활과 교회를 꾸려가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지 않되 서로 잘 풀어가는 교회가 가장 성숙한 교회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긴장이 있어요.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그게 목표인 것처럼 되어버리고요. 또 안 하게 되면 ‘이건 없어도 되는 건가보다.’하는 문제들이 생깁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나갔네요.


‘욥에 대한 빌닷의 충고가 일반적으로 볼 때는 틀린 것은 아니되 그러나 그 일반적인 것으로 다 해명할 수 없는 삶의 깊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 빌닷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이 정확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무조건 욥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다보니까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떻게 욥이 자기의 신앙을 버텨 낼까?’ 그것이 욥기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욥기의 전체 주제로 본다면 그것은 무죄한 자의 고난인거예요. 욥에 관계된 것으로 이야기하면 그가 받은 재앙만큼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에게 임한 어려움들, 이걸 도대체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욥기에 있는 겁니다. 이 무죄한 자의 고난을 제가 처음 욥기 시작할 때 기독론적으로 핵심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시죠? 무죄한 자의 고난의 대표자가 누구라고 했죠? 예수 그리스도인 거예요. 십자가의 죽임이라는 것은 로마법에 의한 것인데 그에 앞서 산헤드린 종교법으로 먼저 재판을 받아 함께 이루어진 거예요. 그 당시에 최고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산헤드린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 죽음으로 선고받은 예수에게는 그것에 해당되는 죄가 없었지만 이 세계는 그러한 일을 저질렀고 무죄한 자의 죽음을 대표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히려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그러한 점에서 욥기서와 신약성서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어요.


욥은 친구들 앞에서 두 가지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게 쭉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거예요. 하나는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견지하는 거예요. 이게 쉽지 않은 겁니다. 제가 반복해서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신세가 완전히 망하게 되면 무언가 불안하잖아요. 그리고 죄책감 같은 것도 당연히 생기게 돼서 ‘뭔가 잘못한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신학자부터 시작해서 목사, 친구들, 가족들, 아내까지 모두 다 문제가 있으니까 해결하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책임 없다. 잘못 없다. 죄 없다.’라고 주장하는 게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욥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게 하나고 또 하나는, 이러한 자신이 받은 재앙의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욥이 붙들고 있는 건데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이 반대 입장 인거죠. 서로 충돌하는 거예요. ‘분명히 죄를 지은 거다.’ 그리고 이 친구들에 따르면 재앙의 원인이 뭐예요? ‘잘못했거나 훈련받는 거다.’라고 그 원인을 딱 집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모른다고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는 욥의 친구들과 욥의 입장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더 바람직한 신앙인이겠어요? 당연히 친구들입니다. 욥은 그걸 버텨내고 있습니다. 이게 무조건 삐딱하게 나가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충돌을 통해서 지혜의 전통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신앙과 삶의 깊이를 이 욥기가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거죠. 한마디만 더 붙인다면 이러한 신앙만이 한 단계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사실은 신앙의 완성은 없어요. 종말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신비,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 신비, 생명 신비를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최선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자세를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 하면 완성이다.’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오늘 여기 본문에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반복돼요. 2절에(1절은 도입하는 구절이고요.) 보면 문장의 주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있어요. 2절 이렇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전체 흐름에서 조금 이상하죠. 욥에게 직접 말했으면 ‘너’라고 해야 하는데 ‘너희’라고 그랬어요. 이 ‘너희’라고 하는 게 번역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진다고 합니다. 욥을 가리키는 것을 수도 있고 빌닷의 친구들인 엘리바스와 소발에게 하는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요.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당신들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참이요. 잘 생각해서 말 좀 해줍시다.’ 그러니까 이 공동번역은 ‘너희’를 빌닷의 친구들을 칭한 거예요. 이런 거예요. 이 친구들이 말을 잘 못하는 거예요. 욥이 너무 말을 잘했는지, 아니면 상대하기 싫어서 그런지, 쭈뼛대니까 이 빌닷이 나서서 ‘언제까지 그러냐. 잘 좀 생각하고 준비해서 저 욥이 기가 죽게, 말 좀 쏙 들어가게 잘 이야기하자. 언제까지 지지부진하게 이렇고 있겠냐.’라고 독려하는 거죠.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공동번역이 일단 그렇게 번역을 하고 ‘너희’라는 단어에 각주를 붙여서 이렇게 달아놨어요. ‘자네는 언제 입을 다물 참인가.’ 욥을 향해서 하는 말이죠. ‘너 말이 많다. 언제 입을 닫을 거냐. 정신 좀 차리고 우리말을 듣게.’ 이렇게 해놨어요. 루터성경 주석에 따르면(이거는 루터성경의 주석만 우리말 성경에 끼워서 만든 성경이에요.) 거기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참았느냐. 잘 생각해 보라. 그런 다음에 우리가 말하자.’ 그런 뜻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너희’라는 말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봅시다. 빌닷이 자기 친구들에게 독려의 말로 ‘잘해보자. 우리가 논쟁하는데 기가 죽으면 되겠냐.’라고 일단 한마디 해놓고 그 다음 4절에서 욥을 굉장히 비인격적인 사람으로 매도하는 표현을 하네요. ‘울분을 못 이겨서 자기 자신을 찢는다.’