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1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 같이 공부할 욥기는 31장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펴보십시오. 40절까지 있네요. 상당히 길어요. 31장 1절부터 40절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이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의 마지막 장이에요. 다 끝난 거예요. 상당히 길었죠. 4장부터 여기까지 계속 논쟁이 있었어요. 앞으로 엘리후가 나와서 길게 이야기하고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여러 장에 걸쳐서 말씀하시고, 중간에 욥이 간단하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 끼어들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마지막 42장에서 이야기의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논쟁의 마지막장인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셨겠지만 이 욥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코너에 몰려있어요. 세 명의 친구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차원에서 공격받고 회유당하는 일들이 반복됐어요. 그것만이 아니라 이 욥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하셔야 됩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과 같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말을 해도 반응이 없고 자신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설득이 안 될 것을 아는 거죠. 이미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에 근거해서 욥을 비롯한 친구들과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신앙에 의하면 욥은 죄인이어야 하고 그리고 욥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시 대화가 될 텐데 그건 인정할 수 없는, 정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리에 이 욥이 놓여있습니다. 참 딱한 입장이에요. 그러한 이야기가 앞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이 됐어요.
욥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어느 한 순간에서나마 자신의 결백을 의심해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이 뚫고 나가기가 참 힘든 거예요. 그래서 다들 타협을 많이 합니다. '내가 미처 몰랐다. 하나님께 내가 회개하겠다.' 대개 이렇게 하죠. 그리고 사실은 42장에 가면 욥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회개를 하는 거죠. 하나님이 ‘너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 많으냐. 네가 내 뜻을 아냐.’ 그러한 말씀 앞에서 욥이 손을 들었어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저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이야기, '네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 많으냐.' 이 말이 사실은 친구들도 했던 말이에요.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표현을 전혀 안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을 해요. 이게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아직까지 정리된 생각은 없어요. 왜 그랬을까 그러한 질문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 31장에서는 긴 논쟁을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욥이 그 당시 법정에서 행해지던 하나의 방식으로 자신의 결백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변호하고 있어요. 당시에는 그 사람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공식적인 법정이라기보다도 동네 광장에 모여서 원로들을 모시고 열리는 법정이죠. 이런 것들이 이슬람 계통의 나라에서는 지금도 행해진다면서요. 실정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관습법인가가 적용돼서, 그 동네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행해지던 이슬람법으로 잘못한 사람 팔을 자르기도 하고 수십 대를 때리기도 하잖아요. 그건 실정법으로는 안 되는 건데 자신들이 행해지던 법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결백을 증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법정에서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다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옳다고 하는 것이 인정되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옳은 걸로 받아준다고 해요. 그러니까 증인 서는 것이 참 위험한 거죠. 그런데 욥은 지금 증인을 서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또 하나의 방법은 결백을 맹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짓이면 내가 저주받아도 된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맹세하는 것, 이것도 옳은 것으로 인정받는 법정에서의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욥은 지금 두 번째 방식인 맹세하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31:1-8>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1절에서 8절까지 이렇게 맹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법정에서 변론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3절에 보면,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이런 말은 유대인 치고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전제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욥은 자신이 당한 재앙이 그러한 악, 불의에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답답한 거예요.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네요. 굉장히 절실하게 표현합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하죠.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대단하죠? 저울에 달아도 자신은 온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Justitia) 있잖아요. 보통 재판정이나 법조인들 교육받는 데에 있을 텐데 저울을 들고 무게를 재는데 눈을 가리고 저울을 재는 거죠. 공평하게 법을 적용하겠다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울 눈금으로 정확하게 구분되니까요.
지금 욥이 그러한 입장이에요. ‘공평한 저울에 달아도 나는 온전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교만하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겠어요. 지금 이것은 상대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러한 재앙을 받을 만한 죄가 없다라는 것이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걸 완전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인데, 양심에서 볼 때 거리낄 것이 없고 또 하나는 율법적으로 볼 때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거예요. 이 두 가지요. 율법은 보이는 데서 떳떳한 거예요. 그리고 양심은 보이지 않지만 떳떳한 거예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잘못도 없다는 ‘완전’이 아니라 율법과 양심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차원에서의 ‘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욥기가 계속해서 욥이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해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가고 있잖아요. 이게 딜레마이긴 해요. 지혜의 전통에 따르면 분명히 죄인인데 그러나 이 사람은 율법에서나 양심에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충돌이 있는 겁니다. 결국 욥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 전통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결정해 버리는 태도를 문제 삼는 거죠. 전반적으로 자신이 저울에 달아도 온전하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그 다음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이 행한 어떤 일에서 그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 세 번째 단락부터 나오죠. 9절부터 시작해서 29절까지 전체적으로 네 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 자신이 왜 저울에 달아도 온전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9-12>
9.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10.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11.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
9절 이하에서는 성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네요. 9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9절 보면 이렇습니다.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등등이에요.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기회를 보는 거죠. 10절 보면, ‘그렇다면 내 아내가 그런 일을 똑같이 당해도 될 거다.’ 이렇게 하면서 자신은 그 당시 율법이 금하고 있던 불륜, 혼외정사, 외도,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고 깨끗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적인 문제는 인류역사에서 잘 해결되지가 않아요. 사람에게 성적인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어떤 사회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극복되기가 불가능합니다. 성매매, 매춘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사회에서나 없는 데가 없어요. 성경에도 여러 군데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요즘은 유럽에서 이 매춘을 하나의 당당한 직업으로 분류하는 쪽으로 가요. 그래서 세금도 냅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걸 너무 감춰서 처리하려다보니까 문제가 더 많이 벌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간통죄가 없어졌죠. 이 간통죄가 여성을 보호하는 법으로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는 진작부터 없었고요. 그래서 지금은 간통죄로 하지 않고 주거침입죄, 이런 식의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완전히 다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우리나라도 그런 것들이 없어진 거예요.
