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영적 시인이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철학 선생은 많은데 철학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철학 선생은 철학을 학문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가르치는 세계로 들어가지 않아도 자기의 업무를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반면에 철학자는 철학의 세계와 일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철학 행위와 철학적 삶이 하나가 된 사람이다. 철학 없이 그는 존재할 수 없다.

소로우의 이 말은 설교자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는 많은데, 그 말씀과 일치한 설교자는 드물다. 이 말을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거나, 구령의 열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훨씬 근본적인 어떤 사태를 가리킨다. 설교자들이 자기가 전하는 설교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자기가 전하는 신앙 언어의 세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목회와 설교는 가능하다. 사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능력과 감동을 주는 스피치 능력으로 청중들의 종교적 호기심만 적당하게 자극할 수 있으면 목회와 설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말 그대로 종교적인 부화뇌동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기 일어나지 않는가. 

겉모습만 본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청중들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보인다. 신앙적인 포즈가 그럴듯하다. 각종 예배와 기도회, 온갖 종류의 성경공부, 성경 지식을 전하는 여러 이벤트를 비롯해서 교회 행사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뭔가 신앙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조차 한다.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이 마치 신앙의 절대규범인양 강요되고 있다. 한국교회에 신앙 훈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열정들은 종교적 장식품에 불과하다. 여기서 모두를 싸잡아 매도하는 건 아니다. 전반적인 기류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평가는 한국교회에 대한 필자의 편견일까? 

프로이드와 니이체는 당시 유럽 기독교의 정신적 상태를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대중 설교자들의 설교 현장을 보라. 설교자와 청중들은 아멘과 할렐루야, 믿습니다, 축복합니다를 연발하고, 서로 화답한다. 은혜의 도가니다. 파블로프의 개 현상이라고 비유해도 좋을만하지 않은가. 그런 열정만 본다면 한국교회 강단은 성령 공동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교의 내용이 없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을만한 내용이 없다. 단순한 내용을 억지로 반복할 뿐이다. 마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구구단을 달달 외우듯이 구원, 천당, 축복, 기도, 전도, 믿음을 기복주의와 도덕주의로 포장해서 외쳐댄다. 

아무 내용이 없는 설교에 청중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아주 분명하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고, 관심도 없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는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건 아주 실증적인 현상이다. 설교자와 청중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교회를 대표하는 당회원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교회가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 현현이 왜 일반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고 예수 추종자들에게만 나타났는지 질문하는 장로들이 얼마나 있는가? 그런 교회가 있다면 본보기가 될 것이다. 설교자들은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또는 소위 영혼 구원을 위해서 말씀은 열심히 외치는데 실제로는 영혼과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목이 터져라 예수를 전하는데 예수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니, 신자들이 밤새도록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바로 주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니, 블랙 코미디 아닌가. 그들의 실제 관심이 무엇인지는 독자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실 터이니, 여기서는 그만 두겠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꿩 잡는 게 매라는 방식으로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건 관용이 아니라 영적 자학이다. 

두 가지 사실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첫째, 종교적 역동성만으로 목회와 설교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느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웠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와 직결시키면 곤란하다. 그런 일들은 사이비 이단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통일교와 신천지의 종교적 역동성을 보시라. 둘째, 대중 설교자들에 의해서 초대형 교회가 한국에 우후죽순 격으로 출현했지만 한국 기독교 전체는 시나브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옳지 못하거나 내용이 형편없이 빈약한 설교와 신앙 체험은 잠시 청중들을 호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6회에 걸쳐서 위에서 말한 사실을 폭로하는 글을 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가르치는 설교자는 많은데 그것을 아는 설교자는, 곧 그것과 일치한 설교자는 드물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창피한 줄로 모르고 버젓이 행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폭로성이기에 거친 표현이 나오거나, 또 짧은 글이기에 비약이 있더라도 양해를 구한다. 누워서 침 뱉기이긴 하겠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모두 필자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공동의 운명에 처해진 동지들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우선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을 대개는 상투적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이다. 성서에는 물론 그런 표현이 흔하다. 태초에 하나님은 “빛이여, 있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빛을 창조하셨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친구 사이의 대화처럼 묘사된 부분도 적지 않다. 어떤 설교자들은 교회 부지를 매입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가 시청각으로 전달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가? 기독교 해석학의 대가인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1959년 12월20일 남독일 방송국에서 방송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표상할 수 있는가? 말씀하신다고 한다면, 어떤 언어를 사용하시는가? 하나님의 고유한 언어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비밀스러운 번역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가 사람의 언어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반사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번역된 것은 우리가 직접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나 한 것처럼 말하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은 인간의 말이 아니겠는가?(Gerhard Ebeling, Das Wesen des Glaubens, Gütersloher Verlagshaus Mohn, 178쪽)

 

하나님이 사람처럼 성대를 통한 언어를 사용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 진리와 생명의 영이며,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기에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볼 수 없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는 늘 사람이 나누는 말과 글자만을 언어로 생각한다. 그것만큼 큰 착각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오히려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기에는 제한적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공연한 게 아니다. 참된 언어는 훨씬 본질적이며, 창조적이다. 언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다바르’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다. ‘로고스’도 따지고 보면 창조의 능력이다. 세계와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2-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설교자들은 밤안개와 숲이 나누는 언어를 듣는가? 그게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제 1연은 다음과 같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창비 2002, 가을호)


시인은 바람이 라일락나무가지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노래한다. 라일락은 “안돼, 안돼”라고 말한다. 이게 사실일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시인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이다. 또는 이 시의 표현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영적인 태도이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참된 예술가들은 모두가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자. 꽃은 시인들에게 어떻게 말하는 걸까? 산과 강은 예술가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는가? 바람과 대지는 일반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은밀한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신비로운 음성이며, 볼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신비로운 빛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강물이 말하는 걸 듣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위의 설명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보도하는데, 그것을 시인의 시적인 영감과 비슷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거 아니냐 하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성서를 접근하면 그는 ‘죽었다 깨도’ 성서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다. 성서의 언어가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과학책에서 사용되는 사실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에서 사용되는 시어(詩語)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성서의 심층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는 단지 표면적인 사실만 전달할 뿐이지만 성서의 언어는 그것의 심층이라 할 영적인 세계를 담고 있다. 영적인 세계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생명의 세계를 가리킨다. 창조주만이 그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는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질그릇이다. 질그릇의 시각에 토기장이의 창조행위는 신비이며 비밀이다. 토기장이 자체가 비밀이다.(E.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하나님이 비밀이라는 말은 그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야 확연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인 계시를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경험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꽃에게서 실제 인간의 음성을 들으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영적인 감수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서 기자들은 모두가 이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이런 영적인 시야가 트였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거룩한 힘의 움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계시록을 집필한 요한은 밧모섬에서 고독한 실존 속에서 경천동지 할 신비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설교자들은 모두 영적 시인들이며, 영적 예술가들이다.(감리교단에서 목회자를 위해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강단과 목회> 2010년1,2월호에 게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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