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36장>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1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17.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18.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19. 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20.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21.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22.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23.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24.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25.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26.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27.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28.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29. 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30.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31.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32.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33.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


<욥기 37장>

1.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3.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7.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9.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10.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11.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15.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16.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17.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18.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19.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20.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21.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22.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오늘은 욥기 36장과 37장입니다.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에 해당됩니다. 이것으로 사람들 간의 논란은 다 끝납니다.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의 논쟁, 그리고 엘리후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다 끝나요.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38장부터 42장까지 나오게 되죠.(42장은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부분이에요.) 그것도 우리가 차례대로 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거의 다 한 셈입니다. 이 엘리후의 이야기는 욥기 전체에서 볼 때 입장이 약간 애매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고 조금 색다릅니다. 두 가지 관점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형식적인 점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은 서로 논쟁을 주고받잖아요. 한 친구가 이야기하면 욥이 반론하는 식으로 주고받으며 세 번씩 반복돼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씩 나와서 이야기하고 욥이 반론하는 식으로 하는데 반해서 이 엘리후의 이야기는 욥이 반론을 펴지 않습니다. 엘리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끝내요. 그런 점이 형식적인 특징이고 내용적으로 보면 이 엘리후의 논점이 앞의 친구들과는 조금 다르게 사람에게 임하는 재난이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미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욥의 친구들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했죠. 제가 여러 번 반복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잘 들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 친구들은 ‘죄다. 회개해라. 죄 때문에 이런 재난이 임한다.’는 전통에 서 있었던 반면에 이 엘리후는 한 걸음 더 나가서, 극단적이지 않고 은혜롭다고 할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 이런 쪽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한 번 큰 덩어리로 보면 맨 앞부분은 욥이 당한 실제적인 시련과 어려움들, 사탄이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욥을 비난하고 시험에 들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욥이 졸지에 당하는 어려움들이 나오잖아요. 그게 한 덩어리고요. 그리고 중간에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한 덩어리고요. 그 다음에 엘리후가 혼자 하는 이야기인데 제법 길게 나오고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마지막 종결입니다. 이 엘리후의 이야기는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예요. 갑자기 가지 않고 한 단계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갑니다. 욥의 친구들의 비난,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의 이야기, 한 단계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엘리후의 이야기에는 나중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유사한 게 있어요.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이야기를 차분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가 너무 길어서 우리가 읽지는 않겠어요. 여러분들이 집에서 다 읽어 왔다고 제가 생각을 하고, 그리고 지금이라도 눈으로 보시면서 공부를 하면 들어오고요. 비슷한 이야기들이 앞에서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읽지 않아도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36장 24절에서 33절까지, 이 부분이 나중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당히 가까워요. 37장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 다음 단락에서 보겠습니다. 일단 거기만 보겠습니다. 36장 24절에서 33절까지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봐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높여라.’하면서 자연현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복 드리지만 나중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히 가까워요.


이 구절은 고대 유대인들이 찬송으로 많이 부를만한 내용입니다. 시편이나 구약의 곳곳에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근동에 있었던 여러 고대 종교에 이와 비슷한 서사시들이 많이 나와요. 그건 이 세계와 자연을 보면 당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에요. 엘리후가 24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들을 기억하라, 높이라, 잊지 마라, 찬송하라.’ 그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참 멋진 표현입니다. 이게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예배는 바로 이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 행위가 이런 것에 근거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거죠. 성만찬도 기억하고 하나님의 창조도 기억하고요. 이 기억이라는 게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거고요.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 그런 기억을 가져야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 예수 그리스도 사건들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억으로 쭉 내려왔어요. 그리고 구약에 보면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이것을 읽혀서 기억하게 하라는 표현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젊은 사람들,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가르쳐서 기억하게 하는 훈련들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것을 잘 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라, 높이라, 잊지 마라, 찬송하라.’ 이런 멋진 말을 하는데 그 이유가 26절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은 높으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다.’ 높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여기서는 알 수 없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이상하죠? 성경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표현해야 하는데 알 수 없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보면 철학용어가 한, 두 가지 나와요. 거기 불가지론이라는 게 있어요. ‘agnostic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 그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이 영지주의예요. ‘gnosticism’이라고 해서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궁극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옛날에 마니교에서 주장했고 어거스틴이 여기에 깊게 빠졌어요. 마니교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적인 영지주의거든요. 이러한 입장들이 있는데 엘리후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불가지론이나 영지주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성서의 기본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으니까 아예 말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식을 뛰어넘는 그 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건강하죠? 그리고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단락부터는 바로 뒤에 38장부터 나오게 될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가까워요.


