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1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욥기 마지막 장입니다. 이 욥기를 작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1년 가까이 공부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42장이고요. 다음 주에는 욥기 전체를 총정리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새로운 것을 해야 하는데 제가 이모저모로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신학자의 책을 읽을까, 신약성경을 공부할까를 기도하면서 생각 중인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주말까지 조금 생각을 해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내용이 조금 짧아요. 1절~17절까지입니다. 앞부분에 욥의 이야기가 간단하게 나오고요. 그 앞에 38장~41장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어요. 총 네 장이에요. 거기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 돼서 나왔습니다. 물론 중간에 욥이 잠깐 이야기 한 부분이 있어요. 40장 3절, 4절에서 욥이 간단하게 반응을 보이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욥이 자기의 생각을 42장 1절~6절까지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 보면 욥기의 액기스라고 할 수 있어요. 결정적인 포인트라고 할까요? 욥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입으로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7절부터는 하나님께서 몇 가지 이런저런 충고 겸 욥의 친구들에 대한 일들을 말씀하시고 1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욥이 옛날보다 훨씬 더 잘 되고 말년에 복을 더 많이 받아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거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있었기에 그런 쪽을 조금 채워주는 거고요. 욥기서 전체 주제에서 보면 그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1절~17절까지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욥기 42장>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구약에는 죽은 다음의 내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지옥 개념이 있긴 해요. 스올이나 게헨나와 같은 땅 속, 음부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데요.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좀 약합니다. 여기도 보면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하고 딱 끝나버려요. 죽어서 하나님에게 갔다는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구약에서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으니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충분하게 이해를 못했고요. 이게 세월이 지나오면서 구약 시대 후반부로 오면, 바벨론 포로 뒤로 묵시사상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자리를 잡으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생각이 더 열렸어요. 그 생각이 예수님에 이르러서 하나님 나라,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쪽으로 더 크게 열리게 됐습니다. 이건 제가 방금 마지막 성경구절을 읽다보니까 생각이 나서 간단하게 말씀드렸는데 오늘 말씀과 직접 관계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보면 서론으로 지난 한 주간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시합을 간단하게 썼어요. 하나의 에피소드인데요. 여러분들이 매스컴을 통해 재밌게 보셨죠? 전혀 모르시는 분 계세요? 알파고하고 이세돌과의 바둑시합이에요. 이세돌을 보통 사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로 9단이거든요. 프로로 가면 단 마다 이름이 있어요. 제가 다른 건 모르고 9단이 되면 최고예요. 더 이상 없습니다. 거기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켜서 입신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적인 경지예요. 머릿속으로 몇 수 앞으로 나올 변화들을 다 그려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왔어요. 그래서 열심히 주산 연습을 했어요. 이 주산 연습도 매일 해야 돼요. 아침에 수업하기 전에 일찍 가서 연습했어요. 그리고 주산 선생님이 입으로 멋지게 운율을 넣어서 숫자를 불러주시면 주판을 놓는 연습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급수도 따고 졸업하기 전에 해야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때 간혹 아주 잘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 애들은 주판 대회도 나가요. 우리가 볼 때는 걔네들은 귀신같은 거예요.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게 되면 주판을 직접 놓지 않고 머리로 계산을 합니다. 암산이죠. 주판알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긴 숫자들도 답을 내요. 우리가 볼 땐 정말 귀신이죠. 심지어는 더하기, 빼기만이 아니라 곱하기도 해요. 주산도 곱하기를 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이건 더하기, 빼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한데도 그거마저도 머릿속으로 계산합니다. 대단하죠.


