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텍스트의 도구화를 넘어 존재론적 능력으로!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좀 잘하고 싶다는 생각 많으실 겁니다. 결국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서 현장에 나가게 되면 설교를 중심으로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되니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교역자들 중에서 대개다 설교가 빛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어떻게 잘하는 설교일까요? 먼저 저는 설교학자가 아니라서 설교 자체에 대해서 말할 게 사실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조직신학, 현대신학, 그 중에서도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신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설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좀 외도하는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들이 잘하는 설교를 생각할 텐데. 잘하는 설교보다도 옳은 설교가 뭔가 이런 쪽으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그거를 제가 이렇게 재단하는 방식으로 이런 게 옳다 저런 게 그르다 말할 만한 준비가 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것도 누가 말할 수도 없는 거죠. 저의 입장에서 말할 뿐입니다.

사족으로 한 마디만 더한다면 신학을 포함한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정답은 없어요. 정답을 향해서 가고 있을 뿐이고 어쩌면 종말에 가서야 드러날 뿐이고 그때까지 우리가 그쪽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조명 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야기가 정답이 아니라고 하는 그 사실이요. 그걸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고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확신이 없어서 발뺌을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착각하지 마시라는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신학공부 신대원 3년 동안, ThM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배우는 것이 일단 양면성이 있어요. 소중하면서도 사실 소중하지 않습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어요. 불가에서 보통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라고 하는데 배를 타고서 계속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신학공부, 특별히 커리큘럼 안에 있는 이러한 제도권 안에서 공부하는 이러한 내용들은 정말 간단한 배에 불과한 거예요. 그걸 타고 길을 가는 건데 버려야 될 때 버려야 되는 거죠. 신학과정을 통해서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설교문제와 연관해서 한마디 하고 지나가 볼까요? 성서텍스트에서 답을 찾았다고 한다면 착각입니다. 그게 인제 우리 설교자들에게 벌어지는 악순환입니다. 답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답을 찾은 사람들은 더 이상 답을 안 찾잖아요. 그걸 어떻게 포장을 잘하느냐 거기에만 관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거만큼 어리석은 게 어디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여태까지 설교비평이라고 하는 작업을, 최근에는 안합니다. 몇 년 전에 끝내고 끝냈다기보다도 할 만큼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신학과정, 이런 것도 우리가 목회자로 사는 게 일종의 구도적인 거잖아요. 도(道).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도라고 이야기했잖아요. 호도스라고 했죠. 길이죠. 길은 멈춰있으면 길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가는 거란 말입니다. 제가 아까 답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길만 있는 거죠. 제 표현이 어떤 뜻인지 여러분들 다 이해하시겠죠. 제가 더 부연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도 정답이라고 여러분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시면 좀 곤란할 겁니다. 이거는 제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서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학의 과정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갇히지 않는 분, 이미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이 빨리 이해 하셔야 될걸요. 하나님이 막연하다. 불가지론적이다. 모르니까 말도 하지 말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인식을 계속 뛰어넘는 그 분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그래서 구약성서, 신약성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상외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구원통치를 하시는 분, 이렇게 접근하고 있군요.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이 붙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당신이 누구냐? 사명을 얻은 사건 이야기에서도 보면 그런 대답이 나오잖아요. 자존자라고 나오죠.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런 애기도 하고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신학, 인문학 이런 것들은 사전에 나와 있는 풀이로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최소한의 정보고 그건 그 세계 안으로 여러분들이 깊이깊이 수렁 안으로 빠져들어 가는 경험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얕은 물에 있지 않고 자유롭게 수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냐는 그러한 성서의 대답들을 여러분이 안고 씨름을 해야죠. 자존자라고 하는 거를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세요? 여러분들이 그런 본문을 갖고 설교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여러분들의 언어로 해석해 낼 수 있어야 되는 거죠. 그 성서의 세계가 여러분들에게 소화되어서 여러분들의 고유한 언어로 재진술될 수 있어야 되는데, 이게 신학훈련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들은 언어로 그대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들은 풍월인거죠. 창조적으로 될 수 없는 거죠.

자존자, 스스로 있는 자가 뭘까요? 루터의 번역에 따르게 되면 나는 앞으로 있게 될 바로 그자다. 이걸 조직신학적인 용어로 바꾸자면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독일어를 써도 이해해 주세요. 판넨베르크가 독일 개신교 신학자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디 알레스 베슈티멘데 비르클리히카이트(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요.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뜻인데요. 여기서 비르클리히카이트는 리얼리티로 영역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진리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죠.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표현은 판넨베르크의 고유한 하나님 인식이고 진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의 방식을 하나님을 해명할 수 있어야죠. 그게 가능합니다. 그게 너무 잘못되면 사이비로 나가게 되겠죠. 문선명이나 이런 쪽으로 중심이 없을 때는 너무 자기 주관성에 빠지기 때문에 다른 데로 나가게 되는데 그러나 우리가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신학과 우리의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들, 이러한 안목들을 갖게 되면 성서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그 세계를 여러분들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진술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만 저는 설교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약장수처럼 이야기할 뿐인 거죠.