이제 ‘하나님은 높으시고 알 수 없는 분이고 햇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그 다음 구절부터 자연현상으로 설명합니다. 27절 보세요. 물방울, 빗방울, 안개, 구름, 우렛소리, 번갯불 등의 용어가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 자연현상이 지금도 신비로운데 옛날 사람들에게는 오죽했겠습니다. 그러한 물리적인 현상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 먹구름, 비바람, 천둥번개, 화산폭발 등은 신적인 어떤 현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 우리의 눈에도 신비로운데 고대인들에게는 더 했겠죠. 지금 우리는 여기서 엘리후가 묘사한 것들을 과학적으로 많이 압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나온 말들이 물리적인 현상을 몰랐을 때에 가졌던 유치한 신앙이니까 우리가 그런 것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건 착각인 거예요. 표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고 있지만 어떤 현상, 어떤 사물의 근원적인 것을 향한 경외, 신비감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있어야 되는 거죠.


강의 요약문에 철학 개념 하나를 인용했습니다. 제가 오늘은 이 문제가 철학적인 의미가 조금 필요한 것 같아서 이런 단어를 좀 썼습니다. 강의 요약문을 보십시오.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라는 단어를 썼어요. 처음 들어보셨죠? 이건 아주 전문적인 철학 용어예요. 칸트가 이야기하고 헤겔에 까지 나오게 되는 용어예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들은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돼요. 그러나 이런 철학자들의 경험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많이 통해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려다 보니까 이런 전문적인 용어가 필요한 거지 실질적으로 이 세계를 직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삶과 세계의 신비를 눈여겨보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철학자들 못지않게 어떤 깊은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물자체라는 이 단어요. 독일어로 'Das Ding an Sich'라고 제가 달아놨습니다. 물(物)은 사물 그 자체예요. Ding은 독일어로 사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Thing이에요. 그 사물(Das Ding), an Sich, 즉자 되어있다는 독일어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물자체(物自體)예요.


여기 종이컵이 있습니다. 사물이죠. 이걸 종이컵이라고 이야기하면 이건 그냥 사물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철학자들은 사물로만 보지 않고(사물은 사물이지만) 이렇게 종이컵에 물 따라서 먹고 찢어서 없애버릴 수 있는 그런 사물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정말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거예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여기 종이컵이 있는데 이 자체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컵을 처음에 누군가 생각해서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컵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이 생각한 게 아니라 종이컵이라는 물자체, 그게 사람의 머리에 들어와서 개념으로 이해가 돼가지고 이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죠. 제가 설명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철학자들은 자꾸만 쉬운 것도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근원이 밝혀지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아직 뭐가 뭔지를 다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일상들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물리학자들, 철학자들, 신학자들은 근원적인 것에 대해 다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근원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여기 엘리후가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부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가 아닌 거거든요. 그래서 하이데거라는 사람은(지금 칸트, 헤겔 쭉 내려오는 거예요. 이건 고대 헬라철학에서도 많이 이야기하고요.) 어느 대학교에 젊었을 때 교수로 청빙을 받아서 간 강연에서 이런 제목으로 첫 번 부임 강연을 했습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라고 하는 제목이었어요. 너무 뻔한 질문인 것 같지만 철학자들에게 오랫동안 내려왔던 질문이에요. 스피노자도 그런 질문을 했고 헬라사람도 그런 생각을 했고 기독교도 마찬가지이고 근원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들은 다 생각해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어요. 이것들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무와 사람이 아닌 것은 무예요. 개념적으로 볼 때요. 그러니까 사람, 나무만 볼 때는 존재하는 거고 그 바깥의 세계는 무예요. (제가 엘리후의 말한 것 때문에 지금 이 주제를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작은 힌트를 받으면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어떤 굉장히 중요한 느낌을 얻으실 거예요. 하나님을 그냥 낱말 뜻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깨달아 가고 느끼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건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에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이 더 깊어지면 전혀 새롭게 하나님이 경험 될 겁니다. 엘리후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런 말부터 내려오는 부분을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나무와 사람은 있는데 나무와 사람의 중간되는 것은 없잖아요. 그게 무예요. 그런데 그게 왜 없냐는 거죠. 우리는 없을 걸 당연하게 생각하죠. 나무가 있고 고양이, 뱀이 있고 매화나무, 사람, 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만 보는데 철학자들은 안 보이는 것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기 때문에요. 그런 표현들을 우리 신앙적인 표현으로 가져와서 말하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 가서 조금 더 할 기회가 올 겁니다. 첫 번째 단락은 그렇게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단락, 37장 1절에서 24절입니다. 여기는 바로 앞에서 본 36장 24절에서 33절을 조금 더 진행시킨 이야기예요. 그게 다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에 속합니다. 이 엘리후는 상당히 진정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물론 앞에 있는 욥의 세 명의 친구들도 나름으로 그렇긴 한데 이 엘리후는 조금 더 신앙적인 진정성이 확보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37장 1절을 보세요. ‘이로 말미암아(앞에서 한 이야기예요.)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하나님 경험이죠. 자신의 근원이 흔들리는 거예요. 절대적인 존재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토대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중요한데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99%이상 하게 되면 두렵고 흔들리는 거죠.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이 우리들에게 강요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험되는 차원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모든 걸 버려두고 따랐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절대자로 경험하게 되면 다른 것들은 다 작아지니까 그런 걸 버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쪽으로 끝까지 더 가는 사람은 출가해야 되겠죠.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는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점점 커져서 내 영혼을 가득 채우게 돼요. 그래서 다른 것들은 축소돼서 중요하게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경험 자체를 많은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던 것, 즐거운 것들이 자기를 감싸고 있는데 그게 별거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 존재가 불안해지니까 그런 경험들을 두려워하고 가끔 그런 경험이 오게 돼도 다시 포기하게 되죠. 그래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되죠. 그러면 어디에 집착했던 것으로부터 근원적인 자유가 가능합니다.