왜 성경이 이러한 성적인 문제들을 단호하게 금했을까요? 단순하게 ‘그런 건 나쁜 거니까 당연히 금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모든 법은 사회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그런 법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일부일처제가 자리를 잡으려면 잘못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 있어야 일부일처제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앞으로 일부인처제가 인류역사에 계속 남아 있을지, 아니면 달라질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계속 유지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질 걸요. 그리고 후손 번식을(이건 동성애 문제와도 연관되는 건데) 만약에 결혼하지 않고도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나 방법이 나온다면, 그리고 의학적으로 남녀의 성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체세포를 떼어내서 실험관에 배양해서 자신과 똑같은 후손을 만들 수 있는 때가 온다면(그게 현실로 점점 오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인류 종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건 1, 200년 안에 벌어질 일은 아닐 거고요. 몇 천 년, 몇 만 년 흐른 다음에 우리와는 다른 시각으로 인간의 삶과 가정과 성문제,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후손들이 선택을 하겠지요. 아직은 아니겠지만요.
우리가 읽은 이 말씀에 나온 것들은 구약시대에서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만 가정이 유지된다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이들과 종과 여자는 소유의 대상이었어요. 그러니까 남의 여자와 관계를 하게 된다면 그건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이런 것들을 단호하게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욥은 ‘나는 부끄러움이 없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실제로 간음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다 간음한 거라는, 행위가 있기 전에 마음까지 놓고 판단한다면 이 욥의 이야기는 틀린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욥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자신은 부끄러움이 없다.’ 그렇게 하면서 친구들을 향해서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 때문에 이런 재앙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13-23>
13.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14.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그 다음, 13절 이하에서 윤리적인 차원을 이야기하네요. 특별히 사회윤리적인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사회에서의 책임감을 자신이 충실하게 지켰다고 말합니다. 13절 보십시오. ‘남종이나 여종이나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그러니까 종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 당시 종은 요즘 식으로 하면 갑을 관계라고 할 때 을 중에 을인 거예요.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욥은 그들의 인권, 권리를 치매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포함되어 있네요. 이렇게 행동한 건 욥의 마음이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에요. 마음이 좋은 사람들은 응당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생각 하지만 여기에는 확고한 신학적인 바탕이 깔려있는 거예요. 그냥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겁니다. 뭘까요? 주인이나 노예나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이런 시각이 있으면 세상과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욥은 더 나가서 고아나 과부를 많이 살폈고 21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재판할 때, 이 욥은 원로급이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법적인 문제로 논란이 벌어질 때 발언할 수 있는 위치였어요. 재판관 비슷한 거죠. 그래서 그곳에 갔을 때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이용해서 부당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두 가지를 봤습니다.
<31:24-28>
24.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5.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26.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28.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욥이 자신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세 번째는 24절부터 28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네요. 욥은 금(金), 여기에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건 문학적인 표현입니다만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진술이에요. 예수님도 이러한 말씀을 하셨어요.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뿐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욥은 부자이긴 했지만 금을 희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부자들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돈에 매달리게 되고(매달린다고 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노력과 운이 따르면 부자가 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돈의 메커니즘에 묶이게 됩니다. 누가복음이나 팔복 가운데도 나오는데 지나치게 부자로 사는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돈이 있어도 돈을 의지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만 믿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안 돼요.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그 말뜻이 어떤 것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의지하려야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이 대림절인데, 그런 것을 정말 기대하게 되는 거예요.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가에 나왔듯이 포로된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이런 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거죠. 이 욥은 아주 부자였지만 특이한 경우였던 것 같아요. 금, 재물에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26절에서 27절은 천체를 숭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24절과 25절은 돈, 26절과 27절은 하늘, 별, 태양,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사람이나 종교가 많이 있을 텐데요. 태양을 많이 섬깁니다. 이집트나 잉카 제국에서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단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 왕들을 가리켜서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구약성경을 일단 본다면) 근동에 있었던 다른 종교는 태양과 별과 같은 장엄한 자연과 천체를 신성화하는 것에 반해서 이 구약성경은 그런 것들의 장엄함을 곳곳에서 노래하고 있으나,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초점이 가있는 거예요. 이게 작은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여기에 적당한 신학적 용어가 있었는데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말씀을 못 드리네요.(탈신화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이러한 자연과 주술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29-34>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0.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32.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33.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34. 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
마지막 네 번째 항목은 29절 이하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욥이 자기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제가 읽기에는 자랑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이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전한 사람의 자기고백이라고 하는 점에서 영적인 진성성이 전달됩니다. 29절 이하에서 이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개 유대인들은 원수를 미워해야 돼요. 생각이 원래 그랬습니다. 이방인들을 증오하기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이웃들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하는 것, 이런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곳곳에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 이해가 분명히 있긴 하되 기본적으로 원수는 미워해도 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같은데 보면 원수를 많이 증오해요. '저 사람 망했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물론 그런 원수에 대한 증오, 저주, 이런 것들이 우리가 보기에 불편하기는 한지만 그게 무조건 매도 될 것은 아닙니다. 거기엔 조금 다른 관점이 있는 거예요. 제가 오늘 거기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렇게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쨌든 시편에는 원수에 대한 저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욥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32절에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줬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34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 자신은 모든 게 떳떳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자신의 결백을 저울에 달아도 온전하고 하나님이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점에서 정당했는가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눠서 말씀드렸어요. 앞에서 우리가 확인한 내용입니다.
