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02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24:1-15

25:1-6

26:1-14

27:1-23

  1-17,21/18-20,22-25  

       1-6       

       1-4/5-14       

       1-7/8-23       

욥/소발

빌닷

욥/빌닷

욥/소발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욥기는 27장과 28장입니다. 그런데 27장은 다 보는 건 아니에요. 앞부분은 지난번에 했고 오늘은 27장 중, 후반부터 28장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개역개정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개역을 개정했다는 겁니다. 옛날에 쓰던 걸 개역이라고 해요.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게 있는데 그걸 구역이라고 합니다. 아주 초창기에 썼던 거예요. 그 구역을, 아주 구닥다리 번역에서 조금 새롭게 번역한 것을 개역이라고 해서 굉장히 오랫동안 썼어요. 그런데 그것도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대한성서공회에서 새롭게 번역 해서(그 전에 공동번역도 있습니다만 그건 제쳐놓고요.) 시안적으로 발표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많이 반대를 했습니다. 정말 학자들이 고생해서 번역 했는데 반대한 이유는, 옛날의 개역에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공동번역까지는 아니지만 개역과 공동번역 중간쯤 되는 성격의 성경이 된 거예요. 한국교회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개역과 거의 비슷하게 바꿔서 나온 게 개역개정,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할 거였으면 바꿀 필요가 없었어요. 낱말도 거의 그대로고 약간의 차이만 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는 번역을 하려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거든요. 학자들과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해야 됩니다. 번역이 다 끝나도 강독을 해서 발음하는데 부족한 것은 없는지 국문학자를 비롯해서 많은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내놓은 성경을 보수적인 입장의 한국교회에서, (다 안 받아들인 게 아니라)성경을 문자적으로 생각하는 교단, 주로 합동이나 고신 같은 굉장히 큰 교단에서(합동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큽니다.) 안 받아들이니까 그 동안 투자했던 자금도 그렇고요. 또 이런 게 있어요. 성경번역(찬송가도 마찬가지인데)을 순수한 마음으로 하긴 하되 그렇지 않은 마음도 들어가 있습니다. 뭔지 아시겠죠? 돈벌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다른 것으로 번역해서 나오게 되면 거기에 딸린 수입이 천문학적입니다. 일단 사람마다 성경을 바꿔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신자들이 한 권씩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권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원본이 하나 있다면 거기에 딸린 주석을 만들기도 하고 그 외에 가죽 제본이라이든지 결혼식 선물을 위해서 예쁘장하게 만든 성경이라든지, 그런 경제적인 문제와 연관이 돼서 결국은 개역개정을 낸 거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렇게 할 거였으면 바꿀 필요가 없었는데 돈하고 연관되어 있어서 그렇게 했고요. 또 이렇게 개역개정이 나온 다음에도 서로 합의해서 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교단별로 ‘우리는 신자가 몇 명이니까 여기에 딸린 배당금 같은 것을 우리 총회에 더 줘야 된다.’는 등등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교단은 무슨무슨 공회라고 개역개정 말고 자기들끼리 따로 번역을 해서 성경을 만들려고 상당한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어색한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사도바울의 편지들이 있잖아요. 고린도 전, 후서나 데살로니가 전 ,후서 등등의 편지들인데 보통 개인이 공동체에 편지를 쓸 때 하대를 하나요? 당연히 높임말을 쓰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여길 떠나서 멀리 가 있는데 이 교회가 궁금하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려고 편지를 쓰려면 당연히 높임말을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길 보면 바울의 말이 다 하대로 나와 있습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어법에 맞지 않는 거죠. 그리고 조금 더 복음서까지 본다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을 하대했겠습니까. 30대 초반의 젊은 유대인인데 당연히 안 그랬겠죠. 그런데 전부 하대를 하는 걸로 나왔으니까요. ‘예수님이니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잘못된 거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에 보면 27장 소제목에 ‘세 친구에 대한 욥의 말’이라고 달려있어요. 이 27장 전체가 욥의 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완전히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용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27장 8절부터는 욥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욥을 비판하는 친구들의 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분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양쪽 다 하나님, 진리, 지혜에 대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내용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분명히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아주 일관되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서 욥을 윽박지르고 있는 거예요. 논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는 징벌하고 선한 자는 복을 주신다.’는 논리를 계속해서 붙들고 있어요. 그런 논리에 따르면 지금 완전히 망해버린 욥은 당연히 악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를 27장 8절 이하에 쭉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욥의 말이라기보다 욥의 친구들의 말에 가까운 거예요. 논리적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이러한 친구들의 말에 반해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 두 입장이 충돌을 하는 거예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맞붙었을 때 설득하기가 쉽지 않아요. 겉으로 확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조금 열려있는 사람과 닫혀있는 사람이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조금 옆으로 가는 말이라도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을 마녀 사냥하듯이 미워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성적인 마이너리티들이 자신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10%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향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를 해줘야 된다.’ 저는 그런 입장인데요. 그런데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논리에서 그런지 아시죠? ‘창조원리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게 맞는 거지 동성끼리는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것뿐만 아니라 성서에서 죄로 말하는 것(신, 구약에 분명하게 나와요.) 아니냐.’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제가 억지로 다르게 생각하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시키는 게 왜 잘못되는 건지 아시죠? 제가 그걸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서 문자주의에 떨어진 사람들은 그 문자를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걸 절대화해서 모든 사람을 그 안에 쑤셔 넣게 되면 성경의 그 세계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문자에 떨어져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더 깊은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에 머물러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입장과 친구들의 입장은 평행선처럼 달라서 서로 설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욥이 정말 답답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조금 답답한 면이 있겠지만 견딜만 할 거예요. 왜냐면 자신들은 다수니까요. 욥은 완전히 나쁜 놈이 되어있으니까요. 욥을 조금이라도 옆에서 이해해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욥의 아내도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이럴 정도니까 욥의 입장이 얼마나 처절한지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욥이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은 거예요. 욥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대로 지금 당한 재앙이 죄 된 행위 때문이라는 그것을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거죠. 그 어떤 경계가 있는데 그걸 구분해서 봐야 됩니다. 혹시 욥이 자꾸 죄가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뻔뻔스럽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욥은 그런 차원에서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최선이고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고요. 그리고 자신이 당한 재앙에 버금갈만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절박감, 진정성이 너무 분명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했지만 이 욥이 이럴 바에야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 입장에서도 욥은 신앙적인 확고한 결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충 욥의 입장이 어떤지 아시겠죠? 자칫하면 오해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앞에 이야기한 대로 ‘완벽하게 옳다는 거냐. 교만하다.’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나 ‘친구들에게 그렇게 악한 자로 재단당할 만한 일을 자신은 행하지 않았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욥이 무죄한 자의 고통을 대표하고 있는 거죠.