제가 서두에 어떻게 하면 잘하는 설교자가 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관심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으신가 물었는데요. 잘하는 설교가 아니라, 연관이 되겠네요. 잘하면서도 재미있기도 하고 설교자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창조적설교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거죠? 그게 가능하면 소위 말해서 교회가 성장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계없이 설교자의 영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설교자의 영성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시인의 영성하고도 맞물리는 이야기입니다. 시인들은 시가 안 써질 때는 절필한다고 그러잖아요. 우리 목사들도 설교가 안 될 때는 손을 딱 놓고 목회를 6개월, 1년 쉬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충전 받아서 새롭게 하고요. 안식년 제도가 그럴 것 같은데 우리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요. 어떻게 그러한 창조적 설교들이 가능한가 이런 거죠.

지금 강의 원고에 없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유는 아마 설교비평 책 한 3권 나온 것,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것을 묶어낸 것이 있고요. 그 책이 목회자들하고 신학생들에게 팔렸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듣고 싶은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하는 생각으로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기독교사상에서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아마 제일 많이 팔렸을 거라고 생각이 되고요. 신학자들이 책을 써서 인세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쪽 이야기 들어보니까요. 하나 써서 1년에 천권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보통 1쇄는 2천권 찍거든요. 그런데 그거 팔리기 힘듭니다. 설교비평 1권이 만 오천 권 나갔다나요. 좀 팔린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 여러분과 만난 것 같습니다.

제가 설교 비평을 하면서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뭘까요? 여기 설교비평에 대한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봅니다만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요? 36분을 대상으로 설교 비평을 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그 분들 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연찮게 아니면 기독교사상 편집부에서 제의해온 그 분들을 그냥 읽고 말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요? 그 분, 기분 나쁘기 때문에 어떤 분을 끌어내린다거나 그런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겠구요. 몇 가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텍스트의 실종이에요. 성서텍스트죠.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사라진 거예요. 그 설교를 하기 위해서 그냥 한 두 구절 내놓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 해도 이해를 해주세요. 제가 설교비평에도 다 다 한 이야기이니까요. 곽선희 목사님 설교가 제가 보기에는 대표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곽선희 목사님의 목회나 설교나 전반적인 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분은 이 세대의 한 시대를 풍미한 설교자고 목회자고 민족의 차원에서도 귀한 분, 큰 역할을 하신 분임을 전제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분의 설교를 읽으면서 성서 텍스트가 어디로 갔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거의 리더스다이제스트라든지 이런 데에 나올 만한 예화, 간증거리, 이런 것들이 연속해서 나오고 한편의 설교에 보통 일곱 개, 여덟 개 심지어는 열 번까지 나오고요. 성경구절은 그 사이 사이에 속된 표현으로 땜방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런 설교가 청중들에게 어필한다고 하는 이 한국교회의 강단에 현상도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거죠. 저는 그것이 아무리 들리는 설교고 재미있고 청중들의 마음을, 심정을 감동을 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게 문제가 아니냐? 설교의 핵심은 신자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느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좀 역설적인 표현인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싶으시죠? 그걸 내려놓으시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이 정말 은혜를 끼칠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설교를 들은 사람이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교회일 열심히 하고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내 설교가 먹혔다 정말 이게 설교자로서 바른 길이다 여러분들이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걸 확신하고 계시나요? 그들의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여러분들이 확신하시나요. 아니면 우리가 선동해갖고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여러분 생각해보신 적이 없나요? 있을걸요. 예를 들자면 신천지 이런데 가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분들이 참 불쌍하다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나름대로 거기 교주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은혜를 끼치는 거죠. 은혜를 받는 거죠. 문선명 쪽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현상적으로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이요. 우리가 한 영혼의 깊이를 얼마나 안다고 우리가 하는 몇 마디 설교로 그들이 신앙이 역동적으로 변했다는 것만 놓고 은혜를 끼쳤다 자족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리츨이라고 한 설교학자가 쓴 책, 이름은 제가 잊어 버렸습니다. 그 분이 거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동감합니다. 설교자들은 내 설교가 청중들에게 당장 얼마나 가능하게 어필하느냐 은혜를 끼치느냐에 대한 조급증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거죠. 판넨베르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좋은 설교란 청중들이 들은 즉시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한참 시간이 지난다음 청중들의 영혼의 깊이, 그 내면에서 새록새록 우러나오는 그러한 설교라고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신자들이 당장 은혜 받아야 된다고 하는 우리의 조급증을 좀 내려놓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설교하지 말고 성서텍스트가 좀 살아나도록 해보자 하는 겁니다. 거기에 좀 의존해 보자 하는 거죠. 저는 그것이 성령론적 설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설교자의 주관이 강하게 이렇게 청중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성서텍스트에서 활동하신 성령이요. 이 성령이 청중들과 공명하도록 하는 안내자의 역할로 좀 자족하자. 만족하자. 설교자가 대단한 것 아니다. 내려놓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형식적으로는 지금 제가 강의하듯이 보고 하는데요. 그러나 의미상에는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도 똑같이 말씀을 향해서 돌아서서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해야 되는 거죠. 이게 적합한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달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의 태도가 설교자로서 맞다. 청중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이런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어느 쪽으로 향해서 그냥 손가락질을 하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건 달을 보는 겁니다. 달을 보고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어보자. 자기가 그러한 영성을 갖고 그러한 포즈를 취하고 있기만 한다면 청중들이 처음에는 잘 몰라도 언젠가는 결국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볼 거 아니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설교자들이 달을 못보고 있으니까요. 그냥 청중들만 그냥 가득 자기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렇다면 청중들이야 상관없이 자기 혼자 독백하듯이 그렇게 말씀에만 도취하면 되느냐 그건 극단적으로 제가 꼭 그래야 된다는 말씀은 아니고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죠. 그러나 중심은 청중에게 가지 말고 텍스트에 가야 된다. 텍스트가 실종된 한국교회의 강단, 그건 아무리 거기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건 설교의 위기다. 이게 하나였구요.