이 엘리후가 37장 1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신앙적인 진정성을 보이고 있어요. 나중에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이러한 영적인 태도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자주 있었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수준이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10절 보실까요. ‘하나님이 크시다. 높으시다. 아주 오묘한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경외한다.’ 경외한다는 것은 37장 1절에서 나온 것처럼 떠는 거예요.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린 경험, 모세가 경험했고 이사야,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모든 선지자들이 그런 경험을 했어요. 이게 너무 크고 절대적이라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압박감을 느끼는 거죠. 그것을 버텨내면 정말 자유로워지고 하나님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렸다는 그러한 것들을 앞에서 나온 구절과 비슷하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큰 능력을 행하셨다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10절,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이것도 고대인들의 눈에는 신비하게 보였을 거예요. 16절, 1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우리도 이러한 느낌들은 자주합니다. 봄이 오면 공기가 따뜻해지잖아요. 우리는 그러한 계절의 운행을 아는데 고대인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조금 다르게 물리학적인 정보가 많이 없어서 이런 것들을 더 신비롭게 경험을 했어요. 처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약간의 지식이 있다고 해서 이런 신비감을 놓치면 곤란한 거예요.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으로써 우리가 물리학적인 지식을 좀 얻었다고 해서 다 정복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한 철학용어를 빌리면 물자체예요.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근원적인 세계라서 그런 세계에 대한 신비감, 이런 것들은 우리 신앙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쭉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한 번 읽어보기길 바랍니다. 시편에도 나올만한 좋은 구절들입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책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요즘 매일묵상에 조금씩 소개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는 때 읽고 난 다음에 여운이 계속 남는 책이 있잖아요. 영화를 볼 때도 그렇고요. 그런 느낌들이 남는 게 좋은 것인데 이 책이 그렇습니다. 앤드류 놀이라는 사람이 쓴 <생명, 최초의 30억년>이라는 책입니다. 지구와 생명과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지질학이나 천문학, 이런 것은 제가 신학대 학부 때부터 꾸준하게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만큼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전문가를 통해서 조금 더 다른 전문적인 영역을 이번에 공부를 했어요. 고지질학, 고생물학이에요. 시베리아나 중국, 캐나다 어느 지역에 가서 몇 십억 년 전에 있었던 돌을 캐다가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이것이 어느 시대에 있었던 것들인가를 연구하는 책이었습니다.


