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13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계시록을 누구나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묘사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기자들이 쓴 신문 보도가 아닙니다. 단테의 『신곡』과 비슷합니다. 단테는 거기서 여러 가지 상징 용어를 통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묘사합니다. 단테는 요한보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훨씬 더 풍부하고 요한은 극히 절제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단테가 요한계시록을 읽고 영감을 받지 않았는지요. 단테와 요한은 위대한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고 영성가입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 문자 너머에, 그리고 그 심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그걸 다 볼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요한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자’라고 말하지 않고 인자 ‘같은 이’(ὅμοιον)라고 말한 이유는 궁극적인 대상을 직접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궁극적인 대상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 우주를 연구하지만, 우주 자체를 마주하는 건 아닙니다. 먼 우주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양자의 세계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만 설명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의 인자(人子)는 세상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보내실 심판자입니다. 후기 유대교에서 나온 묵시적 개념입니다. 일종의 메시아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심판하고 구원할 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게 발전한 겁니다. 그리스도교회는 그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해 무덤에 묻혔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자 같은 이’입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은 생명이 완성될 그런 순간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인자 같은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거룩한 갈망이 있는지요. 아니면 대충 재미있게 살면 그만인지요.
공동번역 [1:13 그 일곱 등경 한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요즈음 스마트폰을 많이 봐서 그런가 가끔 눈의 촛점이 흐려 집니다.
어느 사물이 촛점이 흐려져 뭔가 알 수없다가,
가만히 집중하고 계속보다 보면 서서히 사물의 윤곽과 모습이 이제서야 눈에 확 들어 옵니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도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았다가
점차 눈이 열려서 보았다고 생각하면 좀 이상한가요?
오늘 약간의 미세 먼지는 있지만 저 멀리 있는 산을 쳐다 봐야 겠습니다.
가장 살기 힘든 세상은 '의식주 경제'문제 때문에 힘든 세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인자'가 다시 오시는 날
아무리 심하게 어그러진 '불평과 '부정의(不正義)'라도 모두 쭉 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희망)이 없다면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세상 숨이 막혀서 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