둘째는 텍스트의 해석이 없는 거예요. 기껏해야 주석에 머물고 말뿐이지요. 주석과 해석의 차이 이런 건 여러 가지로 좀더 생각을 해야 되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텍스트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나왔느냐 그런 정도에 머무는 거죠. 그 텍스트 자체에 머물고 마는 거죠.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가다머라고 해석학을 한 철학자가 있거든요. 여기에 설교는 해석학하고 연관되니까요. 사실은 신학 자체가 해석학입니다. 모르겠습니다. 한일장신대에 기독교해석학이라는 커리큘럼 과목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의 광나루의 장신대에는 그게 있더라구요. 윤철호교수님이 하시던데요. 신학자체가 해석학인거예요. 가다머가 해석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사람의 말을 빌면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해되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업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인 표현이죠. 그래도 뭐 대충 생각해 보십시오. 지평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하셔야 되어야 되요. 호리존트라고 하는 겁니다. 호리존트. 텍스트의 어떤 지평이 있어요. 그걸 일단 봐야 되요. 그게 안 보일걸요. 생각도 안 하실 걸요. 뭐 볼 거 있냐?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이야기 아니냐? 하나님이 창조자란 말이 아니냐? 뭐 그런 이야기 다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구구단입니다. 수학이 아니라 구구단입니다. 구구단을 달달 외우면서요. 수학공식 외우듯이 외워 버리면서 어떻게 수학의 개념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미분과 적분의 어떤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성서 텍스트에 고유한 지평이 있는 것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서 여리고성과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여호수아가 그 안에 있는 이방인들 싹쓸이해서 죽여라 그렇게 하나님이 명령 내리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죠.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본문이 나왔을 때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사실대로 가르치시나요?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리고성과 아이 성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잖아요. 어떻게 그들을 죽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겠어요? 여호수아가 착각한 건 아닐까요?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막 표현하는 겁니다. 이게 모순되는 이야기인거예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고 모두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으로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말하는 성서구절이 서로 모순되는데 거기에 길을 찾아야 되는데 어떤 지평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는 대답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해석학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구요. 그건 사실은 구약성서학자이라든지 성서학자들이 더 이야기를 해야 될 부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서 문자들이 표현하고 있는 표면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어떤 지평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독자들의 지평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요. 유전공학이라고 하는 그걸 통해서 세계를 이해한다고 한다고 하는 등등 여러 가지요. 그런데 이 두 개, 읽는 독자와 성서 텍스트가 융해되어서 완전히 소화되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거예요. 창조적인 설교가 가능한 일입니다.

거기에 중요한 작업을 하는 게 해석인데요. 해석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설교에서는 조직신학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성경구절은, 제가 성서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여러분들이 선생님들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성서구절들은 다 각양각색으로 여러 세대적으로도 그렇고 장소로도 그렇고 각양각색의 하나님 경험이에요. 일치되지가 않습니다. 부분적이에요. 다 달라요. 어쩌면 그거는 퍼즐 조각과 같아요. 흐트러져 있는 거예요. 각각. 어떤 데서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데서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고 이야기하구요.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 여리고성 이야기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것이 거기에 결합되어 있는데 어떤 성서기자들의 고유한 역사적 지평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 것이 신약에서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기독교신앙 신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입니다. 그러니까 이거예요.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대명제잖아요. 동시에 ‘예수도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명제도 있잖아요. 이 두 명제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순,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 하나님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믿음이 바탕에서 그러나 예수 경험, 예수 사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을 경험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데 그 전한 대상이 어느 학자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아이덴티파이 되었단 말이에요. 예수가 바로 하나님으로 인식된 거에요. 초기 기독교인들이게. 그런데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면 또 하나의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를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가요? 맞나요?

