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지요?”

 

4월은 사순절이 끝나면서 종려주일과 부활절로 이어진다. 4월24일이 부활절이다. 지역별로 부활절 연합예배가 드려질 것이다. 연합예배라는 말은 좋다. 나름으로 의미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일인 부활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기뻐할 일이 아니겠는가. 부수적인 소득이라면 이런 기회를 통해서 개신교의 가시적 힘을 세상에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 일치를 거부하면서 힘을 보여줘야 할 경우에만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치듯이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 교회 일치와 부활신앙에 실제로 마음이 있다면 서로 다른 교파교회와 강단을 교류하거나, 더 나가서 남한교회와 북한교회가 서로 강단을 교류하는 방식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는지.

부활절은 갑자기 오는 절기가 아니다. 그 이전에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자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역사체험이다. 메시아의 고난, 하나님의 죽음, 무죄한 자의 고통을 가리킨다. 흔히 말하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으며,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지만 당연지사는 아니다. 교회 현장에서 고난과 십자가는 순수 관념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구구단처럼 외우고 말뿐이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불행을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으니 우리에게는 오직 영광과 행복만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신앙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 불행, 가난은 터부가 되었다.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 양쪽으로부터 모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전통에서 볼 때 이런 신앙은 근본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변질이고 왜곡이다.

고난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인 요소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무엇이 고난인지 규정하기도 힘들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 수준의 삶을 요구할 수도 없다. 문제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고난과 가난에 대한 혐오와 기피다. 성공과 출세가 신앙의 기준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동남아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설교가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4월 한 달 동안 우리는 고난과 영광,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

 

2011년 4월3일/ 사순절 넷째 주일

에베소서 5:8-14/ 빛의 자녀, 빛의 열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가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gnosticism)는 세상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으로 접근했다. 이런 시각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그런 틀로 규정될만한 요소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성서도 천사와 악마라는 표상을 언급했겠는가. 영지주의 흔적은 신약성서에서 적지 않게 나온다. 그 핵심은 빛과 어둠이다. 빛은 생명의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메타포다. 물리적으로도 타당한 말이다. 세상은 낮과 밤이, 즉 빛과 어둠이 반복된다. 이 사실이 고대인들에게는 빛의 문명에서 살아가는 현대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경험되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를 빛이라고 묘사한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서 생명의 빛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는 생명이고 빛이다. 그 빛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빛 자체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뿐이다. 이는 곧 생명이 자신들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설교자는 더 깊고 풍성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기자는 이 사실을 과감하게 전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빛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예수만 빛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빛이라고 한 이유는 ‘주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어떤 근거가 있는가? 어떻게 ‘주 안에’ 들어가느냐가 관건이다. 이 문제는 오늘 설교의 해심 주제가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겠다. 설교자 각자가 생각하기 바란다.

지난 날 어둠이었다가 이제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는 사실은 밖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 빛은 내면적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가르침도 밖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다. 이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쿰란 교도들처럼 사회와 단절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내면의 빛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만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한다면 ‘주 안에서 빛’이라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명해야한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는 이미 빛이 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주 안에 거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주 안에 거하는 이들이 빛을 드러내야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신앙을 배울 수도 있다. 본문에 따르면 빛을 드러낸다는 것은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빛의 열매를 에베소서 기자는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라고 주장한다.(9절) 이 세 조항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착하게 사는 게 옳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냥 착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들이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구절은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미가 6:8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에베소서 본문이 말하는 아가도수네(선)는 이웃과의 선한 관계를, 디카이오수네(정의)는 올바른 행위를, 알레테이아(진리)는 총체적으로 도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이 사람에게 가능한가? 사람이 이런 삶을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악한 힘들이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빛의 자녀라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에도 그런 고민이 그대로 나타난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육체의 일이라고 규정한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술취함, 방탕함 등이다.(갈 5:19-21) 이런 일들로 인해서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육체의 일은 에베소서에서 어둠의 일로 표현된다. 은밀히 행하는 것들,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나열했다.(갈 5:22,23) 에베소서가 빛의 열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려고 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빛의 자녀라는 사실이 절실한 것만큼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도 절실했다는 의미이다.

