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초기 기독교의 기도
(행 4:23-31)        
9월21일

큰 소리의 기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오늘의 공부를 시작하자.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기 예수 공동체가 지금과 같은 교회로 발전하리라는 사실을 약간이라도 예상하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그렇게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지금의 교회가 사도행전의 공동체와 일치한다고 볼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다. 즉 초기 공동체와 오늘의 우리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기도 하지만 불연속성도 있다는 뜻이다. 연속성은 양측 모두의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며, 불연속성은 초기 공동체의 신앙적 자리가 우리보다는 유대교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왜 예수를 죽게 한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교회를 형성할 의도가 있었는지, 그들에게 나타난 징표와 기적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은 왜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등등,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가 이런 역사 과정의 실체를 사실 그대로 복원해낼 수는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가능한대로 객관적인 태도로 그 실체를 뚫고 들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가 견지되어야만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감정이나 심리상태에 갇히지 않고 진리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의 주제이기도 한 초기 공동체의 ‘기도’에 대한 이해이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고 훈방으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에게서 일어난 일을 동료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그 동료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24절).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역시 큰 소리로 기도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성서읽기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크게 기도드리는 것 자체가 결정적인 잘못을 아니지만, 누가가 전하고 있는 이 상황은 이러한 사건과 동시에 발생한 사실보도가 아니라 누가의 신학적 해석이기 때문에 ‘큰 소리’ 자체는 거의 의미가 없다. 아마 그것은 누가 당시의 교회에서 흔히 드리던 기도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모든 보도를 사실이 아니라 해석일 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큰 소리’의 기도에 대한 누가의 보도가 특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세심한 관심을 기울어야 하지만 다만 그 당시의 습관에 의한 것이라면 그냥 건너뛰는 게 옳다.
이들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이 기도문이 출 20:11과 시 146:6에 연관된다는 사실은 난외주에 지적되어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본다면 70인역(譯) 사 37:16-20과 연관된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인들과 공동의 기도문을 사용해서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유의해서 보아야한다. 기독교는 초창기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도문 없이 유대교와 동일한 기도문을 사용하다가 신앙의 내용이 차별화하면서 기도문까지 새롭게 형성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할는지, 아니면 동일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그 측면을 첨예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충실하면서 열린 미래를 지향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비단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만이 아니라 타종교와의 관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도의 우주론적 지평
구약성서의 기도문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기도를 잠시 검토하자. 기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고백이라는 점에서 초기 공동체의 기도문을 검토하면 그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첫 머리에 창조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유대교 신앙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 창조와 세계에 놓여 있는데, 그런 신앙의 토대는 전혀 가감 없이 기독교 신앙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24절)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유대교와 초기 공동체의 신앙이 정확하게 우주론적인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작동되며, 그 미래는 어떤 것일까? 이런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이런 질문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경우는 흡사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의 실존에 완벽하게 갇혀 있거나 또는 우주론적 질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우이다. 양측은 똑같이 세계 개방성을 상실했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 관한 우주론적 담론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곧 세계를 대상으로 공부하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마 종교학자들이 대답해야겠지만, 굳이 내가 대답한다면 이 세계를 기계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역동적으로(신비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만약 이 세계가 우리의 예측할 수 있는 구도 안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하나님이라는 그 대상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지만, 반면에 그런 예측을 벗어난다고 본다면 우리와 다른 그 어떤 대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이 늘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의미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를 거슬렀지만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27,28) 오늘의 본문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여기서 야훼 하나님의 권능과 뜻은 곧 우리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이다.

말씀선포
구약의 기도문으로 시작된 기도는 이제 누가 시대의 교회가 처한 형편(삶의 자리, Sitz im Leben)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주님, 지금 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를 살피시고 주님의 이 종들로 하여금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29). 이들이 당하고 있는 위협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사도행전은 이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한다.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산헤드린의 압력이지만, 27절에 의하면 헤롯과 빌라도,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선동된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에 의한 폭력이었다. 23, 27, 29절 사이의 부조화, 또는 비약은 누가 공동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전제해야만 이해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기원 후 100년 어간에 활동하던 누가 공동체의 구체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 밝혀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콜로세움에서 순교 당하던 초기 기독교인의 수난이 일반적인 사건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라는 제국주의적 종교와 로마라고 하는 제국주의적 정치 틈바구니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어려움은 우리가 충분히 내다볼 수 있다.
그런데 누가는 자신들의 어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다만 “우리를 살피시고”라고 기도할 뿐이다. 그 당시 교회를 둘러싼 시련의 상황이 구조적이었기 때문에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서 이런 기도를 드렸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 헤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렇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주님이라는 기도문에서 보았듯이 우주론적인 신앙이 그들에게 확고했다는 데에 있다. 창조와 종말의 지평을 영적인 시각으로 직관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현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아무리 버겁더라도 거기서 도피하지는 않는다. 물론 힘들기는 하겠지만 “우리를 살펴 달라”는 기도로 지나갈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도와달라는 기도가 이어진다. 이 기도는 바로 이 기도의 배경으로 등장한 산헤드린의 추궁과 상응한다. 누가 공동체의 위기가 바로 그런 데 있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들이 처한 정황을 오늘 우리가 세세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고, 다만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그들의 영적인 욕구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에게 누가 공동체와 똑같은 어려움은 없지만 우리가 기도해야 할 긴장은 여전하다. 만약 우리가 기도드릴만한 긴장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그만큼 무디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29)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영적인 깊이가 없다는 뜻이다. 무엇을 기도의 제목을 삼아야 할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곧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조금 더 풀어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자질구레한 기도의 내용이 지나치게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드릴 만큼 절실한 문제가 전혀 없다. 기도의 인플레 현상이나 기도의 빈곤 현상은 상반되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한결같이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만약 우리의 관심이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게 쏠린다면 바른 기도의 내용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권능의 손
누가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권능의 손을 펴시어 주님의 거룩하신 종 예수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표징과 기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30). 이 문장은, 특히 권능이라는 단어는 다시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권능을 입에 담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우리의 전체 존재를 사로잡는 경험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껏해야 자신의 직장, 가족, 건강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특별하게 처리되는 정도에서 생각할 뿐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 우리의 무능력에 대한 또렷한 직관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무의미한 반면에, 궁극적인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는 인간이 만든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고 했으며, 신약성서는 만물이 완성될 종말을 기다리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누가의 기도는 질병 치유, 표징, 기적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런 현상들은 누가의 공동체가 헬라문화의 영향권에 들어있었다는 증거이다. 헬라인들에게는 이런 현상들이 곧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증거였다.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는 그런 헬라인들과는 다른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항목들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능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그게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포착해내야 할 세계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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