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11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22장>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15.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17.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18.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욥기 23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욥기 본문은 22장과 23장입니다. 어느새 많이 왔네요. 이 욥기가 어떻게 보면 조금 지루할 수 있는 성경이에요. 그리고 오늘도 제가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언뜻 생각했는데 욥기가 성경 전체 중에서 ‘아멘’을 하지 말아야 될 내용이 제일 많은 책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런 책이 없잖아요. 대개 다는 하나님의 뜻이라서 우리가 성경 읽을 때마다 ‘아멘’해야 하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은 거예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더 많거든요. 친구 세 명에 엘리후까지 하면 네 명인데 지금 4대 1로 논쟁을 하는 거예요. 물론 분량으로 보면 4대 1이라고 하더라도 욥이 4분의 1만큼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내용으로는 더 많이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네 명과 한 사람의 신학적인 논쟁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 친구들의 언급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멘’을 할 수 없잖아요. 그런 욥기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게 전체적으로 42장까지 있는데 오늘 23장까지니까 반을 넘어가는 거네요. 지난주에 21장까지 했으니까 딱 반을 했습니다. 오늘은 22장과 23장이에요. 엘리바스의 세 번째 충고와 욥의 답변입니다. 이 친구들이 한 번 충고하고 욥이 대답하는 식으로 한 바퀴 돌아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한 사람씩 등장해서 공격하고 욥이 대답하고 다시 돌아서 두 번째로 공격하고 이제 세 번째가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 번째는 엘리바스하고 빌닷까지만 이야기하고 소발이 안 나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들어와서 그렇지는 않을 텐데 자세하게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22장과 23장, 엘리바스의 충고와 욥의 답변이에요. 우리가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앞에서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어떤 구도로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어요. 욥의 세 친구들 중에서 이 엘리바스가 나이도 제일 많아요. 세상 경험도 많고요. 그래서 그런지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요. 논리적으로 괜찮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요. 지혜로운 선생의 모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은혜롭게 설교하는 아주 큰 목사님이라고 할까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지혜로운 모범 교사의 대표자가 엘리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나와서 일장 연설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엘리바스의 하는 말대로 욥이 따라도 사실은 큰 문제는 아닌 거예요. 엘리바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몇 번 반복했지만 굉장히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해요. 우리가 오늘도 보겠습니다만 일리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리 있는 이야기를 잘해요. ‘마음을 돌이켜라. 어딘가 너에게 문제가 있는데 너 스스로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거다. 그게 우리 유대교의 전통이 아니냐. 우리가 여태까지 배워온 것 아니냐. 지금은 네가 인정하기 싫고 기억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으니까 돌이켜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도와서 잘 되게 할 거다.’ 이러한 이야기거든요. 이런 말은 우리가 흔히 들었던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이 욥이 못 이기는 척하고 엘리바스의 말을 따랐어도 괜찮긴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순종하는 거죠. 좋은 말씀 앞에서 자신에게는 조금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도 아름다운 거니까요. 그렇게 해도 될 텐데 욥은 끝까지 버텨요. 그게 23장의 욥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한 번 들어가 봅시다. 22장은 엘리바스의 충고고 23장은 욥의 대답입니다. 먼저 22장을 보겠어요. 우리가 두 장을 보기 때문에 같이 함께 읽기가 좀 그래요. 그래서 같이 읽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읽어 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그냥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눈으로 읽어도 대충 알아요. 이건 우리가 앞에서 했던 것들의 논리가 여기서 많이 반복돼서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22장은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1절이 한 문단이에요. 그러니까 욥은 앞에서 계속해서 ‘난 정말 답답하다. 너희들이 나보고 잘못한 게 있으니까 회개하라고 하는데 난 기억할 수 없으니 난 아니다.’라고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한 거예요. 그게 엘리바스가 보기에는 영 못마땅한 거죠. 그 당시에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가 옳다고 생각했을까요? 엘리바스예요. 안타까운 심정으로 엘리바스가 욥의 자기 정당성에 대한 주장을 공격합니다. 앞에서는 천천히 하다가 강도가 점점 강해져요. 첫 번째는 굉장히 부드럽게 이야기했어요. 두 번째는 조금 더 비판적으로 하다가 세 번째는 더 과격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판, 혹은 충고의 관점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습니다. 욥이 자꾸만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잖아요. 그것에 대해 엘리바스가 ‘사람이 의로운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자꾸 그걸 붙들고 있냐.’라는 겁니다. 2절 보세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결국 자기 기준으로 사람은 생각할 뿐이지 그게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거예요. 3절도 그렇습니다.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욥이 자꾸 자신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니까 엘리바스가 안타까워서 ‘그래, 네가 옳다고 해보자. 도대체 그게 하나님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냐.’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의 관점이고요.
