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04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20장>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12.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23.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4.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욥기 21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4.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 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17.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18.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19.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0.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21. 그의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23.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4.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25.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26.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27.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28. 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29.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30.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31.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32.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33.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

34.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욥기는 20장, 21장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두 장을 함께 하겠어요. 여태까지는 우리가 한 장씩 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들이 질문과 대답이 반복돼도 이왕 우리가 공부하는데 빈틈없이 해보자는 생각으로 봤습니다. 오늘 20장과 21장을 같이 보려고 하는데 소발과 욥의 질문과 대답이 여기 있어요. 20장은 두 번째 소발의 질문이고요. 21장은 소발에 대한 욥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이게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돼서 같이 묶어서 해도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20장에서 계속해서 소발이 욥을 비난, 충고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앞에서 나온 이야기와 비슷한 흐름으로 간다는 것을 내다보면서 21장과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이미 앞부분에서 몇 번 짚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우리가 공부하는 방향을 조금 더 잘 알기 위해서 욥기가 어떤 책인지 역사적 배경을 조금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욥기는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에 유대 세계에서 생성된 기록물이에요. 이 바벨론 포로 사건이 구약을 읽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전에도 물론 여러 번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 때 결정적으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바벨론으로부터 함락 당했어요. 이스라엘이라고도 하고 유대라고도 하는 그 나라는 작은 나라예요. 그런데 그 근처에는 큰 나라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많이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더 그래요. 우리는 북쪽으로만 큰 나라가 있었죠. 일본은 옛날에는 별로 우리보다 문명이나 여러 면에서 떨어진 나라고 우리가 오히려 그쪽으로 영향을 끼친 나라라서 임진왜란 때나 힘들었지(전반적으로 귀찮긴 했지만) 중국만큼 무게 있는 나라는 아니라서 괜찮았어요.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가 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아요. 제국들에 둘러 쌓여있었는데 남쪽으로는 이집트, 얼마나 오래되고 강력한 제국입니까. 지금 우리는 이집트 하면 별로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였어요. 구약성경이 이집트와 여러 면에서 관계가 있는 것 아시죠? 출애굽도 거기서 했으니까요. 아브라함의 후손들 몽땅 다 그쪽으로 가서(흉년으로 갔다는 설들이 있어요.) 몇 백 년 살다가 나오게 되고요. 이집트와는 계속해서 연관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종교적인 토대를 놓은 최고 인물이 이집트의 왕자로 있었거든요. 바로 모세입니다. 이 모세가 이집트의 문화, 문명,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북쪽으로는 아시리아라는 큰 고대 제국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는 아시리아에 이어서 바벨론 등등, 이렇게 한 제국 이 부흥하다가 조금 약해질 때 신흥 제국이 나오고 얽히고 설켜서 열강들이 힘을 겨루는 게 국제정세 아니겠습니까. 구약시대도 그렇고요. 계속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 틈바구니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난이 많았습니다. 때때로 이스라엘이 나라가 조금 강력해 지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렇지 않으면 큰 나라 섬기고 조공 바치고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힘을 내서 큰 제국과 싸우다 보면 늘 망했어요. 작은 나라는 큰 나라 눈치를 보고 사는 게 어쩔 수 없는 형편인데 막 힘주고 싸우다가 많이 망했습니다. 그 상황이 바벨론과 일어났고 그 때가 기원전 587년입니다.


이 때 유대의 선지자들, 하나님을 깊이 따르던 사람들이 크게 실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깊은 회의감에 빠졌어요. 이 욥기도 그런 틈바구니에서 나온 거죠.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지혜 전통으로 유대인들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혜 전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앙이에요.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신앙대로 사는 것, 그런 사람들은 바르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고 악한 사람은 심판하니까 열심히 하나님 믿고 잘 살면 잘된다는 것이 지혜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바벨론에 완전히 망해버리니까 ‘이거 좀 이상하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신앙적인 지혜로는 이 역사와 인간의 문제들이 다 해결되지 않는구나.’ 그러한 각성을 했습니다. 그러한 바탕에서 욥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러한 요청으로 욥기가 기록됐습니다. 이 욥의 이야기, 보통 서사라고 하는 거요. 이건 간단한 거잖아요. 잘 믿다가 완전히 망했는데 믿음을 잘 지켜서 나중에 갑절로 축복 받았다는 이런 이야기는 여기 성경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헌에도 비슷하게 있어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기본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 신앙을 깊이 있게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입구로 그러한 서사를 사용했고요. 그래서 서사는 굉장히 짧아요. 1장, 2장, 마지막 42장 이렇게 세 장에만 있어요. 전체가 42장인데 세 장만 욥이 어떻게 됐다는 이야기고 나머지는 다 신학 논쟁인거예요. ‘지혜 전통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 삶의 심연들이 있다. 지혜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밀어 붙이면 그건 바른 신앙이 아니지 않나.’ 그런 관점이 욥기에 면면이 들어있습니다.