이 알파고를 인공지능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계산기예요. 0과 1로 모든 걸 처리하는 기계가 컴퓨터인데 이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가르쳐 준 것만 하는 게 아니라 가르쳐주지 않은 것도 어떤 것을 추정해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거예요. 그걸 ‘딥 러닝’이라고 합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이렇게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더 극단적으로 발전하다 보면, 구글의 빅 데이터라고 있는데 컴퓨터로 되어 있는 무지하게 큰 공장에 무한할 정도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그쪽으로 연결시키면 무엇이든지 다 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빅 데이터가 전지전능하게 될 수가 있는 거죠. 현재와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서 아시겠지만 앞으로 의사들도 많이 필요가 없게 돼요. 최소한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공지능에 연결해서 데이터를 입력하면 병명이 나오고 처방은 어떻게 할지 나와 버리니까 필요가 없고요. 더 나아가서는 재판정도 필요 없을 거고요. 선생들도 물론 필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목사도 필요 없을 거예요. 어떤 정보를 넣어주면 이 교회에 딱 맞는 설교문이 나오거든요. 이걸 좋게 볼 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쨌든 좋든 나쁘든 과학은 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스마트폰이 청년들에게는 신과 마찬가지일 걸요. 늘 붙어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멀게 느껴지고 스마트폰을 통해서 모든 세계와 소통하니까 신처럼 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러한 알파고의 개념들이 더 발전하게 될 때에 기독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변증할 것이냐가 큰 숙제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어쨌든 프로그램이니까 아무리 딥 러닝을 통해서 온갖 조화를 부리듯이 우리 삶에 해결책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기계로써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거죠. 그런 점에서 계속 논쟁을 하고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 구글에서 무인자동차를 선도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북안에서 여기 올 때 굳이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냥 뒷좌석에 앉아서 졸고 있으면 여기에 자동으로 도착을 하는데 지금 그 기술이 실용화 단계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실용화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거기에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윤리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 등등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 자세하게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을 대체할 만한 인공지능의 시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야기할 거냐에 대한 숙제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겁니다. 오늘 42장의 핵심도 그거잖아요. 욥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알파고 시대에 욥의 고백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 숙제인거죠. 무조건 ‘믿기만 해라.’ 이런 걸로는 해결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5절을 보세요. 이 구절을 여러분들이 반복해서 보셔야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이 욥이 큰 재앙을 만나서 친구들로부터 죄 때문이라는 핀잔, 충고, 위로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점점 코너로 몰리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직접 판단을 받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 있었는데, 앞에서 본 대로 38장~41장 사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을 하시자 욥은 비로소 하나님을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들은 정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 듣는 것과 보는 것, 두 가지가 비교됐잖아요. 듣는 것은 그냥 정보를 아는 정도를 가리키는 거고 보는 것은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정도로 욥의 하나님 경험이 아주 확실했다는 것을 이 구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도대체 어떤 걸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동화책처럼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나타나서 욥에게 ‘나 봐라.’ 이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인데요.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하나님 경험을 어떻게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믿느냐’에 대해 ‘내가 많이 들었다. 성경을 읽었다. 그래서 내가 믿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조금 자신도 없어요. 도대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뭘까에 대한 질문이 금방 끝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그런 걸 바탕에 깔고 말씀을 좀 더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38장~41장까지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고 제가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38장~41장에서 말하는 것은 자연의 깊이와 비밀이에요. 그걸 통해서 욥이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건 없어요. 여기 직접적으로 본 것처럼 이야기가 나온 것도 아니고 38장~41장까지는 계속해서 ‘이걸 봤냐. 이걸 아느냐.’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봤어요. ‘리워야단’이라든지 여러 이상한 동물들도 나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들도 나오고 거기서 벌어지는 자연의 깊이와 비밀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걸 아느냐. 본 적이 있느냐.’ 이러한 질문은 곧 자연이 우리를 초월해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강의안에 있는 초월이라는 단어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다시 한 번 보세요. 초월은 우리를 뛰어넘어서 있다는 겁니다. 너머에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자연이 우리와 굉장히 가깝게 느껴져요. 제가 아까 기도할 때 봄 날씨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또 밖에 나가보면 꽃 피는 계절이 막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들죠. 그런데 그게 사실은 다 비밀입니다. 왜 그러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많이 필요한데 일단 조금 더 나가 봅시다.