지금 두 입장의 갈등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27장 8절부터 23절까지는 욥의 이야기가 아니라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욥의 친구들 중에서 누구에 해당할까요? 세 번째 소발이에요. 이건 추정하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몰라요. 욥의 친구들이 세 명이라고 그랬죠.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이 세 사람이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면서 세 번씩 등장해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소발은 세 번째에 나오지 않아요. 소발은 두 번만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게 전체 구조를 볼 때 약간 흔들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소발의 이야기가 바로 27장 8절부터 23절까지로 떨어져 나갔고 그 앞에 있는 24장 18절부터 25절이 뒤에 붙는 게 맞는 거라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두 단락으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소발의 이야기라고 학자들이 우리들에게 잘 설명해준 27장 8절에서 23절까지가 저는 옳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따라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소발의 이야기와 그 다음에 28장에 나오는 1절부터 28절이죠. 이 이야기를 두 단락으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28장은 쪼개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덩어리예요. 몇 주 전부터 제가 24장부터 27장까지 뒤섞여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28장은 제자리로 간 겁니다. 사실은 28장도 욥기 전체 흐름에서 약간 이질적인 부분이 있어요. 그건 이따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 번째 단락, 27장 8절에서 23절, 그리고 24장 18절에서 20절, 22절부터 25절을 보겠습니다. 욥기 27장 8절부터 이후 부분을 보면 악한 사람들의 운명이 나오고 있어요. 특별히 13절 이후를 주로 이야기했습니다. ‘악인은 이렇게 된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욥의 친구들의 논리거든요. 유대인의 지혜의 전승입니다. 저는 13절부터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7:8-23>

8.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11.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13.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14.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15.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16.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17.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18.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19.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20.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21.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22.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23.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