두 번째는 ‘너 악하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욥은 굉장히 부자였죠. 그러니까 ‘부자라는 것은 그냥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의 삶의 태도가 악한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도 악하다.’ 논리가 그거예요. ‘부자는 악하다. 너도 부자였으니까 너도 악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5절에서 9절까지 그 당시 부자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요. 우리가 많이 들었던 내용입니다. 6절부터 보십시오.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율법에 보면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많이 나오는 이야기예요. 헐벗은 자의 의복을 전당잡아서 겉옷을 맡기고 돈 빌려서 한 끼니를 먹잖아요. 그럼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하는데 안돌려 주는 것,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그 당시에 그런 일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수전노처럼 악착같이 돈에 매달리지 않으면 부자가 되지 못하는데 네가 그렇게 한 거 아니냐.’는 겁니다. 7절,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다.’ 비슷한 논리입니다. 8절,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 사는구나.’ 9절,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율법과 예언자들이 엄중하게 경고했던 잘못들 인거예요. ‘네가 그렇게 당대에 소문이 날 정도로 부자로 살았다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행태들이 너에게 있었던 것 아니냐.’ 이렇게 공격하는 겁니다.
부자라고 해서 누구나 다 부도덕한 것은 아닌데 사회과학적으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부(富)라는 것은 늘 한정적이기 때문에요. 우리나라도 속담 비슷한 말이 있는데 부자가 되려면 인근 몇 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은 가난해야 되거든요. 땅이 많아지려면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이 땅을 팔게 되고 그걸 싸게 사들이면서 점점 더 재산이 많아지는 거죠. 지금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임금 격차가 심해지지 않습니까. 제가 살고 있는 원당에도 앞에 고속도로가 생겨요. 원천에서 상주 간 고속도로가 그 앞으로 날줄 알았다면 이사 가지 않았을 텐데, 다 완성되면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대림이 공사를 하는데 다 하청으로 들어간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공사에게 큰 마진이 떨어지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다고 하네요. 여기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약간 과장됐긴 했겠지만 그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의 사회과학적 안목으로 볼 때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이 부자였기 때문에, 사실은 엘리바스도 부자에 속할 걸요. 그래도 비판하는 것은 엘리바스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안다고 인정하는데 욥은 인정하지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문단은 12절에서 20절입니다. 여기서 악인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네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권위가 있을뿐더러 인문학적인 관점이나 심리학 같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도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어요. 여기서 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12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데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겠냐. 우린 몰래 한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그런 내용들을 이 두 번째 문단에서 엘리바스가 욥을 비판하면서 ‘악한 사람의 심리가 바로 너와 같다. 너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냐.’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18절 보면(거기가 약간 이해하기 힘들어서 한마디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다고 표현한 것은 이 엘리바스가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욥, 네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문단 21절에서 30절입니다. 이 부분은 정말 은혜로운 말씀이에요. 한절 한절이 다 그렇습니다. 21절 보세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지당한 말씀들입니다. 쭉 그렇게 나옵니다. 참고적으로 24절 보세요.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오빌은 금광이 있는 지역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거죠. ‘황금보기를 돌같이 알아라.’ 그런 뜻으로 쓴 겁니다. 29절이 백미(白眉)와 같은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지혜의 전통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 이 22장 앞부분도 옳은 말들이지만 그 말 자체가 옳기로는 이곳 21절에서 30절까지는 유독 돋보여요. 만약에 이게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정말 귀한 유대인들의 신앙이고 가르침입니다.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에 있을 만한 귀한 말씀이에요. 제가 다른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말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상황이 맞지 않으면 그것은 저주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자가 설교하기가 참 어려운 거죠.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있어요. 일반 사람들이 서로 장사할 때는 이해타산의 논리 가운데서 사는 건데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야하는 목사의 운명은 참 위험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엘리바스처럼 사는 거죠. 자기는 확신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 부지기수예요.