자연이 우리를 초월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38장~41장까지 나오는 ‘네가 이것을 아느냐.’ 이런 표현들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를 초월해 있다는 것이고 그 초월한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보는 자연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반대를 많이 해요. ‘자연이 뭘 그렇게 초월해 있느냐. 지금 알파고 봐라. 이제는 인간 기술이 자연을 다 정복한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직관을 기계가 뛰어 넘는다.’ 이런 이야기가 되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 자연이라는 게 하나님의 창조로써 우리를 초월 해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자연과학기술을 통해서 결국은 극복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자연은 초월해있지 않죠. 그것은 우리가 극복할 대상이 되는 거죠. 그것은 곧 하나님도 극복할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의 새로운 위기이긴 해요. 여태까지는 비판을 받아 봐야 칼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든지, 포이에르 바흐의 ‘인간 욕망의 환상’ 프로이트도 비슷하게 ‘인간의 투사, 자기가 원하는 초자, 슈퍼맨에 대한 투사’ 그래서 그 슈퍼맨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성취하려는 거라는 비판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은 극복이 될 수 있는 문제인데 현재 이 자연과학기술은 크게 위협적입니다.


현대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기술만능주의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들이 다 그걸로 지배를 받게 되었어요. 제가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는데 그게 큰 위기로 느껴져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스마트폰이 인공지능하고 연결이 되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스마트폰을 통해 받게 되고 전지전능한 것들이 손 안에 들어오는 시대, 기술을 통해서 그런 것들이 가능한 시대가 되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나 하는 위기인 거죠. 그래서 제가 마지막, 욥기 42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이 고백을 단순히 믿으면 된다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따라가고 21세기에 새로운 말로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지금 자연과학기술이 아주 극도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를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시대에 뒤 떨어지는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종교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생각이 있거나 현대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 해버리는 종교가 될 수 있어요. 아주 늙어서 아무 활동도 못하고 현실적인 능력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뒷방에 혼자 앉아 있어서 손자들이 가끔 가서 인사나 드리고 불쌍하게 취급하는 대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준비만 하면 이 성서는 훨씬 더 지금 21세기 최첨단 기술주의보다도 근원적인 세계를 말하고 있고 그런 것들이 확실하게 담겨있어서 우리가 잘 따라가기만 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자연과학기술과 신학, 혹은 신앙 사이에는 계속해서 논쟁할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 적대적이라는 게 아니라 같이 협조를 한다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눈다는 방식으로라도 논쟁적입니다. 이 자연과학기술이 아까 알파고 이야기할 때 비췄듯이 좋은 쪽으로만 이야기해서 인공지능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현대인들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데, 이게 일종의 낙관론이죠. 기술 낙관주의, 인간이 과학기술을 잘 이용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이데거라는 사람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마틴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알파고와 이세돌의 문제 때문에 글을 한 번 쓰려고 다른 때 읽었던 이 사람의 책을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 마틴 하이데거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 책이에요. 제목이 ‘기술과 전향’입니다. 기술에 대해서 말하는 논문이 한 편 들어있고 그리고 전향이라고 해서 돌아선다는 건데 그건 제가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책인데 제가 오늘 기술에 대한 글을 잠깐 읽었어요. 여기서 이 하이데거가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이 기술이 뭐냐’, 알파고도 기본적으로 기술이죠. 