23절에 친구들이 욥을 보고 비웃는 모습이 상상이 되죠?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점잖게 하지만 ‘봐라, 욥 네가 지금 비웃음을 사고 있지 않냐.’ 그런 투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대목은 욥의 친구들의 지혜 전통에 근거한 말로써 악한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는 것을 거듭거듭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말하려는 핵심이 뭐죠? ‘욥, 네가 죄인이야. 네가 악한 일을 했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그거죠. 19절도 보십시오. 악한 사람은 다 망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비록 19절에 ‘부자로 누우려니와’라고 되어있는데 악한 사람들 중에서도 부자들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누우려니와’ 이것은 제가 보기에는 죽는 다는 뜻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잠을 자는 걸까요? 정확한 뜻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부자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게 계속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국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허망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 거죠. 20절에서, ‘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계속해서 악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재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욥, 네가 당한 재난이 바로 이와 같아.’ 그렇게 말하는 거죠. 23절,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비아냥거리듯이 친구들이 욥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만 봐도 우리가 다 알겠죠. 이건 앞에서 욥의 친구들이 했던 이야기들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24:18-20, 22-25>

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우리가 지금 이 말씀들을 소발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어요. 이제 27장 23절에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24장을 보십시오. 18절에서 25절, 그 중에서 21절은 빼네요. 이건 학자들이 굉장히 세밀하게 분석한 건데요. 중간의 한 절을 빼면서까지 이건 소발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따라가기는 힘들긴 합니다. 어쨌든 이 부분, 24장 18절에서 20절, 22절에서 25절을 27장 마지막에서 이어지는 소발의 말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24장 18절 보면,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된다는 게 분명히 나타나죠?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보면 이 부분은 누구의 말이에요? 욥이에요. 23장 소제목에 ‘욥의 대답’이라고 되어있죠? 23장 1절에 보면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라고 하면서 24장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23장부터 24장까지 전체가 다 욥의 대답인 것처럼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24장 18절부터는 욥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구들의 지혜 전통이에요. ‘악한 사람은 이렇게 벌을 받는다.’ 욥은 그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욥이 그렇게 말했다면 자기 자신이 악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죠. 완전히 망했으니까요. 이건 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좀 이상하죠. 왜 욥의 이야기가 아닌데 욥의 이야기인 것처럼 되었을까요? 옛날에 욥기가 처음 형성될 때 약간의 착각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누가 쓴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 어느 날 문서가 되고 조금씩 변형되면서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래서 순서가 바르게 되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누가 일부러 꾸민다거나 의도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쓴 게 아니라 (구약만 본다면)유대인들의 살아있는 역사 안에서 면면이 살아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형성됐다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러한 흠이라고 하면 흠이 있는 게 오히려 성경이 역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여기서 한마디 더 드린다면, 성경을 이해할 때는(제가 설교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거는 역사적이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이해되고 구전되다가 문자화되는 그러한 역사의 어떤 역동적인 힘 안에서 성경이 기록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성경을 이해하려면 그러한 역동적인 변화들을 알아야 되죠. 이걸 모르면 이건 완전히 도깨비방망이처럼 되는 거예요. 제가 누누이 이야기 드린 대로 ‘성경은 문자에 메여 있으면 안 된다. 그 문자로 형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대 유인들의 고뇌, 한계, 절망, 희망, 이런 것들이 거기에 녹아 있는지를 봐야 된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신약은 신약 나름대로 삶의 흐름들, 대결, 투쟁들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공부할 때 같이 하신 분이 계신가요? 갈라디아서도 보면 바울이 ‘너희를 그렇게 유혹한 사람이 누구냐. 다른 복음을 전한 사람이 누구냐. 그런 사람들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렇게까지 공격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에 이단 논쟁의 대결이 굉장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고요.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성경이 기록될 때 있었던 역사적인 것들을 잘 따라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조금 역부족이에요. 제가 성직자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닌데 목사이기 때문에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가답게 연구하고 가르쳐야 될 책임이 있는 거죠. 24장 그 부분이 27장 뒤로 간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27장 후반부와 24장 후반부가 같이 묶여져서 소발의 이야기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내용이 유대의 지혜의 전통이라는 사실에 있는 겁니다. 지금 지적한 구절들이 욥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혜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욥의 친구들, 대표적으로 소발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런 지혜의 전통에 떨어지지 않고 그 너머의 신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이 오늘 기독교에도 해당됩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은 어떻게 보면 신앙이 문자주의예요. 자신들이 지혜로 받았던 신앙에 딱 묶여있는 거예요. 여기서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면 저놈은 이단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욥은 이단이에요. 이런 것들이 오늘 기독교에도 해당이 되는데요. 교회의 많은 가르침들에 탄탄한 토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되 거기에 묶이지 말아야 되는 거죠. 조금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세계 완성의 빛에 우리가 조명 받아야 되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었던 기독교의 어떤 가르침이 문자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그 세계로부터 늘 새롭게 해석되고 조명 받는(조명 받는다는 것은 밝혀진다는 건데) 그러한 노력들이 오늘날에도 있어야 됩니다.


