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25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24:1-25

25:1-6

26:1-14

27:1-23

  1-17,21/18-20,22-25  

       1-6       

       1-4/5-14       

       1-7/8-23       

욥/소발

빌닷

욥/빌닷

/소발


오늘 우리 같이 공부할 욥기는 25장과 26장이에요. 25장은 아주 짧아요. 좀 이상하죠. 10절도 안 되네요. 이렇게 짧은 것은 없었어요. 여기에는 무언가 중간에 잘라져나간 흔적이 분명이 있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25장과 26장 일부, 27장 전반부, 이렇게 보겠습니다. 좀 복잡해요. 지난주 공부할 때 제가 말씀드렸죠. 24장부터 27장은 차례대로 배열이 못 되고 조금 뒤죽박죽으로 됐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왜 그러냐.’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은 ‘뭘 그렇게 순서가 바뀌었다고 말하나. 있는 그대로 봐도 되지 않나. 그 말씀이 그렇게 됐으니까 괜찮은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미리 말씀을 드린다면, 현재 있는 대로 읽어도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게 욥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빌닷의 이야기인지 그리고 여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 명의 친구 중에 하나인 소발의 글인지 구분하면서 보는 게 좋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런 것들은 우리 일반 신자들이 연구하고 밝혀서 확실하게 알기는 힘들고 전문가들이 그런 것들을 합니다. 우리는 그 전문가들, 성서신학자라고 하거든요. 특히 구약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자는 거죠. 가능하면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죠. 보통 문학 같은데도 보면 옛날에 쓰인 이 시가 누구의 것인지 논란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전문가들이 이 시는 누구의 것이고 어느 시대인지 등을 잘 연구해서 밝혀 주는 것처럼 성경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조금 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정확한 순서에 따라서 공부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죠.


이 24장보다 27장이 배열이 정확하지 않아서 지난주에 제가 도표를 준비해서 말씀드렸죠? 그게 여러분들 머릿속에 남아있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남아있지 않아요. 확인을 해야 하는데 오늘 조금 더 정리를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욥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등장해서 이야기하고 욥이 대답하고 두 번째 친구가 등장해서 이야기하고 또 욥이 대답하고 세 번째 친구가 등장해서 다시 욥이 대답하는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몇 번 돌아가죠? 세 번씩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세 번씩 발언하는 거예요. 지금 두 번째까지 다 지나갔고 세 번째로 엘리바스가 나와서 비판한 것에 대해 지난번에 욥의 대답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순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넣어두시고 보십시오.


강의안 요약문에 등장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한 번 정리했습니다. 욥이 24장 1절에서 17절, 그리고 21절, 이걸 지난주에 본거예요. 엘리바스의 세 번째 비판에 대한 욥의 대답이에요. 그렇다면 순서에 따라 빌닷이 등장해야 되죠. 25장 1절에서 6절이 빌닷의 세 번째 이야기예요.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보면 26장은 욥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요. 그건 조금 뒤로 밀어 놓고 빌닷의 이야기가 25장 1절에서 6절, 그리고 26장 5절에서 14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26장 1절에서 4절만 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5절에서 14절은 빌닷입니다. 이걸 어떻게 아냐면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욥의 신앙인지 친구들의 신앙인지가 구분이 돼요. 그러나 사실은 그냥 봐서는 잘 모릅니다. 앞에서도 우리가 공부할 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라서 그 이야기를 욥이 했다고 하더라도 크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걸 아주 꼼꼼하게 보지 않는 한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26장 전체가 욥의 이야기처럼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5절부터 14절까지는 빌닷의 이야기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욥의 대답이 나와요. 26장 1절에서 4절, 그리고 27장 1절에서 7절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친구가 남았죠? 소발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발은 우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아요. 그게 좀 이상하죠. 자연스럽게 된다면 엘리바스, 빌닷까지 세 번씩 했으니까 당연히 세 번째로 소발도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오지 않아요. 왜 나오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몇 가지 대답이 있는데 두 가지만 보면 이렇습니다. ‘빌닷까지 이야기하고 욥의 대답을 들어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라 소발이 나서지 않았다.’고 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게 하나고요. 오늘 우리가 공부를 따라가고 있는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소발도 분명히 있었는데 다른데 섞여 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강의안에 제가 괄호로 묶어서 (소발)이라고 했습니다. 27장 8절에서 23절과 다시 24장으로 돌아갑니다. 18절에서 20절, 22절에서 25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24장부터 27장까지 그렇게 정리돼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는 차이가 납니다. 그 다음 28장부터 다시 제대로 갑니다.


