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09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욥기서는 지난주에 이어서 29장, 30장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내용에 따라서 한 장을 할 때가 있고 두 장을 할 때가 있어요. 요즘 두 장을 할 때가 자주 있네요.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같이 묶어서 준비를 했습니다. 오늘은 29장과 30장이에요. 우리가 바로 앞에서 조금 까다로운 부분들을 공부했습니다. 24장부터 27장까지는 그 내용이 뒤섞여 있어요. 그래서 24장과 27장, 그 부분을 몇 번에 걸쳐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엉클어져 있는 부분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 28장은 전체 욥기서에 비해서 조금 색깔이 다른 내용이 들어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24장부터 28장까지를 마쳤습니다. 이제 실질적인 논쟁은 거의 다 끝난 겁니다.


이 욥기서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욥의 이야기, 보통 서사라고 그래요. 욥의 이야기가 한 편이 있고요. 이 내용은 굉장히 의로웠던 욥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탄이 천상회의에 가서 욥을 두 번에 걸쳐서 시험해보겠다는 허락을 받아서 이 사람이 쫄딱 망했다가 나중에 갑절로 좋아졌다는 이야기예요. 하나의 스토리가 한 부분이고요. 또 한 부분은 욥과 친구들의 신학적인 논쟁입니다. 이건 굉장히 깁니다. 말하자면 욥기의 핵심이죠. 그게 28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한 덩어리예요. 전체적으로 보면 세 덩어리죠? 욥의 서사, 내러티브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있고요. 욥과 친구들의 신학적인 논쟁이 있고요. 이 논쟁은 이해하실 거예요. 지금도 사실은 교회가 다 그러한 논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구샘터교회는 신앙적으로 조금 열려있어서 성경을 볼 때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영감을 내리셔서 뜻을 알리셨지만 결국 그것을 실제로 쓴 집필자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그 당시의 문학적인 특징들이 이 안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글 쓴 사람의 방식이나 그 당시의 문학적 유형들을 잘 살펴야 된다.' 우리는 그런 입장인 거예요. 그런데 아주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인데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 보수적인 쪽이 문자적으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무식하게 하지는 않죠. 거기도 층이 많아서요. 어쨌든 크게 대별하면 그렇습니다. 지금도 사실은 신앙이 신학적 논쟁인 것은 분명한 겁니다. 이 욥과 친구들 사이의 신학적 논쟁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두 번째 덩어리고요.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욥과 친구들에게 내리는 거예요. 주로 욥에게 내리죠. 친구들에게는 맨 나중에 한, 두 마디 코멘트하고 핵심적으로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그게 한 덩어리예요. 그렇게 보면 세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엘리후의 이야기가 들어와요. 엘리후 이야기는 친구들과 같은 논쟁은 아니에요. 보통 논쟁이라고 한다면 주장과 반론이 왔다, 갔다 하면서 논쟁이 계속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후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요. 엘리후라는 말은 들어보셨죠? 우리 욥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까요. 엘리후는 이야기를 굉장히 길게 해요. 그런데 욥은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그게 32장부터 37장까지 있는 거예요. 참 길죠? 엘리후 혼자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거는 원래 욥기에 있던 것이 아니라 욥기가 전승되면서 나중에 들어온 거라고 합니다. 그게 맞는 거예요. 그렇게 엘리후까지 포함한다면 크게 네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끝나는 시점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미 끝났어요. 바로 앞에서 끝났고 이제 우리가 공부하려는 29장부터 31장까지는 욥의 최후 변론입니다. 재판 받을 때 보면 쭉 진행되다가 마지막으로 검사와 피고가 최후 변론하는 것이 있습니다. 핵심적으로 피고가 최후 변론을 하는 거죠. 자신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바로 이 대목이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서 마지막 변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9장부터 31장이에요. 오늘 우리는 세 장을 다 하지는 않고(29장부터 31장까지 한 덩어리예요.) 두 장만 하겠습니다. 29장에서는 욥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속된 표현으로 잘 나갔었는지를 회상하는 거예요. 그리고 30장에서는 그와 반대로 자신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지를 말하고요. 31장에서는 ‘하나님에게 변론하겠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봤자 말이 안 통하니까 안 되고 하나님에게 직접 나의 억울한 형편을 아뢰고 답변을 듣고 싶다.’는 절규가 나와 있어요. 그래서 31장은 다음 주에 하도록 하고요. 오늘은 29장과 30장을 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겠습니다.