테크닉이에요. 이 기술의 본질이 뭔지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연을 닦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네요. 독일어 표현을 닦달하는 걸로 번역을 했어요. 이기상씨라는 철학자가 번역을 했는데 이게 정확한 번역인지는 자기도 자신이 없다고 하네요. 독일어로 ‘Ge-ste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떤 단어냐면 독일어로 ‘stellen’이라는 동사가 있어요. 이건 ‘~를 놓다’라는 뜻이에요. ‘책을 책상 위에 놓는다.’할 때 ‘stellen’을 씁니다. 이 단어를 과거분사로 하면 'stellen, stellte, gestellt' 이렇게 변화돼요. 영어도 그렇잖아요. 현재, 과거, 과거분사로 변하지 않습니까. 이 독일어 ‘stellen’을 과거분사로 해서 ‘gestellt’인데 그걸 명사화해서 ‘Ge-stell’이라고 하이데거가 단어를 만들었어요. 그걸 이기상씨가 의역을 해서 ‘닦달’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게 이런 뜻이에요. 이전까지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되 친구처럼 지낸 거예요.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자연이 주는 걸 받아서 먹는 거예요. 조금 발전해서 비료를 주고 김을 맨다거나 하는 정도로 자연과 함께 지냈어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로는 자연과 같이 지내는 게 아니라 자연을 못살게 구는 거예요. 닦달해서 빼앗는 거죠. 그래서 땅 속에 있는 석탄, 석유 다 뽑아 쓰고 원자력 기술로 원자폭탄이나 핵발전소 만들고요. 그런 것들이 자연에 숨어 있는 것들을(은폐라고 하는데) 억지로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산업혁명(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래요.) 전까지는 자연이 우리들에게 베푸는 것을 받아먹고 살았는데 그 이 후로는 강압적으로 자연의 세계에 은폐된 것들을 끄집어내서 빼앗아 먹는 식으로 기술이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기술은 자연을 닦달하는 겁니다. 어느 때 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자연이 우리들에게 줄지 모르지만 한계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엉클어지는 거죠. 그래서 하이데거가 기술에 의해서 점점 인간성이 상실되는 위기가 온다고 말을 해요.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보면 세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서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저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문장을 읽어 보겠어요. ‘위험이 가까워올수록 구원자에게 이르는 길은 더 밝게 빛나고, 더 질문하게 된다.’ 이 문장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쉽게 말해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죠. 그러니까 낙동강이 흐르는 대로 놔두고 더 불어 사는 게 아니라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거기에다 수문으로 막고 기술을 무분별하게 집어넣어서 강의 존엄성, 신성함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거죠. 그게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기술 우월주의, 기술 낙관론 식으로 ‘그걸로 강이 산다.’라고 하는 일들을 닦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4대강 살리기 같은 것들이 닦달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게 우리들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요. ‘위험이 가까워올수록 구원자에게 이르는 길은 더 밝게 빛나고’ 그러니까 그게 아닌 것을 알게 되니까요. 이런 무분별한 방식으로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혹사시키고 인간 중심으로 파괴한다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들 말입니다. 여러분 유전자 조작 식품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이것도 기술이에요. 유전자를 조작해서 벌레가 하나도 먹지 않는 밀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또는 벌레가 오면 죽어버리는 옥수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럼 생산이 많이 늘어나게 되죠. 이 유전자 조작으로 나온 것들로 생산량을 많이 늘릴 수 있으니까 그걸 이용을 해서 잘 먹고 잘 살자고 할 수도 있는데요. 유전자 조작으로 된 것들이 동물 사료로 많이 가고 우리 먹을거리나 화장품에 많이 들어갑니다. 그것이 지금은 모르지만 세월이 쌓이면서 어떤 방식으로 이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할지 모르는 거죠. 그런데 기술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어쩌면 기술로 인해서 인간이 멸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데 인공지능을 통해서 다 예측할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하이데거의 이 말이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적 파괴와 희망으로 읽혀집니다.