라고 과격하고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하네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이야기는 앞뒤도 안 맞고 신학적으로 옳은 이야기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대다가 고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지혜의 전통, 정말 바람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지혜롭게 살아가야할 그 기준에도 맞지 않는, 그런 말을 한다고 본 거죠. ‘그건 네가 화가 나서 하고 있는 말일 뿐 아니냐. 결국 그런 말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하냐.’ 이렇게 핀잔을 주는 겁니다. 아마 이런 빌닷의 말은 단순히 빌닷만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여기에 그대로 담아냈을 거예요. 이들이 보기에 욥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거니까,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 분명하니까 ‘저건 상대할 사람도 안 된다. 감정적으로 울분을 터트리면서 자기를 파괴하며 자폭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욥이 그런 평가를 받을까요? 이런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인간의 심리이기도 한데, 욥은 정말 불행한 처지에 떨어졌거든요. 사람들은 불행하면 일단 동정심이 가요. 그래서 같이 도와주려고 해요.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거고 자꾸 계속되면 싫은 거예요. 민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받은 상태의 사람들 옆에 있기가 싫은 그런 마음이 들게 됩니다. 거꾸로 하면, 괜찮게 된 사람들, 쉽게 이야기해서 출세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일단 괜찮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자신도 올라가는 느낌이 드는 거죠. 반면에 반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을 당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는 한데 계속 옆에 같이 있기는 쉽지 않은 겁니다. 지금 유럽의 난민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요. 시리아 난민들이 특별히 많다고 하는데 시리아만 아니라 아프리카 난민들도 있고 이게 하루 이틀 된 게 아닙니다. 지금 시리아 난민들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전이 벌어져서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다른 쪽으로 오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 된다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사실은 난민들이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 가서 대접받고 살기는 힘들 겁니다. 신세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호의를 받기는 어려울 거예요. 우리의 마음들이 그런 식으로 작동이 됩니다. 극빈자나 노숙자들도 우리가 안 됐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내 문제처럼 같이 풀어나갈 준비가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거예요. 저도 용기를 가지고 그렇게 많이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한 이 재앙이 너무 어려운 상태니까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옆에 있어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 다음 5절부터 21절까지는 악인에 대해 쭉 이어지는 이야기예요. 빌닷이 이제는 욥과 정상적으로 논쟁하기 보다는 아예 포기한 상태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서 우리가 공부한 17장 16절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를 굉장히 독선적인 것,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것으로 보고 빌닷이 더 이상 욥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기의 말만 일방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가’ 이렇게 하면서 욥은 상대할 거리 조차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악인은 어떻다.’라고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었습니다만 5절에서 20절까지(21절은 결론이고요.)는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귀 기울일만한 지혜의 전통에 속합니다. 이러한 지혜의 전통에 의하면 그 악인은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하는 거죠. 그게 쭉 나와요. 제가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고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만 정말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인생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지혜의 전통을 언급함으로써 욥이 악인이라는 것을 낙인찍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우리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넌 가난하니까 능력이 없어.’ 우리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좀 보잖아요. 그와 비슷한 겁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예요. 은퇴할 때까지 아주 작은 교회를 하는 목사면 능력 없는 목사로 생각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큰 교회 목사는 큰 종이라는 말도 붙이고요.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 뜻이 작은 교회에도 있고 큰 교회도 있고 달란트대로 열심히 하는 거다.’라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그렇게 판단해버립니다. 이건 목회만이 아니라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욥을 향해서 빌닷이 그러한 태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몇 구절만 보겠어요.


5절에 보면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오.’ 당연한 이야기죠. 빛과 불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악인은 희망 없이 살게 된다.’는 건데 이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지배가 아니라 악의 지배를 받게 되면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하고 이기적이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소유를 늘리거나 좀 괜찮은 인생살이를 산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한 구절만 가지고 얼마든지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도 이 한 구절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빛을 경험 하냐. 이게 어떻게 악인에게서 단절이 되냐.’ 그런 것들을 잘 풀어내면 이러한 구절에서 은혜로운 설교가 가능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 친구들의 이야기는 틀린 게 없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을 욥의 경우에도 무조건 적용시키려고 하면 잘못되는 거죠.