<욥기 29장>

1.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5.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6.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

7.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0.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11.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18.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

19.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이슬이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고 갈 것이며

20.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

21.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22.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

23.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24.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25.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9장은 욥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하면 이 욥은 어른으로서 존경받았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드물죠. 단순히 잘 살고 부자라는 것만으로 존경받을 수는 없는 거예요. 이 욥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어요. 특별히 젊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지혜 전통에서 말하는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는 것이 분명하죠. 욥은 아주 모범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겁니다. 그게 29장에 나오고 있어요. 제가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한 욥의 행복하고 존경받았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몇 구절만 찾아서 보겠습니다.


3절 보세요. ‘하나님의 등불이 자신의 머리에 비쳤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빛 때문에 암흑 가운데서도 걸어 다닐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네요. 이런 게 전달이 되시죠? 이걸 실감을 해야 됩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운명이 힘들었는데도 하나님 때문에 잘 됐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도 여기서 흑암, 암흑은 주변세계가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죠. 실제로 포악한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고요. 그리고 이유 없이 억울할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거고요. 또 실존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사실은 암흑이에요. 그걸 여러분들이 느끼시죠? 우리에게 모든 일들이 아무리 잘 풀려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벽, 혹은 흑암과 같습니다. 조금 적나라하게(지나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오늘 같이 모여서 얼굴보고 공부하잖아요. 하지만 내일 다시 만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다음 주에 우리가 다시 만나리라 하는 보장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면 흑암이나 마찬가지겠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을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실체니까요. 그걸 뚫어 봐야하는 거죠. ‘다행스럽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안심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실체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욥은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빛을 비춰 주셨기 때문에 흑암 가운데서도 자신이 다닐 수 있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메타포라고 해요. 은유, 빛, 밝음이죠. 빛은 암흑에서 밝은 거죠. 작은 불빛만 있어도 어둠 속에서는 생명입니다. 삶이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해야 하는 거죠.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대개 우리는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하지 않고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만 생각을 하고요. 빛을 오히려 다른 것에서 찾습니다. 이런저런 우리 삶의 풍요로움이라든지 사람들이 많이 추구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게 있으면 편리해지는 삶들, 이런 것을 빛으로 생각하는데요. 열심히 돈 벌고 노력하고 자기 성취하는 것을 제가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매몰되어 있으면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흑암과 같아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 삶은 기본 자체가 흑암처럼 아득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흑암과 같은 삶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어제 제가 대구성서아카데미 매일묵상에 쓴 글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목이 ‘허공으로의 투신’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신앙적인 화두를 붙들고 꾸준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결국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의 보금자리에서 알에서 깨어난 새가 날갯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절벽 아래 허공으로 비상하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순간이 온다.’ 대림절 신앙과 연관해서 지난주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한 그 부분이었습니다. 그게 뭔지에 대해 제가 매일묵상에 잠깐 썼습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을 했어요.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거냐.’하는 것은 저 천 길 낭떠러지, 새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허공과 같다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겨서 복락을 누리고 영원무궁하게 생명을 이어간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고 그러니까 허공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대해서 불안한 거죠. 그렇게 불안하기 때문에 자꾸 우리가 살던 방식으로 꾸미려고 하는 거예요. 가서 누구 만나고 어떻게 살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던 방식을 더 확대해서 우리가 보통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생각하는데 그건 약간 옆길로 가는 거죠. 정말 참 신앙은 허공과 같은 죽음 이후의 아득한 세계에 어린 새가 천 길 낭떠러지로 자기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완전히 신뢰하고 맡기고 들어가는 거라는 설교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이 돼요. 아주 건강하면 30년 살 거고 그렇지 않으면 20년, 더 짧을 수도 있고요.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다. 저보다 젊은 사람이라고 해봐야 곧바로 따라올 거라서 그렇게 연연하지는 않는데 과연 죽은 다음의 심연, 어둠과 같은 그 세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평화롭게 맞이하며 들어갈 건가하는 생각은 늘 합니다. 그러한 쪽으로 생각을 하면서 성경도 읽고 설교도 준비하고요. 만날 죽는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밑바탕에 있으니까,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내일의 사건은 죽음이니까요. 다른 것은 확실한 게 없어요. 그런데 그것만은 분명하니까 그걸 바탕에 놓고 성경 말씀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죠. 무슨 이야기하다가 거기까지 나갔을까요?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은 심연, 아득한 절벽과 같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그걸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평화와 기쁨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거죠.


그 다음 5절, 젊은이들이 자신을 둘러쌓았다고 하네요.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 거예요.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대차이도 있고요. 보통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를 가리켜서 ‘꼰대’라는 표현을 많이 해요. 나이 많은 사람이 잘난 척하고 함부로 부려 먹고 깨우치려고 하고 뭔가 밑에 사람 보듯이 하는 것을 ‘꼰대짓 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 욥은 그런 소리 듣지 않고 정말 존경받는 사람이었어요. 이 존경 받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닌데요. 권위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고 베풀고 자식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희생적으로 어려운 일을 같이 나누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훌륭한 어른으로써의 일을 잘 감당한 욥, 참 멋진 사람이었어요.