하나님은 역사 초월적인 존재이시고 역사적 예수님은 역사 내재적 존재이시니까, 양쪽은 다른 존재에요. 그런데 이게 하나가 된다고 하는 삼위일체의 신비, 이런 것들 세계 속으로 차츰 차츰 들어가는 게 신학공부고 조직신학공부예요. 그런 훈련들이 되어 있어야 여러분들이 흩어져 있는 성경구절들을 연결해서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설교자로서 분명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성서를 해석의 차원에까지 조직신학의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말씀드린 해석에 이르는 요기에서 필요한 공부가 뭘까 세 가지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앞에서 제가 이야기한 거네요. 하나는 역사비평, 성서 텍스트에 대한 Historical critism이 필요하구요. 그건 이제는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이구요. 두 번째는 청중들의 삶을 이해하는 인문학 공부예요. 한일장신대에 오면서 불현듯 김영민 선생이 기억이 납니다. 젊었을 때도 그 분의 책을 좀 애독했어요. 그 분이 신문에 글도 자주 쓰기도 하시고요. 그분이 여기 계셨어요. 몇 년 전에 나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안타깝다 한국 인문학계, 철학계에 귀하신 분이었는데 한일 장신대에 있으면 좀더 한일장신대 이름도 나고 좋았을 텐데 개인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인문학이 뭐냐 하는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인문학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설교를 들어야 될 청중들을 직면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제가 또 그것을 설명하자면 시간이 많이 갈 것 같아요. 천하보다 귀한 하나하나잖아요. 그런데 설교자들은 자칫하면 청중들을 목회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끌어들여서 교회를 부흥시킨다고 하는 거죠. 하나하나를 정말 우주보다 귀한 존재로 생각을 하려면 인문학적 통찰, 신학은 물론 기본바탕입니다만 필요한 거죠.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고 한 말씀드리면 한 영혼의 귀함과 인문학적 공부가 연관되는 거예요. 코엘료가 썼죠. 연금술사라고 하는 책이요.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 거기에 보면 산티아고라는 목동이 금을 찾아가는 겁니다. 나중에 연금술사가 산티아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모래 한 알이 우주다.’ 연금술이라고 하는 것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언어를 습득하는 거다. 보편언어. 오늘 강의의 핵심이 그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언어예요. 그거를 우리가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 그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보편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인태라는 시인이 쓴 시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세요. 짧은 건데 읽어 보겠습니다. 제목이 다음과 같애요. ‘시가 내게 왔다.’ 도구적인 거는 제가 그냥 넘어가구요. 연관되는 문제이니까.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를 이야기하려고 인용하는 겁니다. 성서텍스트가 그거예요. 여러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텍스트 스스로가 하나님의 구원통치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린 그걸 보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게 가고 있어요.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이 확 느끼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저거 무슨 이야기냐 너무 관념적이다 추상적이다라고 들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시가 내게 왔다고 하는 제목입니다. 시 언어 그런 것의 존재론적 세계가 자기에게 오는 그러한 경험을 한 이러한 시인의 시예요.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 버리고 토시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같이 허망한 적요

위의 파르르 떤 달 빛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 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이 시가 내게 왔다.


거부할 수 없이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내게 왔다. 그런 경험과 같은 차원이잖아요. 신탁이에요. 예언자들이 경험한 신탁, 그들은 그게 너무나도 생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거에요. 어떻게 하나님의 말을 직접 듣겠어요. 하나님이 입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신탁의 경험, 어떤 언어가 나에게 왔다고 하는 경험이 너무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생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예레미야, 이사야 이런 예언자들에게 직접 말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 그 신비의 세계의 속으로 들어간 예언자들, 시인들, 그러한 역사적 흐름에 설교자도 있는 거예요. 그런 거 없이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라든 이러한 슬로건 들을 우리 청중들에게 잘 설득시켜서 그대로 살게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좀 속된 표현으로 우리는 유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돼지 앞에 진주라고 할까? 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심적으로 좀 생각해 보세요.

이 언어가 내게 왔다고 하는 이 경험. 이거를 영화에서 제가 최근에 다시 경험했습니다. ‘블랙’이라고 하는 영화요. 보셨죠. 보신 분 있죠. 안 보신 분 있으면 꼭 보십시오. 신앙적인 그러한 주제를 담은, 이 영화의 가상 주인공은 헬런켈러라고 그럽니다.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 느낌이 다시 나오더라고요. 설리반이라고 하는 선생님이 헬런 켈러의 가정교사로 들어와서 가르치잖습니까? 지금 이 이야기가 설교자와 성서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관점에서 그걸 아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설리반 선생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도 안 되는 이러한 헬런 켈러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죠. 문자는 다른 감각기관은 죽었으니까 촉각으로요. A, B, C, D 만져보게 하고 D, Desk 이렇게 해주곤 합니다. 이 아이는 명석하기 때문에 알파벳도 금방 알고 하지만 등등 하지만 그러나 어떤 세계가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따로 따로 놀아요. 세계가 다 흐리멍덩하다고 할까요? 개념, 중요한 단어예요. Concept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님도 엄밀한 의미에서 concept인거에요. 어떤 표상이라고도 하지요. 어떤 개념, 느낌, 우리의 어떤 범주로,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딱 결정되지 않는 그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 대한 컨셉을 확대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그러한 방식으로 왔구요.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개념이죠. 어떻게 보세요. 그게 여러분,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게 하는 그러한 신학적 훈련과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르조나는 셋인데 우시오스는 하나다라고 하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교부들이 위대한 영성가들이예요. 기원후 4세기 안에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다 결정되었잖아요. 그분들은 그냥 앉아서 기도 많이 해서 그걸 얻는 게 아니라 헬라철학, 등등 주변 인문학, 그리고 유대의 어떤 묵시문학을 비롯하여, 지혜문서 등등 총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 생명에 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 시간과 공간과 이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밑바탕에 깔고 아주 고유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확보한 겁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자산인거예요. 우리는 이제 중요한건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데 도달해야 했느냐를 따라가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그냥 정답만 갖고 달달 외우고 있거든요. 그건 죽은 학문이 되고 맙니다. 우시오스가 하나가 본질이, 페르조나가 셋인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나요? 그건 불가능한 겁니다. 이건 하나님 존재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건데.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것,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단어는 여러분들이 써 두었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시고. 보이지 않는 현실성, Invisible Real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 이거 다 알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잡혀요? 세계가 잡혀요? 뭐가 있는걸 아시겠어요? 어떤 사물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물을 저기에 놓으셨군요. 물이라고 하는 사물 있잖아요. 그걸 어떤 때 세수할 때나 그걸 보면서 황홀해 본적이 있어요. 아 그거는 뭐 예술가나 시인이나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지 나는 하나님 말씀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인데 빨리 손 씻고서 기도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세계가, 세계의, 이렇게 말해야 되겠네요. 셍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표현을 빌리면 길들여져 버린 겁니다. 다 당연해요. 세상이. 그래 갖고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늘 낯선 분이예요. 이걸 아셔야 되요. 늘 하나님을 친하다. 친구처럼 지낸다. 나는 그런 분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사람인거예요. 이미 이러한 문제들은 칼 바르트도 이야기하고 신학자들도 다 한 이야기에요.