<31:35-40>
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36.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8.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39.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40.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이제 결론입니다. 여기는 욥의 최후변론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어요. 35절부터 40절까지입니다. 여태까지 해왔던 이야기를 결론내서 자기의 입장을 피력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38절에서 40절이 35절에서 37절보다 앞에 나와야 한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38절에서 40절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35절로 돌아가야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35절에서 37절이 마지막 결론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인데 구분할 필요가 있냐.' 생각하겠지만 성서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르셔도 되는데 지나가면서 한 말씀드린 거예요. 욥은 지금 앞부분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법정에서 최후변론을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서명이 있는 항소장을 쓴 겁니다. '지금 내가 죄인으로 따돌림 당하고 재판 받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한 번 재판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항소하듯이 한 단계 올라가서 항소하는 거예요. 35절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그렇게 항소장을 쓴 겁니다.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표현했어요.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옳음이 확인될 수 있다는 간절한 마음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능자에 대한 항소예요. 그러면서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너희가 고소장을 써봐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대담한 주장입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조금 큐티식으로, 영적인 교훈을 받는다는 뜻으로 질문과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항소를 하는 욥처럼 자신의 구원, 생명의 완성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들어줄 거라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가 여러분들 자신에게 있는지 봐야 됩니다. 여러 가지로 불안하실 거예요. 그러나 불안은 좋은 겁니다. 표현이 좀 아이러니한데 불안한 게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에 대한 불안, 아니면 구원에 대한 불안, 이런 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대략은 아시겠죠. 이 욥은 구약 시대인데 신약과 연결시켜서 생각한다면(당연히 우리는 신약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욥처럼 나는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듯이 율법적으로 양심적으로 완벽하다는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 졌다는 사실을 뚫어 볼 수 있다면 하나님에게 항소를 쓰는 이 욥의 영적인 대담함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담대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흠이 많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옷을 입듯이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이 사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거고 종교개혁자들이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했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신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죽음, 미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2015년, '마지막 달이 올 줄이야.' 우리가 예상은 했으나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왔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한 달이 늘 '오려니, 오려니' 생각하지만 실감하지 못하고 사는데 당도해야 '왔구나!'하고 사는 저희들,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금년 한 해 수요공부, 이렇게 쭉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인도해주셔서 공부했습니다. 특별히 이제 욥기를 중반 넘어가고 후반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그리고 우리 신앙적인 실존이 더 진지하게 경험되도록 인도해 주시니 무슨 말로 저희들이 다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약함을 주님께서 아시오니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잘 읽었습니다. ^^
읽다보니 제 모습이 떠올라서 웃다가 울다가 합니다요.ㅎㅎ
욥과는 반대로 저는 늘 신을 향해(정확히 신을 향해서였는지도 모르겠음)
끓어오르는 분노를 동력삼아 온갖 힐난을 퍼붓기도 하고 좀 봐달라고 애절하고도 가련하게 읍소하기도 하고
아무튼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왔었어요.
누군가, 하나님이 그렇게 싫은데 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더라고요.
이게...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사태에 대한 해명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람이 너무 절박하면 내가 신과 담판을 짓겠다 하는 심정이 생깁니다.
어린 날에는 오늘 내가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대했던 만큼 슬픔도 커져서 하나님의 그 무서운 침묵을 등에 업고 질질질 울며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요..ㅎㅎ
해명되지 않으면 나는 끝까지 버티겠다고 했던 그 어리석은 무모함이 떠올라 웃음이 나네요.
그랬던 제가 어느 시기를 거쳐 달라지게 됐는데요, 묘하게도 그게 욥기의 내용과 좀 닮아있기도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이 아주 강하게... 에이.. 좀 식상하네요.ㅎㅎ
아무튼 엄청나게 반항아 모드였던 저를 의롭다 하시고 지금까지 당신을 설명하고 계신 주님,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잘 가봐야죠. ^^
35절 말씀이 강렬하군요.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이제 31장까지 다 끝내셨네요.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저도 열심히 강의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