예를 들어서 그가 어떤 일을 했냐면 7절 보면 이렇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성문과 거리는 광장이거든요.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재판이 벌어진 거예요. 지금과 같은 재판소와 비슷한 거죠. 그 때는 지금처럼 삼권분립으로 돌아가는 시대가 아니라서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그 동네 안에서 해결해요. 중동, 유럽은 성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 앞에 광장이 있고요. 거기에 모여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원로들이 모여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여론을 들어보면서 결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욥은 재판관과 같은 역할을 아주 지혜롭게 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상이 가죠? 쭉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재판 자리에 가서 지혜롭게 잘 판단하는 것들이 그냥 말로만, 머리로만이 아니라 실제 자기의 삶으로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정말 가능했던 거죠. 저도 목사로 평생을 살았어요. 그래서 말을 많이 합니다.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지인데요. 말과 자신의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욥은 달랐던 거죠. 정말 의인 중에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 이하에 보면 욥이 존경받는 이유가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을 전폭적으로 도와주었다는 데에 있어요. 12절 보십시오. 빈민, 고아, 과부에 대해 나오잖아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들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다 있지만 이 유대인들은 유독 그랬어요. 그 당시 어려운 사람들인 나그네, 과부, 고아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요즘 말로하면 복지의 관점에서 그 사람들의 생존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한 거죠. 참 유대인들이 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긴 해요. 그런데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전통을 보면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세계를 아주 끈질기게 붙들려고 노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안식일 제도가 사회 정의의 측면에서 어떻게 중요할까요?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노동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날 모두가 성전에 가지는 못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교회 온다는 차원과는 다른 겁니다. 노동자들이 쉬는 거예요. 노동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걸 가장 좋아할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당연히 노예,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는 사람들인 거예요. 반대로 지주들은 안식일을 싫어하는 거예요. 노예라든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일꾼들이 계속 일을 해야 많이 생산해 내고 돈을 더 벌 텐데 안식일 때문에 손해를 보니까요. 유대인들이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 제도를 통해서 이 사회의 복지, 안전망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것도 아주 고대 사회에서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난 민족인 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전통을 초기 기독교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특별히 잘 돌 보라는 내용이 신약성서에도 많이 나와요. 유대인들이 특별히 그런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과부의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유대인들은 여러 지역에서 나그네처럼, 노예처럼, 고아처럼 살았어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거나 여러 지역에서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국에 살지 못하고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당했던 어려움들이 이미 축척되어서 다른 민족들의 어려움까지 헤아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유대의 전통이죠. 그런데 여기서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나 시련,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드린 대로 더 적극적으로 자신과 같이 아팠던 사람들을 잘 베풀어 주는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아주 반대로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하도 어려움을 많이 당하니까 전혀 베풀려고 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이 될 수 있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가는데 유대인들의 전통은 전자에 있어야 해요. 그러나 최근에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등의 인색한 모습을 보게 돼서 마음이 조금 안 좋습니다.


이제 29장을 마치겠어요. 21절 이하에 보면 자신이 젊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은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어요. 어느 사회나 원로급 되는 어른들이 필요한데요. 우리나라 정치계의 어른이 누구일까요? 여와 야가 복잡할 때 한 마디 하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의 어른이 없잖아요. 종교계에도 마찬가지고요.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쨌든 이 욥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 29장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욥기30장>

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2.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4.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 거리를 삼느니라

5.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6. 침침한 골짜기와 흙 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며

7.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11.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 레를 벗었음이니라

12.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13.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14.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16.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18.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25.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27. 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28.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29.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1.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이제 30장으로 넘어가면 완전히 급락해서 저 밑바닥으로 떨어진 욥의 현재의 삶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재밌어요. 29장에서는 자신의 존경받았던 그러한 삶을 젊은이들로부터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 30장에서는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 쪽으로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고 말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했던 그 젊은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비웃게 되었다고 하는 거죠. 이거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갑자기 나빠져서 그런 건 아닙니다. 왜 욥을 비웃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이 완전히 쫄딱 망하게 됐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망하게 되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욥이 저렇게 된 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 옆에 가까이 가기가 꺼려 지는 거예요. 욥은 비웃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직접적으로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젊은이들이 그 전에는 가까이 가서 문안도 잘 드리고 ‘한 말씀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덕담도 들어보고 싶어 했을 텐데 이제는 외면하는 그런 상태로 이 욥이 떨어진 거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이 참 감당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30장 15절에 보면 공포가 자신을 에워쌓았다고 하네요. 그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공포에 빠졌고요. 그리고 자신의 품위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사람은 다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상태에 빠졌으니 견뎌내겠습니까. 그래서 점잖게 품위 잃지 않고 누가 욕을 하더라도 초연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거죠. 입에서 거친 말도 나오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감정노출을 했겠지요. 그 전에는 이 사람에게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거죠. 아주 점잖고 품위가 있던 사람인데 상황이 힘들어지니까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을 이 욥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녀 사냥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보면 이 욥이 어땠을까 상상이 갑니다. 현재 자신이 떨어진 상황을 설명하고 있어요.