지난주일 설교 제목이 뭔지 아시죠? ‘예수께서 오실 때에’라는 제목이었고 주제는 예수 재림이었어요.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까지도 예수님께서 실제로 구름타고 오실 거라고 생각할 걸요?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인지 시점을 생각하고요. 또 우리가 흰옷을 입고 올라갈 거라고 많이 생각을 할 겁니다. 설교 후에 몇몇 분들에게 전화를 좀 받았어요.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생각할 거리가 많더라.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재림 신앙이 극복되는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지난번에 있었던 재림 설교를 다시 여기서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니고요. 재림 신앙이 더 빛을 받아야 돼요. 거기서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생명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꾸준하게 더 살펴야 됩니다. 제가 설교할 때 약간 위험한 이야기까지 했는데 여러분들이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어요. ‘예수 재림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만이 아니라 이미 여기 일어난 거다. 재림이 이루어졌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내가 재림주다.’하면 완전히 이단이 되는 거고요. 그 말이 아니라 ‘이미 재림이 일어났다.’인데 그러나 이 말에도 시비를 걸려면 얼마든지 시비가 가능한 겁니다. 제가 그런 말까지 할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옳으니까 그냥 이야기를 한 거예요.


기다려야 될 예수님의 결정적인 세계 완성인 그 재림이 이미 여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이 말을, 제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여기 왔다고 하는 말씀과 연관해서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 재림의 문제만 하더라도 고정된 틀로 남아있는 게 아니라 개인과 인류와 세계의 생명의 완성에 관계된 기독교의 고유한 시각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가 오늘 조금 중요한 이야기를 드리고 있는 건데요. 이 공부 자체보다도 여러분들의 어떤 시각을 바꿔야 된다는 점에서 그런 거예요. 더 설명하려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느낌은 아실 거예요.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 시간, 장소에 관계된, 제가 예수님 재림이 공간이동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생명이 결정적으로 완성되는 그 사건이 바로 예수 재림이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이 완성되는 그 사건을 재림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럼 여기까지하고요. 오늘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어서 말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욥기 28장>

1.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2.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3.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4.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 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9.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10. 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11. 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12.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3.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14.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15.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16.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17.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18.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19.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21.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22.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23.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25.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7.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두 번째 단락, 여기는 간단하게 해도 되겠어요. 28장 1절에서 28절입니다. 이거는 누구의 이야기 같습니까? 욥기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순서가 나오잖아요. 나중에 엘리후도 나오고 하나님도 나오는데, 이런 식으로 각 장마다 이야기하는 화자가 있어요. 그런데 28장에는 ‘누가 이르기를’ 이런 말이 없네요. 그러면 앞장에 나온 걸 보고 알아야 되는데 27장 1절에 보면,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라고 되어 있어서 28장이 욥의 이야기처럼 보여요.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본대로 27장 8절부터는 욥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발의 말이라는 것을 전제 한다면 28장도(형식적으로 나온 것만 본다면 욥의 이야기라야 하지만) 실제로는 욥의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거죠. 그리고 여기 제목 보세요. ‘지혜와 명철’인데 이것은 누가 좋아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인 거예요. 물론 욥도 지혜와 명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앙의 심층들, 삶의 깊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혜의 전통에 있는 욥의 친구들은 그 깊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우리가 배운 대로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징벌 받은 거니까 회개해. 그럼 하나님이 다시 복 줄 거야.’ 그런 논리거든요. 여기 지혜와 명철은 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친구들의 말과도 정확하게 연관되지 않는다고 학자들이 말을 하네요. 거기까지는 우리가 가지 맙시다. 다만, 28장은 지혜의 전통을 조금 더 강조한 텍스트, 문건으로써 욥의 말은 아니고 욥의 친구들을 지지하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발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강의안 보시면 1절에서 12절, 13절에서 20절, 21절에서 28절, 이렇게 세 단락으로 나눠져요. 1절에서 12절은 하나님의 지혜를 고대 광산업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겁니다. 1절부터 보면,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고 (2절)철을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내고’ 이렇게 쭉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철강업, 광산업이 최첨단 과학이었어요. 굉장히 신비로운 거죠. 돌을 불에 넣었더니 은도 나오고 여러 가지가 나오니까요. 정말 그거는 요술과 같은 과학이었습니다. 지금은 컴퓨터 같은 것들이 첨단과학인 것처럼 그 당시에는 이 광산업이 첨단과학이었어요. 앞으로 5천년 후에 미래 인류는 어떤 것이 첨단과학일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겁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그 당시 첨단과학인 광산업으로도 하나님의 지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12절 보면 이렇게 나와요. 이건 후렴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지혜와 명철은 놀라운 광산업의 제련, 연금술과 같은 기술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건 욥의 친구들의 말과도 조금 성격이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인이냐, 아니냐.'를 주로 따지는데 이 28장은 지혜의 원천을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문명을 통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 13절부터 20절까지는 상거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12절까지의 지혜는 첨단의 과학, 13절부터 20절까지는 그 당시 최고 돈벌이, 상거래, 이건 머리가 좋은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고 더 원천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20절 보십시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앞의 12절과 똑같은 표현이죠. 하나의 후렴처럼 나온 겁니다.