거기 보면, 지구가 지금까지 45억년이 됐는데 아주 원시적인 생명체가 지구 안에 생기게 된 게 5억년 지나서예요. 그리고 5억년부터 시작해서 쭉 내려와서 지금부터 10억 년 전에 이르러서 지구 안에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시계를 가리켜서 캄브리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남아있어요. 제가 아주 옛날 몇 십억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지고요. 몇 십억 년부터 있었던 작은 균들, 박테리아, 곤충들부터 진화돼서 쭉 퍼지는 것들을 흥미진진하게 공부했습니다. 앞으로 1억년 후에, 10억년 후에도 인간이 지구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를 인간이라고 하는데 어느 때부터 인간이라고 하는지도 쉽지 않아요. 호모 사피엔스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호모 에렉투스(직립인), 그리고 유인원들 많잖아요. 크로마뇽인, 북경인, 네안데르탈인, 곳곳에 사람의 조상이 됐을만한 유인원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다 사람의 조상은 아니고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의 조상이 되는데, 보통 200만 년 전쯤 정도로 사람 모양을 갖추었다고 이야기합니다.(여러분들이 지금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조론이 아니고 진화론을 믿는 것 아니냐. 그렇게 염려하시지 않겠죠?) 사람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역사를 가진 것은 더 짧고요. 이 지구 안에서 앞으로 인간이 1억년 이상 산다는 보장이 없어요. 10억년 가게 되면 더 다를 거고요. 지구에 있었던 모든 생명체, 났다가 사라진 것들도 많은데요. 공룡 같은 것들은 없어졌고 그 외에 수많은 종들이 났다가 없어졌는데요. 그런 것들은 다 자연에 기대서 살았어요. 그런데 인간만 자연을 통제하고 있는 거죠. 인간만 자연적이지 않아요.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창세기에 나와 있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금 극단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소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멸종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우주의 생명을 새롭게 이어가시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 현재 생존에 계신 개신교 최고의 조직신학자가 계신데 그분이 쓰신 책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신학은 앞으로 인류가 멸종된 다음까지 내다보면서 신학 작업을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이 좁아지는 게 아니라 더 확대되는 거예요. 인간중심이 아니라 우주전체의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을 내다보는 신앙적인 전망, 비전, 그런 것들이죠. 이게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에요. 이미 성서에서 다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보세요. 여기에 우주의 대 파국, 바다가 허물어지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리게 되는 표현들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인간이 핵폭탄을 쓰게 된다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연하게 핵전쟁이 일어난다거나 아니면 생태가 금방 변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지금 생태는 공기 중에 질소, 수소, 산소가 적당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산소가 조금 부족해지거나 조금 많아진다면 인간이 살지 못합니다. 굉장히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현재와 같은 문명을 가진 인간이 지구에 출현하게 된 거예요. 이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과학을 잘못 사용해서 이 생태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허물게 되면, 그걸 다시 복구할 만한 기술 문명이 없는 한 멸종하는 거죠. 그런데다가 빙하기가 오게 되면 지구의 인간이 저 우주 어디에 지구와 비슷한 또 하나의 행성으로 이민을 가지 않는 한 다 죽습니다. 오늘 저녁에 은혜 받으러 왔는데 끔찍한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그런데 이걸 견뎌야 하나님 신앙에 들어가는 거예요.


마지막 단락 보십시오. 36장 10절을 마지막 단락으로 제가 잡았습니다. 그 한 구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의 길을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거기 교훈이라고 번역된 단어 있죠? 그건 연단이라고 번역해도 된다고 합니다. 이게 엘리후 입장의 키워드, 핵심이에요. 지금 엘리후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신비로움,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앞으로 나오게 될 하나님의 말씀에 딱 들어맞는 건데 이 엘리후의 말을 통해서 욥이 위로를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 엘리후는 기본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초월적 신비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에게 임하는 재난이, 구체적으로 욥에게 임한 재난이 하나님의 연단이니까 참고 회개하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욥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어떤 방향에서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엘리후에게는 그런 한계가 있었던 거죠. 어쨌든지 엘리후가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순종하고 회개하라는 것을 계속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달라졌지만 욥은 일단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죠. 그게 42장 1절에서 6절 사이에 나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42장 1절에서 6절을 해석할 때 저에게 큰 부담이 있어요. 앞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특별히 다른 게 없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만 욥이 회개했나하는 거죠. 이 회개할 만한 근거가 무엇이었나를 제가 찾아내야 되는데 아직까지 뾰족한 것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때까지 기도하면서 조금 더 연구를 잘 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2016년 1월이 가고 2월이 시작했습니다. 늘 입에 붙듯이 세월이 빠르다, 빠르다 하는데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자체가, 우리의 영적인 중심이 그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통치 앞에 머리 숙이고 귀를 기울이는 우리들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이런저런 우리가 처리해야 될 바쁜 일들로 인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바쁘기도 하고 모든 에너지를 다 거기다 쏟고 삽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기회를 얻든지 조금 부족하든지 최선을 다해서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이제 우리 수요일 저녁마다 시간을 절약하여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우리 모든 믿음의 동지들에게 한결같은 주님의 평화와 은혜를 허락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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