18절에 보면 자신의 처한 상황이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고 품위를 잃게 하는 그것도 힘들지만 더욱 더 힘든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못 견디는 거예요. 다른 우연한 일로 됐다면 받아들이겠는데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이 하신 건 아니죠? 그렇잖아요. 욥기에 보면 사탄이 와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욥도 당연히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자신이 이러한 재앙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의 작은 일상으로 예를 든다면 우리들도 살다가 어려운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잖아요. 사업에 실패했다든지 했을 때, 그 사실 자체는 견뎌낼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징벌을 내리신 거 아닌가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면 견뎌내기 힘들죠. 욥은 지금 그러한 상황에 빠져있는 거예요.


19절에 보시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다.’ 지금 그러한 생각 속에 밀려드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매달리기는 하는데, 20절에 보듯이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거죠. 사실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침묵으로 들리는 거고요. 이 욥기서 뒤에 가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욥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요. 23절,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 보내시리이다.’ 결국 그렇게 부르짖었지만 침묵하시고 그리고 나는 죽어서 내 길을 가야한다는 겁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했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런 상황이에요. 물론 하나님이 버리진 않으셨죠. 하지만 그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요. 그 시대가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재앙을 받으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헤쳐 나갈 힘을 달라고, 판결을 해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기도의 응답도 없어요. 이러한 상황이 어떤지 우리가 다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토로했던 장면이 연상이 되네요. 완전한 절망인거죠.


그러한 상태를 24절부터 31절까지 쭉 썼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집에 가서 몇 번 읽어볼 생각이에요. 24절부터 31절, 마지막 구절까지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봐야겠어요. 이 욥기, 시편, 잠언은 다 시예요. 시라면 운율이 있어야 돼요. 그러나 우리 개역개정은 산문처럼 기록되어 있어서 문장의 어떤 고유한 뉘앙스 전달이 조금 부족하죠. 이 24절부터 31절까지 여러분들도 더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욥 자신이 어떤 상태로 떨어졌는지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강의안 끝부분에 ‘이것은 욥의 특수한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미래다.’라고 썼어요. 이건 분명합니다. 제가 앞 강의에도 그런 말씀을 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잠정적인 욥이다.’라고 말이죠. 피부가 검어지고 뼛속이 비는 것, 윤기가 다 빠져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곧 그렇게 될 텐데요. 제 얼굴에도 검버섯이 큰 게 하나 있어요. 누가 이거 빼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딸들은 제 흰머리 때문에 학교에 가면 창피하다고 물 좀 들이고 오라고 하도 그래서 ‘알았다. 너희들 결혼식 하면 그 날만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우리도 곧 머리가 희어지고 얼굴이 검어지고 윤기가 빠지게 되거든요.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것이 불행, 저주가 아니라 우리 생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받아들여야하죠. 이 욥은 물론 비탄하면서 쓰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이 욥기가 욥이라는 한 인물만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래서 이 부분들을 읽을 때마다 ‘이건 욥 이야기만이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네’ 하는 느낌이 와요. 그런 것을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산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소소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 욥기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당겨서 살게 해주는 아주 힘이 있는 말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이 말씀을 읽으니까 ‘내 삶이 정말 초라해지겠네.’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평화로워 지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이게 나 혼자만의 미래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미래라는 점에서 우리는 억울해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고요. 그러한 미래를 당겨서 오늘 이 현재 순간에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은총을 붙들고 살아야 되는 거죠.


이 욥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게 좀 까다로운 말씀이라서 어떻게 공부하나, 그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저는 이 말씀이 좋아서요. 여러분들에게 전하기 전에, 목사로 평생을 산 사람이지만 다시 한 번 욥기가 영적으로 귀한 말씀이고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도 연관되고 우리 개인의 실존에서도 정말 적합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렇게 12월 이미 들어서서 또 며칠이 지났고 이렇게 갑니다. 수요일 저녁, 저희들이 하루의 일손을 멈추고 잠시 주님의 처소에 모여서 욥기를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2500년 전, 또 2000년,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읽고, 또 읽었으며 해석하고, 해석하고, 해석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설교했고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그 긴 역사에 우리도 같이 동참합니다. 우리에게 욥의 기쁨과 불행, 행복과 슬픔, 하나님을 향한 절규를 통해서 우리의 삶들이 하나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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