여기까지 엘리바스의 이야기가 끝났고요. 욥이 이 말을 듣고 23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합니다. 욥의 주장은 한결같아요. 사람이 이렇게 하기도 힘들어요. 보통은 흔들리는데 이 사람은 흔들리지도 않네요. 아마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흔들린 경우가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한결같이 주장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징벌을 받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이 '젊어서 혈기로 하나님 보시기에 못마땅한 일을 했을지는 모르나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어서 참척의 고통을 받고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그리고 모든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길 정도로 떨어질 만한, 그리고 친구들이 딱 짚어서 말하고 있는 '죄'와 자신은 관계없다.'고 도저히 말하기 힘든 어떤 마지막 단계의 줄을 붙들고, 마치 외줄을 타듯이, 백척간두라고 할까요?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는 어떠한 사건과 마주치면서 자신의 온몸을 거기에 던지고 있는 겁니다.
단적으로 10절에 이렇게 표현하네요.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 구절은 우리가 앞에서 공부할 때 한 번 짚었어요. ‘봐라, 욥이 이렇게 어려움을 받는 것은 단련 받는 거다. 그러니 단련이 잘 끝나면 하나님 앞에서 정금처럼 멋진 신앙인으로 바로 서게 된다.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욥의 주장이 아니라 엘리후의 주장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엘리후 이야기는 뒤에 길게 나옵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논리를 욥이 했을 까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욥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에 대해서 설왕설래했습니다. 결론은 이 개정개역 성경이 오역에 가깝다고 제가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공동번역을 그 때 설명을 드렸을 겁니다. 공동번역 여러분 강의 요약문을 보세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나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하고 뜻이 확실하게 다르죠? 루터번역을 제가 공부하면서 의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는 내 길이 선하다는 사실을 아신다. 그가 나를 시험하셔도 나는 금처럼 순결한 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재앙은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걸 통해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엘리후의 주장도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요. 이 10절은 ‘난 깨끗하다. 난 순결하다. 난 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욥은 그걸 붙들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왜 그럴까?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을 더 하셔야 됩니다.
욥이 자신은 죄와 관계없이 정금과 같다는 확신이 있지만 친구들을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해받기는 어려운 거예요. 양쪽 다 평행선을 걷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욥의 말에 수긍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의 고유한 영적인 시각에서 이렇게 자신에게 떨어진 재난과 재앙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방식이 아닌 그 사람의 고유한 시각이 살아있구나.’ 그렇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두 가지 시각이 평행선을 걷기 때문에 이 욥의 친구들이 여러 번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과 욥이 똑같이 반론을 하고 있는 것이 계속 되고 있어요. 그래서 시각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도 그렇고 세계관도 그렇고 서로 충돌하면 해결이 잘 안 되더라고요. 이게 교정이 잘 안 돼요. 어떠한 삶의 틀이 굳어져버리면 계속 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문제는 접어두고 성경만 보더라도 성경문자주의에 박히면 더 이상 다른 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하게 되죠. 그걸 조금 넘어서 문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리키고 있는 진리가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욥과 친구들 사이에 인간이 만난 재앙 앞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평행선을 걷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 이들이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있어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옳게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늘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하신다.’ 그건 일치하는 거예요. (오늘 공부의 순서를 바꿔서 결론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생각은 똑같아요. 그런데 결론이 다른 것은, 욥의 친구들이 볼 때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욥은 죄인인 것이고 욥이 볼 때도 역시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기 때문에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시각은 같아요. 그런데 해석이 달라요. 좀 복잡한 이야기인가요?