그 다음 13절 볼까요? 거의 비슷한 말들이라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쭉 그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예를 들자면 8절,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속담 비슷하죠? ‘악인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러한 지혜들이 하루 이틀에 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축척된 지혜라서 옳은 이야기인거예요. 그리고 여기에는 해석해야할 많은 것들이 들어 있고 문학적인 수사도 우리가 참고하면서 봐야 합니다. 비슷한 말들이 반복되고 있어요. 제가 몇 가지 특징적인 구절만 조금 더 시간되는 대로 짚겠습니다. 13절 보세요.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악인에게 일어날 일들을 욥에게 저주하듯이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이들은 욥의 친한 친구들이잖아요. 처음에는 연민과 동정심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원수를 박멸하듯이 이야기를 하네요. 그리고 자신들이 옳다는 전제를 깔고, 어떤 고담준론(高談峻論)이라고 할까? 굉장히 고상한 언어, 누구나 들으면 ‘아, 정말 그렇군요.’라고 아멘할 정도의 말들을 쭉 나열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교만한 거죠. 그러니까 욥을 악인으로 판단해 놓고 ‘우리가 배운 바에 의하면 악인에게 일어날 일들이 바로 욥에게 일어났다.’라는 투로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13절에서는 질병을 거론하고 있네요. ‘사망의 장자’는 나병이에요. 욥이 걸린 병을 가리킵니다. 욥의 재앙은 크게 두 번 받았다고 말씀 드렸어요. 사탄이 하나님의 천상회의에서 두 번 등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잖아요. 한 번은 욥의 재산과 자식들을 다 죽이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왔을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봐라, 네가 땅을 돌아 다면서 욥같이 의로운 사람 봤느냐. 정말 신앙이 좋지 않느냐.’ 그러니까 사탄이 ‘그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니까 그러지 한 번 쳐보십시오. 그러면 신앙이 없어질 겁니다.’라고 허락을 받아서 자식도 죽고 재산도 몽땅 없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하나의 재앙이었고요. 그렇게 해도 욥이 순전한 마음을 잃지 않자 두 번째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가 말한 대로 욥에게 어려운 일을 당하게 했지만 여전히 신앙이 좋지 않느냐.’ 그랬더니 사탄이 또 ‘자식이 죽고 재산을 잃어도 제 몸이 건사하면 살만한 겁니다.’라고 하면서 몸을 치도록 허락을 받아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내 몸이 아픈 게 힘들까요, 자식이 죽는 게 더 힘들까요. 보통 우리는 자식이 죽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죠. 그걸 참척(慘慽)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겪는 고통을 그렇게 표현해요. 인간이 감당하기 가장 힘든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탄의 음모와 욥에게 일어난 일 등등을 통해서 더 내면적으로 들여다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당하는 고통이 더 심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거는 우리 마음이 간사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식은 같은 피고 혈통이지만 결국은 남이니까 분리되어 있는 겁니다.


조금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를 잠깐 하고 갈게요. 요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금강산에서 하고 있는데, 50년 만에 만난 부부, 오누이가 서로 알아보고 감격하며 울고 한다고 그래요. 저는 그게 좀 이해가 안 돼서요. 그 마음이 5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각각 결혼 했을 걸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남과 북이 갈라져서 헤어져 살지 않았습니까. 물론 혼자 살고 있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남한에 내려온 대다수는 거의 다 재혼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수 있을까 저는 그 상황이 안 돼서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드니까 울겠죠. 아니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래서 같이 우는 건지, 장례식장 가면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나잖아요. 부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어렸을 때 헤어진 오누이가 몇 십 년 만에 만나갖고 그렇게 혈육의 정이 진할까 실감이 잘 안 났어요. 제가 좀 차가워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탄이 ‘자식 죽어도 사람은 자기 몸만 성하면 견딘다. 욥의 몸을 쳐라.’라고 두 번째 재앙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그게 언뜻 생각나서 말씀드린 거예요. 결국 인간은 자식이다, 부부다 이야기해도 결국엔 자기중심으로(이것은 이기적이다, 아니다 둘째 치고) 적응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 두 번째 재앙이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나병과 같은 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피부병하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고대인들에게는 가장 저주스러운 병이었어요. 일단 격리 되어야 하고 약도 없어서 몸을 건사하기 힘들고요. 지금 욥이 두 번째 재앙을 받은 것을 이 빌닷이 건드리는 거예요. 굉장히 못 됐네요. ‘네가 깨닫지 못해서 그래. 정신 차려.’ 이런 정도 까지만 말을 하지, 고대인들이 천형이라고 생각했던 나병, 이것은 몸이 힘들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썩어가는 병인데 이걸 빌닷이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욥을 코너로 몰아가고 있잖아요. 사람이 참 악독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겉으로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설교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어떤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들이 많습니다.