칼 바르트가 복음주의 신학 입문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 책 꼭 읽어 보십시오. 개론서에요. 번역되어 나왔어요. 이형기 목사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그런데 그 제목이 독일어, 바르트 책인데 독일어, 그게 직역이 되어서 그렇거든요. 복음주의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진보적인 것과는 다른 보수적인, 독일어로는 에방겔리쉐 테올로기. ‘에방겔리쉬’ 하면 ‘카톨리쉬’하고 다른 개신교 신학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신학입문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거를 보수주의 신학이다 그런 뜻으로 생각하지 말고 개신교신학이다 그런 뜻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인제 말년에 쓴 거예요. 노대학자가 이제 에베레스트 높은 산정에 올라가 있는 산정에 올라가 있는 산정에서 주욱 지나온 신학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과연 개신교 신학의 중심이 뭐냐 라고 하는 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는 여러분들, 책상위에 놓고 늘 한번 읽어보셔야 합니다. 설교자의 고민들도 다 들어있고 말이죠. 거기서 신학자의 실존을, 신학자라고 하는 것을 설교자로 똑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설교자는 신학자이어야 되어요. 이걸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이거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신학자가 아니고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말씀, 언어, 그리고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될 그 어떤 분, 그러한 언어와 하나님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깊이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안고 황홀해 하고 두려워하고 설레면서 말씀을 우리가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구도 용맹정진하는 자세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있는 설교를 할 수 있겠어요. 정말 싸구려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하면서 입담으로 청중들을 웃기고 울리고 해서 감수성에 젖는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설교 잘한다고 애기하고 있는 이 풍토에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정말 비극으로 생각하시고 어떤 돌파구를 여러분들은 찾아야 됩니다.

신학자의 실존은 놀라움이다. 하나님을 놀라워하는 경험하는 거예요. 그냥 수사학이 아니에요. 간증의 차원에서 크게 놀라운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어떤 게 놀라는 건가요?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올 때 놀라는 거거든요. 파라오 군대들이 홍해바다에 빠져죽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마른 땅처럼 끌어냈다고 하는 것, 이건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난 것, 이게 하나님의 구원 통치거든요. 이런데서 성서기자들이 놀라구요. 그런 전승들을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로 유지해 오구 있구요. 나사렛 출신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이 아무에게도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이것이 부끄럽고 경멸스러운 것인데 거기에 인류구원의 도리가 시작했다고 하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이 놀라운 것들이거든요. 놀라움, 낯설게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이 물, 사물. 어떻게 액체라는 것이 여기 있을까? 하이데거가 처음 교수 청빙을 받고 간 대학교 쉬트라스부르크인가 아우구스부르크인가? 거기에서 특강을 했는데 그때 주제가 다음과 같은 거였습니다. 왜 존재자들은 존재하고 무, 무 니히츠(nichts)는 없는가? 스피노자 때부터 계속 질문된 겁니다. 철학자들, 인문학자들, 생각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고민하고 학자들처럼 그렇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거를 느끼면서 사는 거죠. 그게 이런 거죠. 아까 물을 이야기했는데 물은 있고 나무의 중간쯤 되는 것은 왜 없을까? 사람은 있고 민들레는 있는데 민들레하고 사람 중간쯤 되는 그 어떤 것은 왜 없을까? 이런 것들이 밥 먹고 할 일없어서 그냥 지적 유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뚫어 보는 거예요. 너무 그게 궁금한 거예요. 실제적으로. 지금 있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헬런 켈러에게 그러한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나 개념이 안 잡혀. 다 세상이 흩어졌어요. 저는 우리의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과정들이 산만해요. 다른 것에 흐트러지는 거죠. 강의에 집중하겠습니다. 30분까지는 마쳐야 되는데 그전에 여러분들의 질문도 받아야 되는데 미리 준비해 주셨다가 아무 때나 손을 드시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흐트러져 있는데 어느 날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마당 한 가운데에 있는 펌프 밑으로 갔습니다. 펌프질을 하면서 손을 대주는 거죠. 그러면서 손에다 Water라고 써 주셨어요. 그 순간에 헬렌 켈러에게 어떤 큰 깨우침이 왔습니다. 아, 늘 알았던 거예요. 늘 스쳐졌던 거예요. 스쳐 지나갔던 그 물, 이거하고 Water 라고 하는 낱말이 따로 놀았어요. water라고 하는 낱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일치가 되지 않았어요. 그 순간이 헬렌 켈러에게 일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언어가 자기에게 온 거예요.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깨달음, 깨우침이었습니다. 정보를 알았던 게 아니라 돈오라고 할 수 있어요. 깨우침을 메타노이아, 즉 회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몇 번 할 거예요.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적게 하는 사람도 있고 안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춘기 접어들면서 세계를 새롭게 보면서 그런 경험도 하고 또 학문적으로나 어떤 영성 이런 쪽으로 훈련을 계속하는 사람들, 성령의 경험이 그런 것들을 우리들에게 열어주는 건데 새롭게 세계를 보면서 층들이, 껍질이 자꾸만 열리는 거죠. 열리는 거예요.