20장은 소발이 욥을 비판하는 두 번째 연설이에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명의 친구와 나중에 엘리후가 나오는데 지금은 소발이 두 번째로 나서서 비판하는 겁니다. 이 친구들이 세 번씩 등장해서 비판합니다. 소발이 20장에서 전반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앞에서 본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를 벌하고 의로운 자는 지켜서 복을 내려주신다는 거예요. 그걸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쭉 하는 이야기가 악인들에게 임하게 될 벌, 악인들이 당하게 될 저주들을 열거함으로써 욥도 그런 재앙을 당했으니 결론적으로 욥도 역시 악인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거예요. ‘네가 그런 벌을 받은 걸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아니냐. 네가 그런 운명에 처했다면 분명히 너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소발이 여기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1절부터 쭉 보면 이 말씀이 굉장히 은혜롭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5절을 보세요.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이건 욥이 아니라 소발의 말이에요. 굉장히 은혜로운 이야기죠. 유대인의 지혜 전통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들들은(악인의 후손들)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러니까 후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잠깐은 괜찮은 것 같지만 결국은 안 돼갖고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구하고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자신들에게 남아나는 재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악인이 받아야 될 징벌이 후손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죠. 이것이 지혜 전통이고 구약성경 다른 곳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 자체가 틀린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욥을 비판하는 지혜의전통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선생들이에요. 그들은 경험도 많아서 하는 말들이 굉장히 깔끔하고 유대인들의 가르치는 것에서 어긋나지 않아요. 이것 자체로는 옳아요. 우리가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쭉 나온 이야기들이 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 말 자체로는 옳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삶이 다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 이걸 욥기가 붙들고 있는 거예요. 지혜의 전통으로 말할 수 있는 것까지만 말하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걸 갖고서 욥마저도 몰아붙이고 그걸 절대적인 것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태도가 문제인거죠.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는 걸 배운 게 있어서 ‘기도해야지, 봉사해야지, 덕스럽게 살아야지.’ 이런 건 다 좋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후손들에게도 그런 복을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사는 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절대화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네가 안 된 것을 보니까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교만하게 되는 거고 하나님 뜻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거라서 거기에 한계가 있는 거죠. 이게 참 미묘하죠.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목사는 늘 설교하고 살아야하는데 지혜의 전통을 설교해야 되는 건데요. 이걸 냉소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고 경건하게 사는 것, 신앙적으로 사는 것, 그리고 교회 봉사를 비롯하여 사람들에게 덕스럽게 사는 삶들을 무의미하다고 말하면 절대 되지 않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거나 단죄한다거나 이런 데까지 나가지 말아야 되는, 어떤 그 경계가 칼로 잘라내듯이 있는 것은 아닌데 분명히 잘 생각하면서 설교도 하고 목회도 해야 되는 거겠죠. 참 조심스럽습니다.


20절 봅시다. 지금 소발이 지혜의 전통을 말하는데 굉장히 은혜로워요.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그 이하로 쭉 그런 이야기입니다. 22절에도 보세요.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악인이 어떻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정확하게 짚고 있어요. 이게 틀린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26절에서 29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 거의 욥을 대상으로 해서 표현하는 문장 같아요. 27절,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절,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모든 게 없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쭉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욥, 네가 바로 그런 신세에 떨어진 것 아니냐. 그러므로 너는 악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혜의 전통이 나쁜 건 아니에요. 이건 당연히 그대로 살아야 하고 필요한 거지만 거기까지만 말을 했으면 좋은데 ‘네가 바로 악인이다.’라고 욥을 향해서 말을 하니까 욥은 자신의 재앙을 받을 만한 죄를 생각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참 난감한 거예요. 이 욥이 정말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리고 그들이 여태까지 배워왔던 신앙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 어떤 경계선에, 아니면 끝자락에 지금 욥이 서있는 거예요. 김현승 시인의 시 표현처럼 고독의 끝, 혼자만 버텨내야만 할 어떤 끝자락에 서서 간당간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거예요. 20장은 그렇게 넘어가고요. 우리가 앞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소발의 말을 통해서 한 번 더 짚었습니다.