이런 건 아주 전문적인 학자들이 밝혀낼 수 있는 건데 우리가 그러한 선생들의 연구에 도움을 받아서 가능하면 정확하게 아는 게 좋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게 욥의 이야기인지 친구들의 이야기인지 확실하게 구분이 잘 안 돼요. 그거는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와 있으면 기본적인 것들이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교회, 이런 것들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다 비슷해요.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오면 신앙의 형태가 많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죠. 아마 이러한 것들은 종말까지, 종말이라는 것은 진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에요. 예수님의 재림이고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끝나고 전체로 알게 되는 그러한 때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그러한 것들이 다 드러날 텐데 그 전까지는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같이 논의도 하고 투쟁도 하고 같은 것들은 세워나가는 작업을 계속 해야 됩니다.


오늘은 빌닷의 세 번째 주장과 욥의 대답을 보겠어요. 25장과 26장, 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보겠습니다. 욥에 대답에서는 27장이 부분적으로 들어와요. 보십시오. 첫 번째 단락, 빌닷의 세 번째 주장이라고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25장 1절에서 6절, 26절 5절에서 14절입니다. 이 빌닷의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그냥 눈으로 보셨겠습니다만 이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거예요. 일단 읽어 보겠습니다. 25장 1절에서 6절까지만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25:1-6>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여기는 아멘일까요, 아닐까요. 말씀은 은혜롭죠? 여기는 빌닷이 욥을 비난하기 위해서 예쁜 신앙적인 말들을 나열한 겁니다. 겉으로 말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속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도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에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흘리지 말고 좀 보는 게 낫겠습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갖는 불만은 이겁니다. ‘자꾸만 너는 의롭다고 이야기 하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설령 네가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이런 비난 앞에서 욥은 뚫고 나가기가 힘든 거예요. ‘인간이 죄인이지 뭐야’ 그 말 앞에서 누가 ‘나는 죄인 아냐!’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하여튼 그러한 욥의 자기 정당성에 대한 주장을 이 친구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 거예요. 아주 계속적으로 그걸 말하는 겁니다. 그런 것만 보면 옳은 이야기예요. ‘인간이 죄인 아니냐.’ 그거죠. 여기서는 이 욥의 자기 정당성에 대한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시며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냐.’라고 일반론적인 주장을 하는 겁니다. 이런 말 들으면 아무도 끽소리 못하죠.


2절에 나오는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예요. 하나님의 통치 능력이요. ‘하나님에게만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위엄이다.’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고 그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빌닷이 말하는 거죠. 3절에 보면 재밌게 표현했어요.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하늘의 군대, 수가 무지하게 많은 군대, 천군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태양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이 놀랍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강조하고 그 다음 4절부터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냐.’ 결국 빌닷은 욥을 비난하는 거죠.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데 결국은 욥에 대한 비난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이 친구들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간절한 마음, 신앙적인 확신 때문에 이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욥을 비난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건지, 그걸 제가 어떻다고 말하기가 힘들어요. 아마 양쪽 다 그런 생각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정도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하나님이 높으시다. 광명과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그 다음은 대비해서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네가 지금 의롭다고 하는 거 아니냐.’하는 거죠. ‘여자에게서 나온 인간이 어떻게 깨끗하냐.’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6절 보세요. 이 표현이 굉장히 강하죠.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 사람을 그렇게 표현하네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그만큼 낮다. 자신을 의롭다고 말하는 욥,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걸 욥에 대한 비난이라는 것을 떼놓고 이 말만 보면 틀린 건 없죠? 그리고 어쩌면 신약시대에서는 빌닷의 말이 더 맞을 수 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모든 사람들이 악하다. 심지어 자연까지 부패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하게 되면 그건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신약시대에서는 모든 인간이 부패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욥보다는 빌닷이 더 복음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이 말만 가지고는요. 이건 아직까지 욥 시대가 복음의 빛이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논란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고요. 이러한 주장들을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나 다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말하고 연결시켜서 말하기는 좀 곤란합니다. 이것은 욥이 당한 재난, 고난, 그러니까 무죄한 자들이 당한 고난에 대한 이유를 그 사람의 죄의 탓으로 보려는 지혜 전통에 대한 하나의 반성으로써 봐야지 이걸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속죄 은혜 앞에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연결하는 것은 조금 비약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걸 보면서 ‘이 말은 참 아름답다. 정확히 인간을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참고적으로 로마서까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26: 5-14>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26장 5절에서 14절까지에서 빌닷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거기서 작은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것과 비슷한 관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25장 1절에서 6절까지와 26장 5절에서 14절까지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가진 성경은 26장이 욥에 대답처럼 나와 있지만 학자들이 뒷부분을 떼서 빌닷의 말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본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4절을 한 번 보실까요?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간의 작은 것을 대비하는 겁니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앞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놀라운 차원들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일에 아주 부분적인 거다. 그 많은 것을 우리는 도저히 다 말을 하지 못하고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한 것도 단편적인 거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하나님은 우렛소리와 같고 우리는 속삭이는 거죠. ‘듣는 건 해봐야 속삭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비하고 있어요. 그리니까 결국 빌닷이 하려는 말은 ‘욥, 너는 잘난 척하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네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되냐.’ 그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두 번째 단락, 욥의 대답입니다. 26장 1절에서 4절, 27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그러면 26장 1절에서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26:1-4>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욥의 반론입니다. 참 기가 막힌 거죠. 가까운 친구들이 자신을 위한다고 하는 말 같은데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비수로 찌르는 것과 같은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어요. 그 마음, 그 소회를 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참 어렵죠? 사실 대화가 서로 안 되는 거예요. 욥과 친구들 사이에는 생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누가 누구를 설득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본 것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공격하고 수비하고 계속해서 돌아가요.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래, 자네 말도 맞다.’라고 하면서 서로 접촉점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고 계속 평행선을 긋고 있어요. 생각의 틀이 한 번 굳어지면 이걸 바꾸기가 힘듭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거기 있는 거예요. 성경에 대해서도 하나의 문자주의에 각인이 되어 버리면 좀 다르게 말씀을 해석한다 싶으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다르게 해석 하냐.’는 식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전에 일단 기분이 나빠 집니다. 그래서 처음에 바르게 공부하는 게 중요한 거죠. 교육학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잘못 배우는 것보다는 아예 안 배우는 게 나은 거죠.