'(기술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위험이 가까울수록 결국 구원자에게 이르는 길이 더 밝게 빛나고'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죠. 요한계시록은 세상이 끝장나는 걸 말하는 거예요. 묵시적 파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이 세상이 결단되고 파괴되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묵시적인 사상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인데 하이데거가 이 문장에서 그러한 표현을 하고 있네요. 이게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에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 사유의 영성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생각하는 것의 영성, 'die Frömmigkeit des Denkens'라고 해서 사유의 경건성, 종교성, 영성이라는 뜻이에요. 이걸 제 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기술로 인해 이 세계가 대 파국을 맡게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예수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게 더 가까이 왔다고 느낄 수 있고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게 합니다. 여기서 질문이라는 것은 사유의 경건성, 종교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욥이 하나님을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한 것을 해석하는 중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는 거죠. 욥이 경험한 것은 38장~41장에 이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것이었어요. 자연의 깊이와 비밀이죠. 그러니까 자연이 우리를 초월 해있다는 사실을 욥이 아주 실질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을 귀가 아니라 눈으로 볼 정도로 확실하게 경험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깊이와 비밀이 뭐냐를 알아야 욥의 경험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복해서 자연과 기술, 과학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간단하지 않죠? '뭘 복잡하게 생각 하냐. 믿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도 좋은 겁니다. 이걸 다 알아야 되는 건 아닌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과학자가 되고 철학자가 되고 신학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다 몰라도 돼요. 그냥 믿기만 해도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있는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내용을 몰라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믿음이니까요. 그러나 그 믿음의 컨텐츠,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제가 이런저런 말씀드린 철학, 과학, 기술 등을 가능하면 전반적으로 공부하는 게 좋고 또 21세기 자연과학 시대에 기독교를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가 올바르게 변증하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베드로후서인가 어디에서도 '네 소망을 설명할 준비를 해라.'는 말이 나와 있듯이,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설명해야 살아있는 신앙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 수요모임은 주로 공부하는 거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약간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말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가서 조금 줄여야겠습니다. 요약문 밑에서 두 번째 패러그래프는 넘어가겠어요. 거기서는 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우리가 심층적으로 이해해야만 38장~41장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가 몇 가지 경구들을 적어놨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그것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불립문자, 공즉시생 색즉시공, 이게 다 연관되는 문제예요. 그리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화이트 헤드의 '리얼리티는 프로세스다.',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무로부터의 창조, 예수의 재림, 종말, 심판, 이런 것들이 자연과 과학과 다 직결되는 것들이에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거는 제가 오늘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 패러그래프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실제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또렷하게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책처럼 읽히는 게 아니라 존재 신비로 계시는 거예요. 아까 자연이 초월 해있다고 하는데 그 깊이, 심연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거죠. 그걸 또렷하게 경험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봤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말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누미노제, 거룩한 두려움'이에요. 하늘을 볼 때 느끼는 아득함이 이런 것에 포함돼요.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린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죠?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런 거 없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거예요. 두렵고 떨린다는 거요. 사실은 우리도 일상에서 이러한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게 살고 있어서 종교의 깊이를 경험하기가 힘들어요. 만날 TV매체나 우리가 일상에서 성취할 것들로 머릿속에 가득해서 두렵고 떨린다는 경험을 하지 못하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거는 그냥 되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노력을 해야 되고 시간을 내서 공부도 같이 하면서 조금씩 영적인 안목이 열리게 되면 그 세계가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세계를 전혀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욥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룰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두렵고 떨린다는 뜻입니다. 못하실 일이 없다는 말을 너무 상투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저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득함을 느끼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죠.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이 머릿속에 꽉 들어있어서(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습니다.) 자기의 안목으로 모든 걸 재단하는 식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게 맞는 경우가 많아요. 경험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경우에 옳은 이야기이긴 한데 다 옳은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되 그걸 절대화하지 않고 이 세계를 열린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한데 오늘 여기 욥이 이야기하는 말 속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준으로 세상과 벌어지는 일상들, 사람에 대한 것들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되면 자신감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내가 판단하지 않겠다는 영성에 들어가면 그 때서야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내 기준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기준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통치하는 분이 계시다는 그 쪽으로 마음을 여는 거죠. 지금 욥이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며' 주님의 그 자유, 그 영역을 열어놓고 세계를 보는 영적인 안목이 여기 들어있는 거예요.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걸 하루로 끝내지 말고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중요하네요.


강의 요약문 마지막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결론으로 제 입장에서 이해한 것으로 정리한 겁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삶을 전체로(죽음까지 이르는 전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42장, 앞부분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유대인들의 영성의 토양이었고, 또 초기 기독교인들로부터 시작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반복해서 읽혀지고 영적인 세계에 하나의 원천으로써 살아있던 말씀을 오늘 우리가 이렇게 수요일 저녁에 감격스러운 자세로 읽었습니다.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들은 풍월이 아니라 내 삶에 일치하여 경험하는 우리들 되도록 주님 돌봐주십시오. 우리 약한 부분들 성령께서 채워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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