마지막 21절부터 28절, 여기서는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 때 나타났던 것으로써 피조물인 이 세계의 인간을 비롯해서 그 어떤 생명체도 따라갈 수 없는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쭉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심지어 22절에 보면,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이거는 문학적으로 의인법이라고 할까요? 멸망과 사망은 죽음과 지하의 세계예요.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여기서 ‘그 소문’은 뭐예요? 하나님의 지혜죠. ‘하나님의 지혜를 소문으로만 들었지 자신들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만큼 하나님의 지혜는 더 원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멋진 표현이 여기 나와요. ‘그 지혜가 뭐냐.’라고 할 때 23절부터 그 지혜는 하나님만 아시는 건데요. 지하 세계에 있는 그들도 모르는 것으로써 2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멋진 표현이에요. 저도 이거를 집에 가서 출력해서 책상 앞에 붙여놓을까 생각합니다.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절)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5절과 26절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그 당시 고대인의 눈으로 읽으셔야 돼요. 이 바람의 무게, 지금이야 바람이 물리학적으로 어떤 현상인지 알 수 있잖아요. 공기의 대류, 흐르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가만히 있는데 따뜻하게 하고 보이지도 않은 것들이 나무를 흔들게 해요.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지고요. 그걸 루아흐라고 해서 바람과 영을 고대인들은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비의 극치가 그들에게는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의 무게를 단다.’ 정말 멋진 표현이잖아요. 그걸 누가하겠어요? ‘그걸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고 그게 바로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물도 마찬가지예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고대인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야 돼요. 이 물, 바다, 그 당시에는 지구가 이렇게 둥근지 몰랐어요. 바다 나가면 떨어진다거나 여러 가지 신화들로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어떤 데서는 지구를 거북이 등에 있는 걸로 생각하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 고대인의 눈에는 너무 신비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바다에 나가면 파도가 치고 해일이 일어나서 함부로 나갈 수도 없죠. 얼마나 엄청났겠습니까.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는 원천적이며 창조적인 것이고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깊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절, 26절은 고대인들의 표현인데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어제 저녁에도 제가 테니스장을 갔다가 집에 여덟시 반쯤 돌아왔는데 별빛이 막 쏟아져 내릴 듯이 빛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장엄하게 별빛이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 말이 안 나오죠. 어마어마한 거리, 이미 우리 눈에 들어 왔을 때는 없어졌을 별들, 그리고 성경을 기록했던 그 사람들도 보았던 별들이죠. 오늘 공부 주제는 사실은 욥의 신앙의 깊이인데 이 28장은 이질적인 문서가 욥기 안에 들어왔어요. 그렇지만 참 소중한 가르침이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렇게 12월 둘 째날, 겨울 초입에 수요일 저녁 함께 모여 공부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12월이 곧 다가온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사는 저희들입니다. 그 모든 나고 죽음, 시간의 흐름, 오늘 28장에서 이야기하듯이 바람의 무게를 정하고 물의 분량을 정하는 하나님의 우리를 뛰어넘는 생각과 계획들,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이 겸손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로 우리가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저희들 이 욥기를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이 짧은 공부를 통해서 갑자기 신앙의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되 벽돌 한 장을 천천히 쌓아 가면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듯이 이러한 공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집이 천천히, 그러나 탄탄하게 세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구석구석 주님의 뜻대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