오늘 구체적으로 빛의 열매는 무엇인가? 또한 우리가 피할 뿐만 아니라 꾸짖어야 할 어둠의 열매는 무엇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어둠이 빛을 가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식별하기 힘들다. 기업가들이, 교육자들이, 노동자들이, 학생들이 빛과 어둠의 열매를 완전하게 가려내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빛이 열매이고, 생명을 파괴하는 일은 어둠의 열매이다. 이런 설명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청중들도 있을 것이다. 모른다면 결국 ‘잠자는 자’이다.(5:14) 빛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를 느끼려면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 길밖에 없다.(5:14b) 설교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리얼하게’ 전할 수 있을까? 설교자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2011년 4월10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

에스겔 37:1-14/ 여호와의 능력을 보리라!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기 전부터 직후 10년 동안 활동한 선지자이다. 격동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기이다. 그는 마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민족이 일본의 손아귀에 빠져들었던 운명과 비슷한 일을 목도했다.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감을 느꼈다. 하나님이 선민인 유대의 몰락을 왜 허락하시는지에 대해서 수없이 물었을 것이다. 앞으로 유대 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지, 유대 민중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지자들은 고난의 역사를 직면한 이들 아닌가. 그런 와중에 그는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본문인 겔 37:1-14절이다.

그 내용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설교자 각자가 적당한 분량으로 설명하면 된다. 전체 구도만 보면 다음과 같다. 1-10절은 골짜기에서 본 환상에 대한 설명이고, 11-14절은 해설이다. 환상은 골짜기에 가득한 뼈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한 에스겔의 말에 따라서 생명을 얻고 큰 군대를 이뤘다는 것이다. 해설은 이런 환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날 운명이라는 것이다. 해설을 통해서 독자들은 에스겔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흡사 무덤과 같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게 이 환상의 핵심이다.

여기까지는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설교자가 아니라 어린이 교회학교 교사라 하더라도 대략 알 수 있다. 죽음과 같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화를 곁들이면 한편의 설교가 될 것이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마른 뼈가 무엇인지, 무덤을 열고 나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도 있다. 경건생활을 하지 않으면 마른 뼈가 될 것이며, 거꾸로 경건 생활에 충실해야만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관점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목사가 교회학교 교사 수준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본문의 깊이를 더 파야한다. 우리의 신학적인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텍스트의 진수를 그들에게 열어주기 위해서 최소한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깊이 들어간 정도만큼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핵심 개념이 무엇인지 먼저 포착해야 한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 지적한 그대로 마른 뼈로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 항목이 더 중요하다. 첫 항목은 두 번째 항목을 말하기 위한 조건이다.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에스겔이 민족의 해방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능력을 거론한 것이라고 말이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그 여호와가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에스겔은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바벨론 해방과 고국 땅을 증거로 삼을 뿐이다. 무엇이 우선적인 것인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혼동되면 결국 성서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

조금 더 설명하겠다. 선지자들의 구체적인 예언은 틀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의 세계의 중심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지자들도 역사를 잘못 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건 당연한 말이다.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신다는 메시지는 결코 잘못된 적이 없으며, 잘못될 수도 없다. 선지자들이 잘못 볼 수도 있는 그런 구체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으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잘못 전한 건 아니다. 그는 여호와가 능력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마른 뼈가 생기를 얻어 삶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도 거의 믿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라는 에스겔의 신탁은 옳다. 에스겔의 선포를 승리주의 신앙으로 호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여호와의 능력을 우리의 희망사항이 이뤄지는 도구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의 능력은 여호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실현될 뿐이지 사람이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의 전형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본다. 예수의 십자가 운명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도 예상하지 못했고 헬라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일으키시는 구원 능력에 집중하며 살아갈 준비를 하도록 영적인 시야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막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교자가 실질적으로 알고 있어야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2011년 4월17일/ 종려(고난) 주일

마태복음 26:14-25/ “나는 아니지요?”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헬, 기대어 누우려니와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의 수난전승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의 하나가 가룟 유다의 배신이다. 그 배신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객관적인 자료로 증명해낼 수는 없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정설로 자리를 잡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배신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주장도 분분하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 삼십은 소소한 액수다. 그런 정도의 돈으로 자기 스승을 배반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충돌했기 때문이라거나 예수의 메시아적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였다는 의견들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수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의 역할은 미미했다. 제사장의 사병(私兵)들이 예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춘 것뿐이다. 유다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병들이 예수를 체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전승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이 미묘한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이다. 배신은 유다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해당된다. 네 복음서가 이 사실을 적시한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이것에 비하면 유다의 행위는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베드로는 훗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를 부인했지만 어느 정도 용납될 수 있는 행위로, 반면에 유다는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배신자로 지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라는 자연인 한 사람의 배신보다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에 만연한 배교 행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설명을 설교 시간에 자세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대략적인 윤곽은 말해도 좋다. 청중들도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던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성서텍스트의 중심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 전승의 핵심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배교 행위라는 사실을 두 번에 걸친 “나는 아니지요?”라는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번은 제자들 전체에 적용된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응한다. 다음은 유다 개인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유다가 똑같이 반응한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양쪽 모두에게 배신의 잠재적 가능성은 열려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일반 신자들에게도 이 가능성은 열려 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배신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계속 그런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그 고민이 가룟 유다 전승으로 표출된 것은 아닌지.