사람의 성격도 그렇고 성품이나 인격, 심리 등은 한 번 굳어지면 바꾸기 힘든 것 같습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평생 같이 살아도 조금씩 달라지면서 일치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사는 거죠. 그러니까 ‘왜 저 사람이 저럴까.’라고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장 건전한 부부관계라면 귀를 열어 놓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와 다른 태도, 가치관, 정치적인 문제까지, 그 외에 다른 것마저도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최선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일치되기는 힘들어요.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신학적으로 예민한 것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도 그래요. 예를 들어, 어떤 행사를 언제, 어떻게, 누구를 초청하나 등등에서도 각자 느낌들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열린 자세로 대화하고 합의를 찾아 나가는 그런 정도만 돼도 가정과 교회 공동체, 한 사회와 국가에서 괜찮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도저히 일치점을 찾기가 힘들어요. 다들 고상하고 신앙적인 사람인데 이게 안 돼요. 서로 설득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계속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2절에서 보면 약간 욥의 감정이 나타나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면서 기분 나쁜 것을 그렇게 빗대서 이야기해요.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 도와 주는구나.’ 자신을 위해 말한다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3절 보면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욥도 정말 지혜로운 사람인데 상대방이 많이 아는 것처럼 지혜 자랑을 한다는 이야기예요. 쭉 그런 말입니다. 4절도 보십시오.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이런 식으로 반론을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여태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확인한 바인데, ‘네가 지금 어려움을 당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네가 잘 살펴서 해결해보도록 해라.’는 거예요. 물론 원인을 따져야 할 때도 있죠. 실수를 했다거나 방심을 했다거나 이런저런 이유가 있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반성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거기서 돌아서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문제는 그건 아니거든요. 이건 아주 근원적인 거라서 원인을 따져서 밝히고 해결할 차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을 한 번 보시겠어요. 거기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확인해 볼까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겁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길을 가다가 선천성 시각 장애인을 봤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누구의 죄로 인한 거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제자들의 말과 욥의 친구들의 말이 같죠?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겁니다. 누구의 죄인지 따지는 거예요. 이런 말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질곡, 그 재난, 이런 것들이 결국은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원천적인 악한 힘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뚫어보고 결국 그 악한 힘의 지배를 받게 된 이유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유대인들의 사상이 그렇습니다. 선악과 문제도 그걸 신화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 되 그것으로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재단하고 비판하는 태도가 잘못된 거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앞에서도 우리가 짚었는데 로마서의 관점이 옳다고 보는 거고요. 그거는 갖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어려운 일이 있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죄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오용되는 거죠. 거기 요한복음 9장에 쭉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말에 어떻게 대답하시냐면 3절에 나와 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관점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 다음 욥기 27장 1절에서 7절, 거기도 욥의 이야기입니다. 27장 8절부터는 소발로 가게 돼요. 오늘은 27장 1절에서 7절까지 보겠습니다. 오늘 공부 제목은 25장과 26장만 나와 있는데 26장에 있는 욥의 대답이 27장 1절에서 7절까지 가기 때문에 그것도 함께 보겠습니다.