여러분 강의안 밑에서 두 번째 단을 보십시오.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에 확신이 있었지만 친구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이유가 평행선을 가기 때문이라는 말씀까지 드렸습니다. 그래서 욥으로써는 이제 더 이상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싫어요. 사람들과 말 해봤자 계속 평행선을 가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 주기를 바르는 거예요.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어요. 얼마나 답답한 심정이었을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 누구에게도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하나님에게 따져 묻고 싶은 거죠. 이러한 욥의 심정이 이해가돼요. 그리고 이게 정말 신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팔복에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고 지난 주 설교에서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 이야기, 그러니까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에게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행복한 것이고 하나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실 거라고 생각을 해요. 6절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아요. 8절, 9절이 중요하니까 볼까요. 친구들과는 말 해봤자 똑같으니까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은데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8, 9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의 마음이 이해가되죠? 하나님의 침묵이에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이게 어떤 뜻인지 아시겠죠?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 다는 거예요. 정말 자신은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 재앙과 재난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그 사람들에게 진리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이걸 하나님의 침묵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욥이 이렇게 말하듯이 안 계시는 걸까요? 그건 아니죠.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잘 아셔야 됩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욥이 당한 재난들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친구들은 이해를 못했는데, 그러니까 자기들이 알고 있었던 것만 전제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침묵처럼 보이는 그 상황을 뚫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어떤 선입관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거죠. 마음이 열려 있어야 되는 거죠. 마음이 청결하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터, 밭이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는 그게 잘 안 돼요. 우리 안에 많은 선입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선입관이라는 것은 교육을 통해 주어지는데 좋은 교육들은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이해하도록 마음을 열게 하는데 잘못된 교육은(다른 일반 교육도 그렇습니다만) 거기에 묶이게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하시겠죠? 조금 쉽게, 쉽다기보다도 우리가 와 닿는 이야기를 하면 자식교육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틀이 있어서 그 안에 자식들이 들어오면 잘했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틀 안에 자녀들을 끼워 맞추려고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걸 나쁘다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옳은 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다 잘 하셨으니까 그걸 전제하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 자녀들이 하나의 인격체로써 자신의 삶을 개방적인 태도로, 개방적이라는 것은 아무거나 막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 편협하게 빠지는 게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교육도 그런 거고요.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철저하게 잘하는 것, 그것도 필요하긴 합니다만 거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하나님 말씀과 세계를 향해서 눈을 뜨는, 그러한 교육이 신앙에서도 중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러분들 요약문 마지막 단락 한 번 보십시오. 여기서 욥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23장은 좀 짧아요. 앞에서도 많이 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떳떳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떳떳하지만 두려운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넘어서기가 힘듭니다. 16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시나니’ 15절부터 같이 연결되는 거예요.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핏대를 올리면서 내가 옳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운 거죠. 그 분이 두려운 거예요. 두려운 이유가 몇 가지 있겠습니다만 간단히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이러한 재앙이 또 다시 더 큰 재앙으로 올 수 있다는 개연성,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 정말 두려운 거고요. 조금 더 본질적으로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옳으시고 자신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이유를 모르는 것,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요. 두렵고 답답한 거죠.
그래서 결국 마지막 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혹은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흐름이 약간 이상하긴 한데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너무 두려워서 차라리 어둠에 들어가거나 내 얼굴이 완전히 흑암으로 덮이는 것이 낫겠다.’ 그 뜻입니다. 이 말은 이미 욥이 앞에서 몇 번 이야기한 스올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말과 통하는 말입니다. 14장 13절, 17장 13절, 그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어요. ‘나를 스올에 데리고 가셨으면 오죽이나 좋겠나.’ 이러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네요. 그러니까 친구들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변론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런 상황을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앞에 방식과 비슷한 식으로 이러한 토로를 합니다. ‘어둠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리는 게 낫겠다.’ 이러한 토로입니다.
오늘 공부는 다 마쳤어요. 이게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로 느껴지죠? 이러한 재앙을 우리는 받지 않았으니까 거리가 멀잖아요.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제가 몇 주 전에 이야기했는데 혹시 기억나세요? 왜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가. 우리는 곧 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다 욥의 운명에 떨어집니다. 가족도 잃고 모든 걸 잃고, 죽는다는 것은 욥과 같이 스올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의 운명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러한 토로, 절규를 죽는 순간에는 누구나 다 할 겁니다.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절규, 결정적인 순간을 당겨서 현실에서 살아내는 겁니다. 그게 우리 영혼에 깊숙이 들어와서 내적인 생명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일상에로의 퇴락’에 빠지지 않게 되는 거죠. 일상이 소중해서 열심히 살되 거기에 내 삶이 소비, 소진되는 게 아니라 본래적인 자기의 삶을 실존적으로 삶아내게 됩니다. 저는 이 욥기가 그런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궁극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인 죽음과 같은 운명을 욥의 입을 빌려서 우리들에게 리얼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인거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 욥기 42장 가운데서 반을 벌써 넘겨서 22장, 23장에 나와 있는 엘리바스의 세 번째 충고와 욥의 답변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2300년, 혹은 2500년 전 유대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이 욥의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렇게 훌쩍 시간이 뛰어넘은 이때에 작은 수요일 모임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임을 저희들이 직시하고 받아들입니다. 욥처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성이 어느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모든 말씀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곡해의 소지가 많은 10:10절 말씀을 여기서 다뤘군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재앙을 하나님의 시험으로 보고 견디면 잘 된다는 뜻같지만,
그게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아무리 털어봐도 잘못한 게 없고
오히려 순금처럼 깨끗하다는 게 증명될 것이라는 뜻이잖아요.
성경번역자가 신경을 덜 쓴 구절이네요.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