어떤 한국의 인문학자의 말,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가 두텁다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그러니까 들어가 보면 또 뭐가 있어요. 놀라는 거죠. 그렇게 이제 우리들에도, 저는 그것이 정말 영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세계가 열리는 경험인거죠. 헬렌 켈러에게 그게 왔어요. 다음부터 모든 사물들이 헬렌 켈러에게 말을 거는 거죠. 그때부터 이제 그의 사유와 인식, 세계가 기하급수적으로 가속도가 붙어서 모든 것을 꿰뚫게는 되는 거죠. 세계를 이해하는 거죠. 위대한 문필가, 전도자, 그러한 사람으로 되는 거죠. 언어가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경험들입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 정말 성서텍스트가 말을 자기에게 거는 경험이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읽으면 와요. 어떤 저 사람이 알고 하는 소린지. 아 저 목사가 성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지 자기도 알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분간이 됩니다. 제가 도사여서가 아니라 성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부분적으로 주어져 그걸 좀 안다고 할까. 시인과 같은 경험들이 좀 있기 때문에 진짜 시인지 가짜 시인지 구분 되는 거죠. 그런데 아마추어들은 구분이 되지 않아요. 여기에 시인도 있을 텐데요. 그냥 시어, 교언영색, 그러한 것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장난일 수 있어요. 언어 유희일수 있어요. 일상적인 용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시가 있는 거예요.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일반 평신도들은 그게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일단 누가 설교를 하든지 쓰는 용어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종말론적 부활의 성취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들이 뭐 막 나오기 때문에 정말 저게 살아있는, 아는 설교인가 아닌가 그런 구분이 일반 청중, 평신도들에게는 좀 어려운 거죠.

저는 그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거였습니다. 성서 텍스트의 놀라운 세계가 설교자에 의해서 도구적으로 이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교자가 그 성서텍스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 안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들어가는 경험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이 없으면 설교가 대개 실용주의로 떨어지게 되고 마는 거죠. 더 나쁜 쪽으로는 기복주의라든지 교회성장 이데올로기라든지 선악이원론이라든지 그런 것은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그런 쪽으로 해서 청중들을 선동해버리는 사이비 이단교주들에게서 흔하게 볼수 있는 그러한 설교로 나타날 수 있구요.

사이비 이단, 선동이라는 말을 하다 보니 기억나는 설교자가 있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 연세중앙교회인가 윤석전 목사님을 동영상으로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 개인의 영적 경험과 말씀의 깊이를 제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드러나는 것, 언어라는 것은 존재의 집이거든요.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이거는 설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결국은 설교의 근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거기서 벌어지고 있구나.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 슬로건을 전하는 거잖아요. 잘못 된 거는 아닙니다. 결국 그게 우리 설교의 근본이긴 한데요. 그게 결국은 생명의 신비와 성서 텍스트가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통치의 신비라고 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더 멀리 가게 하는 구나.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분에 대한 설교가 저에게는 나쁜 인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뭔가 좀 말하려고 했는데 고정도로 정리를 해야 되겠네요. 나쁜 쪽으로는 좀 그렇구요.

그래도 좀 괜찮은 게 실용주의적인 설교로 가게 되거든요. 지금 제가 어떤 방향으로 강의를 하는지 흐름을 알고 계시겠지요. 성서텍스트의 존재론적 힘에 우리가 사로잡혀야 되는데 그게 없을 경우에. 존재론적 힘에 사로잡힌다고 하는 것은 뭔지 이해하시겠지요. 헬렌 켈러와 블랙 영화, 시인 오인태 씨를 이야기했고요. 그게 잘 안될 경우에 조금 극단적으로는 청중들을 선동해버리는 쪽으로 가게 되고요. 조금 건전한 쪽은 실용주의적인 설교로 가게 됩니다. 고게 미국의 릭 워렌  목사 같은 분이거든요. 정말 마음 좋은 이웃 아저씨와 같은 인상을 갖고 인격적이고 목회자로서 흠잡을 데 없는 그런 분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실망하는 거죠. 그 분 설교의 핵심은 미국 중산층 부르주아적 계급의 시민양성입니다. 그는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설교에서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준법시민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다.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건전하고 상식적이고 그 사회가 요구하는 교양 있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그러한 설교죠. 흠잡을 데 없을 것 같죠. 저는 거기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왜 문제가 많은지는 한국의 비슷한 설교의 예를 들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지금 벌이고 있는 운동이 뭐 설교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도덕성, 도덕 재무장이랄까 그런 이야기거든요. 도덕주의적인 설교죠. 건전한 설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게 틀린 거는 아닌데 뭔가 성서텍스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중심이 바로 그런 걸까 하는 문제 의식 앞에서 ‘그건 잘못된 설교다’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일 예배에 나와서 교장선생님 훈화하는 방식, 아니면 주례사, 아내와 남편이 사랑해서 잘 살고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도 좀 주고 이러한 방식의 처세술과 도덕주의적인 메시지를 듣고 싶은 거는 아닌 거거든요. 그건 실용적인 거예요. 그거도 결국 성서텍스트의 도구화가 아닐까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이라도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들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잘 써야 되니까요.