이제 21장입니다. 욥이 소발의 비난에 대해서 답변하는 거예요. 지금 핵심은 악인과 큰 재앙, 재난이에요. ‘악인에게는 재앙이 임한다. 그러니까 재난을 당한 욥, 너는 악인이다.’ 욥의 친구들은 이런 논리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욥도 악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해석이 달라요. 악인에게 일어나는 일들, 악인이 사는 모습들을 같이 보고 있는데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욥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7절에서 13절까지 보면 욥의 해석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어요. 욥이 볼 때 ‘악인이 다 벌 받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산다. 장수하고 세력도 강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매가 오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고요. 12절에 보면 ‘소고와 수금으로 축제를 벌인다. 재밌게 산다.’ 여기서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고 즐거워 한다는 표현은 바알 축제, 가나안의 토착 신앙인 바알을 따르는 사람들의 축제나 바벨론 축제를 가리켜요. 유대인들이 볼 때 가나안의 바알과 바벨론의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은 우상이고 악이거든요. 그런데 겉으로 보더라도 굉장히 멋지게 사는 것이 분명하니까 하나님이 당장 매를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짚고 있어요.


우리가 보통 바알 숭배을 이야기하면 해괴하고 이상한 것을 믿는 사람들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우상이라는 게 굉장히 세련된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표현되는 것들이 매력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요. 제가 설교할 때도 한, 두 번 말했지만 지금의 자본주의가 바알 종교와 비슷합니다. 매력적인 거예요. 그게 있으면 정말 인생이 풀릴 것 같은 것들이 이 바알 숭배에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문헌들을 보면(바벨론도 그렇고) 표현들이 굉장히 심오하고 시적이에요. 시편 못지않게 고상한 언어로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거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예언자들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쪽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 기독교에서 ‘불교 가지마.’ 이런 이야기는 사실 할 필요도 없어요. 이건 완전히 다르니까 위험이 없는데 여기 예언자들이 유대인들에게 바알, 아세라 섬기지 말라고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거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아주 많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이렇게 악인들이 아주 멋들어진 인생을 살았던 거예요.


이러한 욥의 반론에 대해서(악인들도 잘 먹고 잘 산다는 반론) 욥의 친구들, 지혜의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악인들이 잘 사는 것 같아도 후손들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식으로 대답할 수 있어요. 욥은 그것을 반대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19절에서 21절에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인의 후손이 망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악인을 친다는 말은 좀 공허하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19절에서 21절인데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확 와 닿지 않아요. 공동번역으로 강의 요약문에 적었습니다. 보십시오. 같은 19절에서 21절이에요. <19절, ‘하느님께서는 아비에게 줄 벌을 남겨 두셨다가 그 자식들에게 내리신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본인이 받을 줄로 알아야지. 20절, 제 파멸은 제 눈으로 보아야 하고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사약은 본인이 마셔야지. 21절, 살 만큼 살고 죽은 뒤에 집안이 어찌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약간 번역의 차이가 있죠. 공동번역이 더 정확하게 이 내용을 전해준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욥이 말하려는 핵심이 뭐죠? 지혜 전통이 말하는 대로 이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꼭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악인들이 꼭 잘못되는 것도 아닌데 자꾸 그 잣대로 내 삶을 재단하지 마라.’ 그렇게 욥은 고함을 치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아요. 그래서 혼자서 이렇게 몸부림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26절, 여기서는 두 사람의 운명이 대비되고 있어요. 23절,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4절,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정말 그렇게 편안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25절,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26절에 보면 ‘다 흙 속에 눕게 되고 똑같이 구더기가 덮치는구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날엔 매장만 했을 테니까 거의 구더기가 끓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흉악범 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시체를 묻지도 않고 어느 곳에 한꺼번에 모아두는 곳이 있어요. 그러면 구더기가 덮인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니까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욥이 볼 때는 선하면 잘 되고 악하면 힘들게 된다는 게 아니라 ‘나는 모르겠다. 정말 편안하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너무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결국 같이 죽어서 흙속에 묻혀서 구더기가 덮인다.’라고 욥이 아주 냉철하게 세계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네요. 이게 맞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신앙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욥의 말을 다 신앙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어요. 어떻게 보면 욥은 지금 악에 바친 거예요. 너무 코너에 몰려있으니까요. 그리고 도저히 친구들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뭔가 울분과 분노가 차서, 어떻게 보면 망발 비슷하게 내뱉는 대목이 있어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장면 같은 것은 신앙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후반부에 가서 다시 욥은 30절에 나온 대로 ‘악인이 그 재난을 용케 피해간다.’ 앞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다 피해서 살아간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장례도 멋지게 지내고 무덤도 누가 지켜주고 조문객도 많은 것처럼 악인들도 잘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말하네요.