오늘 설교자는 이 본문을 어떻게 오늘 청중들의 삶과 연결시킬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본질을 외면하는 행태는 바로 배교, 배신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럴 가능성은 교회를 등한히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한 이들에게도 열려 있다. 이 대목에서 설교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은 재림의 그리스도를 하늘로 돌려보내고 싶어 한다. 한국교회의 부도덕성과 분열과 한기총의 돈 선거 등도 역시 배신의 단면들이다.

설교는 단순히 청중들의 반성을 끌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나는 아니지요?”와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라. 예수의 십자가는 직접적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간접적으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배신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더 크게 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배신이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민중들이, 그리고 당시 로마 제국이 총체적으로 연루되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단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다를 게 없다. 이런 일은 오늘도 반복된다. 경쟁력 제고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오늘의 신자유주의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순종이자 배신 아닌가. 우리 각자는 이런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면서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비겁하고 야비하고 영악하다. 설교자가 이 설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주제는 예수에게 일어난 배신이 인류 운명이라는 사실과 지금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실존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비루한 역사를 헤치고 구원의 길을 내셨다.

 

2011년 4월24일/ 부활절

요한복음 20:1-18/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금년에도 부활절이 왔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설교자들은 이런 특별 절기의 설교를 힘들어한다. 그중에서도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보다 부활절 설교를 더 어려워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설교자들이 부활 신앙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부활 전승의 실체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똑같은 이야기이다. 부활 신앙에 관심이 없으니 그것의 속살을 알 수 없으며, 모르니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부활에 관한 설교보다는 청중들의 세속적인 열망을 부추기는 설교에 치중한다. 부활 설교를 하는 경우에도 부활 사실을 건조하고 안일하게 외치기만 한다. 부활 영성이 없다는 증거다. 부활 영성이 없으니 부활 전승의 깊이로 들어갈 수도 없으며, 당연히 들어갈 마음도 먹지 못한다.

복음서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나오지 않는다. 산만하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수의 부활은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생명의 선취(先取) 사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는 부활 전승이 네 번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 도마, 일곱 제자들의 경우이다. 이것을 종합한다고 해서 부활 이야기가 완전히 재구성되는 게 아니다.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복음서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첫 증인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부활 전승에서 남자 제자들은 별로 큰 역할을 못했다는 의미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여자들의 이름에도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막달라 마리아만은 일치한다.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달린 부활 사건이 한 여자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차원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취약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경험이 당시의 세계관을 외면해도 좋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 부활은 어떤 사실, 또는 어떤 사건인가?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1) 사람들이 예수의 시체를 치웠다. 빈무덤을 본 마리아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겠나이다.”(요 20:2)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만으로 부활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2) 마리아가 동산지기를 예수로 착각했다.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4) 복음서기자는 당시의 이런저런 소문을 의식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이런 소문을 단숨에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역사에서 유일회적으로 예수에게만 일어난 사건을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나열하고 나름으로 부활의 타당성을 논증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논증이 복음서가 말하는 부활 전승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녀는 자기에게 말을 건 이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가 ‘마리아야!’ 하고 소리를 듣고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몰랐다. 죽은 이가 이제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를 보았으며, 주께서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전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를 ‘본’ 사람을 대표한다.

초기 교회에는 본 사람과 못 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공동체를 이루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본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못 본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본 사람들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본 사람의 역할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지 못한 사람들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구약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부활의 주를 믿을 수 있었다. 도마 전승에 따르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고 한다.

지금 우리도 모두 부활의 주를 못보고 믿는 사람들이다. 못보고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여기서 무조건적인 믿음이 필요한가? 이런 내용으로 설교가 가능한지, 그리고 설교의 결론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는 각자가 더 생각해보기 바란다. 여기서 핵심은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진술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더 이상 볼 수는 없다. 마리아의 경험에 우리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이 말은 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복을 얻게 될 것이다.(설교공부, 2011년3월, 기독교사상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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