결국 이러한 문제들, 릭 워렌 목사님처럼 훌륭하신 설교가, 목회자 그리고 사랑의 교회가 펼치는 도덕 재무장 문제 이런 것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뭔가 제가 지금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한 두 마디는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죠. 운만 띄고 넘어가면 뭐가 문제인지를 잘 모르실 테니까요. 좀 제대로 살아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이지 믿기만 하고 똑 바로 서지 못하기 때문에 손가락질 받지 않느냐. 바르게 살아라. 이래야지 좀 변화시키고 우리 교회도. ‘기독교인이 변하면 세계도 변한다’라고 하는 논리로 이야기하잖아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집도 그런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아주 순수하고 귀중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나이브하다 생각합니다. 인문학적인 통찰이 제가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논리가 나오는 게 아니냐는 거죠. 기독교인이 변해도 세상 변하지 않습니다. 옥한흠 목사님도 그런 하소연을 하시던데요. 뭐. 몇십년 동안 목회했지만 하나도 안 변합니다. 신자들 안 변해요. 그리스도인이 변한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원로목사님들에게 자주 들었겠지만 신자들이 아무리 설교해도 변하지 않더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현실적인 인간이거든요. 예수 믿는 것이 변해서 새롭게 살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금년이 칼빈 탄생(?) 5백주년 기념되는 해인데, 칼빈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가된 의예요. 그 용어 들었죠. 전가된 의예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덧입혀졌다고 하는 겁니다. ‘엑스트라 노스’(extra nos), 그러니까 우리 바깥에서 이루어 진거예요. 그러니까 실용주의적인 설교, 선동주의적인 것은 자꾸만 청중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중들을 이용하거나 나쁜 쪽으로는, 아니면 그들을 계몽시키거나 해갖고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거를 제가 다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른 것은 아니라는 거죠. 설교의 중심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죠?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있는 거죠. 하나님의 행위를 봐야죠. 하나님의 행위.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이건 바르트적인 신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이 핵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훈련을 신학교 다닐 때 제대로 해야 성서텍스트를 바르게 읽을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설명할게요. 그래야 여러분들에게 정확히 전달되겠군요. 삭개오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여러분들이 어떻게 설교하십니다. 삭개오 예수님 만나갖고 네 배나 갚고 어떻게 하고 재산의 반을 어떻게 하겠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변화되어서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설교하시나요? 그런 경우가 많을 거예요. 저는 그 본문이 삭개오를 말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죠. 예수. 그 본문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들, 바리새인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을 향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성경 본문에 그렇게 오해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러한 본문을 갖고 여러분들이 어떤 맥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통치를 확보해 낼 수 있는가? 그게 성서텍스트의 해석의 문제인거죠.

그러한 실용주의적인 설교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보자. 그러면 지루해요. 여러분들 지금 설교하시면서 사역하시죠? 대개는요. 학생들이나 청년들 하실 텐데 그거 하려면 똑같은 이야기하고 좀 그렇잖습니까? 새로운 쪽으로 좀 들어가야 되는데 그것이 뭘까요? 물론 오늘 강의의 제목이기도 한데 그걸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케리그마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인거죠. 그의 오심, 그의 십자가, 그의 부활,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 그런 것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죠. 그걸 그냥 공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말고 그게 담아내려고 하는 세계로 들어가야 되는 거죠. 지평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게 여러분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기회가 되겠군요. 예수님의 부활과 창조와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까? A4용지로 다섯 장 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연관될까요? 창조와 부활, 이런 것에 대한 충분한 훈련들, 그런 사유들 이런 것들이 되야 케리그마를 갖고도 설교를 할 게 무진장하게 많아집니다.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재림 이런 관계들 말이죠.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준비가 된다면 다른 이야기 할 시간이 없어요. 설교시간에요. 뭐 거짓말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뭐 하자. 이거는 교회 나오지 않아도 다 하는 거예요. 도덕주의 설교는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배타적인 구원 사건 앞에서 놀라는 경험을 해야 될 주일예배 설교시간에 왜 일반 대학교 교양과정에서 할 만한 이야기들을 하냐 이거죠. 그거는 결국 자기에게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한 영적 세계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설교자의 영적인 자리가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 경구가 어울리나요. 아는 것만큼 보인다. 그 설교자의 영적인 경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성서텍스트는 그에 맞게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요. 그 단계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서 텍스트가 나에게 말을 걸어. 나는 대답해. 그런 단계, 관계 말이죠. 여러분 혹시 선문답이라고 하는 이야기 들어보았어요? 불가에서 학승이 있고 선승이 있어요. 선승들을 제 3자가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를 자기들끼리의 대화, 경지가 있는 거예요. 서로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들은 거기서, 그게 메타포거든요. 어떤 진리를 말하려고 하는 메타포예요. 그들끼리는 통하는 언어세계가 있습니다. 신학도 마찬가지거든요. 성서텍스트는 메타포, 말하자면 어떤 손가락질이죠. 그런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면 늘 뜬 구름 잡는 이야기. 말을 하더라도 자기에게 소화되지 않는 이야기로 머물고 맙니다.

그건 설교자의 영성인데요. 사실 영성이란 말도 얼마나 오해됩니까? 설교자와 영성. 이런 제목으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떤 관계가 있을지. 영성. 이게 도대체 뭔가. Spritual, 혹은 spritual reality라고 하는 이게 뭘까 말이죠. 스피릿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루아흐라고 하는 히브리어, 프뉴마라고 하는 헬라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를 해야 되는데 결국 성서기자들은, 성서전통은 왜 바람과 영을 하나로 이해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촘촘한 이해, 그런 것을 통해 우리는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성을 한마디로 줄이면, 한마디로 할 수는 없죠. 사실은요. 이것도 여러분들이 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언어로 진술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성령과의 공명을 통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생명 지향적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은 바로 그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서는 이게 주술적으로 이해될 때가 많죠. 흥분해서 기사, 기적을 일으키고 이런 것들만 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게 설교자의 영성의 핵심이예요.