동성애자들 있잖아요. 많이 있어요. 프로테이지로 따지면 좀 되는데 교회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하면서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거다.’ 그 정도까지는 괜찮지만 심지어는 ‘에이즈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굉장히 공격적으로 하는 목사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분들은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지만 이 빌닷 비슷하게 전통적인 지혜에 머물러서 그것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 삶의 심연들을 다 놓쳐버리고,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내세움으로써 결국 상대방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 이것은 설교가 아니고 영혼을 죽이는 저주인거죠. 이 빌닷처럼 알고도 잘 못하고 또는 모르고 잘 못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건 역사적으로 수 없이 많아요. 마녀 사냥이나 십자군 전쟁도 있었고요. 전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데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상한 방식으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가끔 목사님들 대상으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고는 해요.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목사들도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의 설교가 그 때 심판 받는다. 그러니까 지금 신자들이 은혜 받는지 아닌지의 관점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각오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 된다.’는 거죠. 저도 그런 심정으로 설교 준비합니다. 제가 늘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때에 따라서는 몰라서 잘못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에 제가 책임진다는 시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빌닷이 한 이 13절의 언급이 굉장히 제 마음에 걸려서 여러분들에게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욥이 정말 견디기 힘들어 하는 나병을 건드리면서 ‘악인에게 일어날 일이 너에게 일어났으니 너도 악인이다.’ 이런 식으로까지 말할 수 있을까. 훌륭하고 인격적인 스승이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절로 넘어갈까요. 거기 유황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 유황은 저주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뿌려놓는 것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습니다. 주술적인 행위죠. 우리나라도 궁중비화 같은데 보면 누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의 그림 그려 놓고 칼로 찌르고 하잖아요. 주술적인 저주를 내리는 방식인데 이 유황이 그 당시에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유황을 뿌려서 그 처소가 아무것도 날 수 없는 메마른 땅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말하는 건데 그걸 빌닷이 욥에 견주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참 마음이 아프네요. 친한 친구였는데요. 자기 나름대로는 정의를 말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지만 완전히 원수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 21절, 쭉 그런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21절에서 훈계조로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설교하는 거죠. 아주 그럴듯하잖아요. 21절 읽어보겠습니다.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처소도 이러하니라.’ 위에 쭉 나열한 이야기들이 바로 욥의 운명이라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계몽하고 가르친다는 것이 필요하긴 한데 조심스러운 거예요. 특별히 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은 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만 사실은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학, 물리, 역사 등을 가르치는데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가르치는 것을 정보제공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정보는 제공할 수 있죠. 정보를 아는 게 교육은 아닌 거예요. 정보 안에 어떤 진리가 있는 거예요. 그거는 사람이 못해요. 그런데 교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경우에 그런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주로 저를 포함한 목사가 그렇게 하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지막 심판대에서 책임을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이 목사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말을 일단 많이 하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쏟아내고 과장하니까요. 그런 점 때문에 목사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혹독한 판단을 받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목사가 자꾸만 훈계조로 하려는 거예요. 저는 설교가 종교적인 계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을 계몽이라고 하거든요. 사실은 그렇게 가르쳐봐야 신자들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요. 더 근본적으로 변화라는 것은 목사의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해야 될 일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해서 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포함해서 진리의 영인 성령에 관심을 돌리는 거죠. 보통 영적 촉수라고 하는데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관심을 그 쪽으로 두게 하는 것, 그렇게 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 소크라테스식으로 하면 산파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있어요. 산파가 하는 일 아시죠? 아기를 낳는 것은 산파가 아니라 산모가 낳는 거니까 산파는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진리를 깨닫게 하는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있도록, 그게 생명을 낳는 건데, 거듭난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신자들이 할 수 있도록 산파로써의 역할에 머물러야지 자기가 아기를 낳아서 주는 것처럼 신자들을 닦달하거나 너무 자기 식으로 끌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제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 빌닷이 쭉 나열하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좀 봐라. 불의한 자의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정신 바짝 차려라.’라고 아주 교만하게 말하고 있어요. 말은 그럴듯한 종교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러나 속에는 영적인 교만이 여기 분명하게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 함께 욥기 18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2400~2500년 전 고대 유대인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이 욥기를 통해서 무죄한 자의 고난, 그리고 서로 지혜의 전통에서 옳다고 자기를 내세우는 삶의 위선, 사람의 위선과 모순들,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 하는 한 인간, 욥 등등을 우리가 봅니다. 이것은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일들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진리를 독점한 것처럼 몇 가지 종교적 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들이 없도록 우리가 이런 공부를 통해서 우리를 잘 성찰 해가는 기회가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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