이 21장은 은혜롭다고 보기는 조금 힘든 장입니다. 바로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욥의 가슴에 울분이 가득 찼어요.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공격을 너무 받으니까, 자신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친구들이 계속 몰아붙이니까, 그리고 자기가 배워온 지혜의 전통에 따르면 틀린 말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분노에 차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극단적으로 표현을 했어요.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문단 보십시오. 그것만 잠깐 보고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욥은 지금 친구들의 지혜의 전통을 거부하는 거예요. 틀린 것은 아니되 자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걸 거부할 뿐이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악인들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장례식도 멋지게 치르고 조문객도 많이 든다.’ 욥이 그렇게만 이야기할 뿐이지 이게 왜 그런지에 대해서 욥은 마땅한 설명을 못합니다. 앞에 나온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설명을 해요. ‘하나님은 악인을 분명히 심판한다. 그 당대가 아니라면 후손이라도 받는다.’ 등등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욥은 그렇게 못해요. 자기 속에 있는 인간의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 한계상황이라고 하면 좋겠네요. 거기에 빠져있는 사람의 아주 진솔하고 솔직한 태도입니다. 너무 앞뒤가 딱 들어맞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믿음으로 말을 하되 다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삐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것을 말하고 고백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이 친구들이 합리적으로 말을 함으로써 욥을 코너로 몰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죠.


자신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지혜의 전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 앞에서 욥은 망연한 겁니다. 삶이 수수께끼예요. 이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 해명할 수 없는 깊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개인도 그렇고 민족과 역사도 그렇습니다. 요즘 역사교과서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있는데 몇몇 역사학자들의 책들을 보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해요. 딱 결정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역사를 우리가 다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게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말이죠.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교회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2세기, 13세기에 십자군전쟁이 있었죠. 이슬람과 기독교(그 때는 개신교가 없었으니까 가톨릭이죠.) 사이에 십자군전쟁이 있었어요. 그 때는 십자군전쟁에 나가 싸워서 이슬람교도들을 죽이고 잃어버린 땅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이 해석을 하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다르게 해석되잖아요. 지금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것이 다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게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이 그것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어서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맺느냐에 따라 이런 것들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거죠. 이 역사 안에서 그런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삶이 수수께끼라는 말씀을 제가 드렸는데요. 우리 대구샘터교회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를 따지고 보면 수수께끼와 같은 거예요. 우연한 여러 가지 사연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게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만약에 다른 어떤 일들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하양이나 진량에 있었을 겁니다. 진량에서 대구로 나오게 된 것도 우연한 어떤 것 때문이에요. 제가 거주지가 그쪽이라 여기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이게 개인과 교회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들이 거기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의 전통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 혹은 비밀, 우리의 익숙한 말로 하면 하나님의 숨은 섭리예요. 우리 인간의 한계 안에서 다 깨우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 앞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대안까지 제시하면서 주장하지 못하고 마치 정신줄을 놓은 듯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욥기서 마지막에 가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했다고 했을까요? 잘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친구들에게는 더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했고요. 그래도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진실한 사람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욥이 지금 확실한 대답을 갖고서 친구들과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알 수 없는 삶의 깊이에서 지혜 전통으로 다 해명할 수 없는 자신의 실존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듯이 하소연 하는 거예요. 그 깊이를 봐야하는 거죠. 요약문 마지막에 그렇게 썼습니다. 욥은 친구들을 향해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해요.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서 '세상이 왜 이따위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는 중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대인들은(이게 유대인들의 종교 문헌이니까) 자신들의 신앙을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는 거예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따지고 있는 욥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 말이 좀 많아.'라고 답변을 했고 그때서야 욥이 '하나님을 여태까지는 귀로 들었는데 실제로 경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벌써 11월 4일. 2015년이 바로 엊그제 시작되는 것 같았는데 이제 두 달 남겨놓은 시점에 왔습니다. 또 이렇게 1년이 지나가서 종이 한 장을 넘기듯이 지나간다는 사실도 저희들이 압니다. 우리는 그러한 긴 세월 속에서 오래전 유대인들의 신앙이 압축되어 있는 욥기의 한 대목을 오늘도 함께 읽었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오늘 저희에게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들어가는 밥, 가족관계, 친구, 이런저런 직업, 이런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욥기의 이 귀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이런저런 삶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대로 인도하실 줄로 온전히 믿으며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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