에크하르트라고 하는 그 영성, 신비주의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책이 있으니까 읽어 보시죠. 신비주의는 말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그 세계를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고 직관하고 해명하는 일이 바로 신비주의자들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다 신비주의자들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다 신비주의자예요. 사실은. 더 근본적으로 신학은 신비주의입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성인 하나님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질문 있으면 해주세요. 30분이면 딱 끝나니까요. 요거만 읽고 질문 받을게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보다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에 더 관심을 많이 가져야 된다.” 행위보다 되어야 하는 존재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된다. 이 존재라고 하는 말. 이거의 세계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하이데거의 책 읽어 보시고 노자 장자의 책, 이런 것들도 존재에 대한 문제예요. 예를 들자면 무위이무불위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의도하지 않음으로서 못하는 것이 없는 그러한 상태가 도(道)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은 곧 존재를 이야기하잖아요. 행위가 아니라요. 행위를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로서 드러내지 못하는 더 근원적인 세계의 어떤 힘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선하게 되도록 하라. 그러면 그들의 길과 행위는 밝게 빛날 것이다.” 그대들이 의롭다면, 존재론적 변화죠. 사도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피조물이죠. 존재론적 변화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가 전가되어서 우리가. 그러니까 이 칭의라고 하는 거는 실질적인 의로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죠. 인간들은 실질적으로 의로워지지 않습니다. 청중들을 자꾸만 닦달하지 마세요. 청소년들을 자꾸만 뭐라고 하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이것은 존재론적 변화예요. 존재론적 변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에게만 어떠한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들이 의롭다면 그대들의 행위도 의로울 것이다. 성스러움이 직업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다. 일의 종류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거룩하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그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죠. 성자가 된 청소부라고 하는 책, 혹시 읽어 보셨어요. 도서관에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인생살이를 주욱 보낸 후 청소부로 말년을 보내요. 그 사람은 청소하는 행위에 존재전체가 담긴 거예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설교자가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자기 존재를 거는 거죠. 그게 일치가 되면 그게 거룩한 사람입니다.

한 4분 남았네요. 질문한다고 했던 학생. 다음에 채플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끝내야 하겠습니다.

질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게요. 진정으로 다 동의가 되고 제가 만약 설교자로 서자면 그래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해서 제가 그런 것이 없다면 그렇게 시행될 수 없는 거잖아요. 제가 경험한 것으로는 신학대학 내에서도 존재론적인 양태가 다 다르잖아요. 그 사람의 성향이 다 다른데 그렇다면 시인의 성향과 이런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극소수일 텐데요. 사람들이 이런 것을 해야만 설교자로서 그런 것을 갖추었다고 말해야 되는 건지. 안되면 각자의 그건 것에 따라서 설교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정돼야 되는 거지요.

답: 평소에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던 학생인 것 같네요. 학생은 아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성서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에요. 믿습니까? 모두가 다 창조적인 시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시를 읽어주면 되는 거예요. 가능한대로 안 되는 이야기를 자기가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괜찮은 설교를 대신 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 개신교 교역자들은 조금 상황이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들 보다 나빠요.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어야 되겠네요. 개개인이 모두가 위대한 신학자, 영성가, 설교자 존재론적 성서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교회 보편성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놓을 수 있어야 되요. 우리 개신교는 너무 개인플레이가 많아요. 그러지 말고 교회 전체로 나가면 되거든요. 이미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그러한 전통들이 있습니다. 교회력, 교회예전, 성서일과 이런 것들에 의존해서 자기가 다 모르지만 그쪽에 충실하면 되는데 그걸 안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해서라도 신자들을 들들 볶든지 돌리든지 이벤트를 많이 하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것에만 우리가 오로지 매달려 있기 때문에 이게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거든요. 개신교에서는 목사가 교회 부흥시키지 않으면 이거는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구조적으로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한도 안에서나마 자기에게 충분히 되지 않았으면, 예술가들도 처음에 모방이잖아요. 정말 좋은 설교를 읽고 자기도 훈련하고 하면서 자기도 점점 따라 갈 수 있습니다. 혹시 제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있으면 해주세요.

질문: 말씀 잘 들었는데요.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느껴요.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설교가 영성을 닮았다. 영성이 어떤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 있고 또는 없을 수도 있잖아요. 교수님의 간단한 조언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식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되는지

답: 네 기왕 온 김에 사이트를 하나 선전하고 가야 되겠네요. 대구성서아카데미에 들어오면 다 설교도 올라가 있고 그리고 지금 질문한 거를 거기다가 대신 글로 달아서 해드릴게요. 대수성서 아카데미 영어로 dabia.net 라고 하는데 오면 저의 설교비평, 강연, 온라인 강좌 등등이 있고요. 지금 질문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글로 한번 달아 놓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 원우회 종교개혁 특강, 2009년 10월22일, 화, 오전 10:00-11:30)

 

*엠피쓰리 녹음을 워드로 풀어주신 인도의 사티아 김현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용섭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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