<27:1-7>

1.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굉장히 과격하게 표현합니다. 상당히 표현이 장엄하고요. 과감한 신앙 표현이에요. 어떻게 보면 오해 받을 수 있어요. 이건 정말 영혼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어요. 여기에 욥의 고유한 신앙이 담겨있습니다. 참 놀랍네요.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그 당시에는 옳은 사람은 재난을 당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 욥이 재난을 당했으니까 '나의 정당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정됐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굉장히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리고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 이렇게 표현해요. 그 두 표현을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셨고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셨다.' 참 극단적인 표현이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 그렇죠. 자신을 저 코너로 몰아가고 영혼을 괴롭게 하셨는데 그 분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확신을 갖고 말 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앞에 나와 있는 표현, 정당함을 물리치고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다는 것은 드러난 인생살이에서 나타난 거예요. 확실히 욥은 불의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거예요. 그리고 너무 힘들어요. 자신이 당한 재난만 힘든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이니까 영혼이 괴로운 거죠. 그건 실제로 드러난 거예요.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큰 신뢰, 큰 긍정을 두고 있어요. 아주 놀라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결국 죽게 되는데 죽는 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거든요.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는 모든 의지, 내가 누렸던 것들,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흙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당하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신앙의 태도를 여기서 배울 수 있고 이게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좋아서 하나님 믿는 건 큰 신앙이 아니에요. 다 잘 돼서 너무 좋아 죽겠어요. '하나님 날 위해 이렇게 해주셨으니까 내가 전적으로 믿겠습니다.' 이런 건 나쁜 건 아니지만 수준이 낮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밑바닥에 들어가도, 앞에서 표현한 대로 스올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영혼의 밑바닥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신앙의 경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집안이 풍비박산 당한 것도 아니니까 이런 욥의 신앙과는 거리가 있겠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아무리 여러 가지 조건들이 좋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따지면(앞에서도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욥과 같은 거예요. 그걸 내다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성립되지 않아요. 다시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섬뜩한 느낌으로써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얼마나 끔찍스러운 건지를 진지하게 알면 욥과 같은 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큰 계획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비밀한 방식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기에 참여한다.'고 하는 그 믿음이 필요한 거죠.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단락을 보십시오. 그 마지막 단락 앞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깐 이야기했는데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그건 하나님으로부터 부정당한 건데 그래도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단락을 보십시오. '욥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친구들의 소리에)적당하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간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교만한 건 아닌 거예요. 잘 생각하셔야 돼요. 자기 의는 아니에요. 그러나 자신을 친구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어떤 경계에 가 있어요. 그걸 욥이 붙들고 있는 겁니다. 옳다고 하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아요. 자신이 저 밑바닥에 떨어졌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지만 자신만은 공의를 붙잡고 자신의 생애를 비웃지 않아요. 놀랍죠? 이런 태도를 교만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욥이 실제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도 그것을 앞부분 어디서인가 잠깐 언급했어요. 자신도 젊었을 때부터 모든 게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가 정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중에 욥기 맨 뒤에 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좀 받기는 받되 욥의 친구들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으로 욥이 자리매김을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욥기를 쭉 보면서 저에게도 위로가 많이 돼요.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깊이라는 것이 정말로 깊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요. 욥과 같은 운명이 결국 개개인마다 다가오겠으나, 그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욥의 신앙을 통해서 '어떻게 앞으로 나가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한 주간의 가운데 시간 수요일, 그리고 11월도 거의 저물어가는 이 수요일 저녁에, 이 지하 예배당에서 욥기 말씀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이게 돈벌이나 건강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나 우리 영혼의 양식을 먹는 시간이고 우리 영혼의 건강이 이루어지는 시간인 줄 알고 우리가 최선을 다합니다. 짧은 시간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축척되어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신앙의 경지로 한발 한발 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 약함을 보십시오. 이렇게 저렇게 치우칠 때도 많고 마음이 약해질 때도 많습니다. 주님, 욥이 우리들에게 오늘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부정당하는 거와 같은 나락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붙드는 그 놀라운 믿음을 허락해주십시오. 우리가 늘 욥의 신앙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로 성장하기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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