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신다!

 

금년 2월의 네 주일은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부터 여덟째 주일에 해당된다. 주현절(epiphany)은 성탄절과 사순절 사이에 놓여 있는 절기로 예수께 신성이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아기 예수를 동방박사가 방문한 사건(마 2:1절 이하), 예수의 정결의식(눅 2:22 이하), 또는 예수의 세례(마 1:9-11) 전승이 이에 해당된다. 각각의 전승은 예수의 신성을 직간접적으로 보도한다.

세계교회와 더불어 우리는 2월 한 달간 주현절을 기억하고 그것의 영적 현실에 참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설교자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 또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더 줄여서 이렇게도 질문할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간단한 게 아니다. 어느 유대교 학자는 그리스도교를 향해서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했을 텐데, 예수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옳은 지적이다.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폭력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사람의 교만과 절망도 끝나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무슨 근거로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에게 신성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한국 교회가 제시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예수를 만난 경험이다. 소위 예수 영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경험의 차원으로만 말하면 사이비 이단 추종자들이 월등하다. 사람의 경험은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 된다. 또 어떤 이들은 삶의 변화를 말한다. 삶의 변화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의 충분한 근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과 이념들이 세상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축귀와 치유도 뾰족한 근거는 아니다. 어디서나 손쉽게 만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묻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의 근거는 무엇인가? 필자는 지금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지 않겠다. 뒤에서 부분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신학적으로 완전한 대답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종말까지 이어져야 할 신앙적 화두라 보는 게 옳다. 어쨌든지 오늘 설교자들은 주현절이 담지하고 있는 신학적인 무게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이 있어야만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최소한 들어갈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2011년 2월6일/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마 5:1-12/ 가난한 사람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12절은 산상수훈의 전문이라 할 수 있는 ‘팔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3절에서 10절까지 각각의 절이 한 항목씩 여덟 개를 거론한다. 11절도 또 하나의 항목에 포함시킬 수 있긴 하지만 문장 구조로 볼 때 제외시키는 것이 옳다. 앞의 팔복 문장은 복 받을 자를 3인칭으로 다루지만, 11절은 2인칭으로 다룬다. 11절은 팔복을 제자들의 실존에 적용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달리 각각 네 개 항목으로 복과 화를 다루고 있다.(눅 6:20-2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설교 앞부분에서 필요한 만큼 비교 분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가난’이다. 누가복음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지만 마태복음은 이를 약간 비틀어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양쪽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심령, 즉 마음까지 가난하게 된다. 마태복음이 거론하는 나머지 항목도 대다수는 가난과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도 결국 삶의 무게에 눌린 가난한 자라고 보아야 한다. 팔복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명제에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말인가? 이것을 설교자가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다수 설교자들은 가난을 주제로 설교하지 않는다. 기복주의적인 설교가 주를 이룬다. 그들이 외치고 있는 복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그런 설교가 효과를 낸다. 그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헌금과 기도까지 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아무리 뻔뻔스럽게 부(富)를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가난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는 못한다. 예수를 잘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세태는 가난의 세습까지 거론되어야 할 실정이다. 설교자들은 가난의 현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종의 편법이다. 하나는 지금 가난해도 믿음만 좋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잘 살게 된다는 주장이다. 신앙적인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기복주의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다른 하나는 믿음 생활을 더 잘 해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도록 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가난이 불신앙의 결과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강단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축복에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조금 의식이 있는 설교자들은 소위 ‘청부론’을 내세운다. 도대체 깨끗한 부라는 게 가능할까? 설교자들은 이런 부분을 신학적인 차원과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들이 가난한 자의 복을 가난에 대한 미화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삶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은 실제로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처럼 탁발수도승이 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불편한 세상에서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팔복이 말하는 복의 실현은 미래형이다. 문법적으로도 첫째와 여덟 번째 복을 제외하면 미래형이다. 첫째와 여덟 번째 항목은 천국을 소유한다는 약속인데, 천국은 지금 당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 두 항목도 역시 미래의 차원이다. 가난한 자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런 말은 지금 당장 부자로 살기를 원하는 청중들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것이다. 설교자는 이런 부분에서 청중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청중들의 영적 관심을 미래로 돌려야 한다. 신약성서가 바로 그 종말론적 미래를 생명이 완성되는 때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도 역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자의 복도 당연히 미래에 실현된다고 봐야 한다.

그 미래는 이미 현재에 개입되어 있다. 종말이 이미 현재에 돌입해 있듯이 말이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둘 대상이 없는 이들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만 희망을 거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역설적인 자유다. 이 자유를 확보한 사람은 이미 복이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화 있는 사람들이다.(눅 6:24, 25)

위의 설명은 그것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팔복이 예수의 약속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가난한 자의 복을 주장했다면 단지 값싼 위로에 불과하지 복음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한 사람이 이 사실을 진리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약속을 그의 운명과 함께 받아들인다.

팔복을 예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보이는가? 이것은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는 소극적으로 부에 대한 의존성을 거부(축소)하는 것이며,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2011년 2월13일/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신 30:15-20/ 하나님이 생명이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행한 설교라고 한다.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행해진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보면 이 문서는 연대기적으로 훨씬 후에 일어났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명기만이 아니라 구약의 거의 모든 문서는 바벨론 포로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모세오경은 물론이고, 많은 예언자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으며, 성문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파멸은 성서기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하게 했다. 하나는 자신들이 믿고 따른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능력이 크신 분이라면 자신들이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찾은 대답을 가리켜 신명기사관이라고 한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 것이며, 말씀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면 죽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오늘 본문도 16절과 18절에서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신명기사관은 옳은가? 설교자는 일단 이런 질문의 지평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설교자가 들어간 깊이만큼 성서의 세계는 열릴 것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면 흥하고, 우상을 섬기면 망한다는 신명기의 진단은 정확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흥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도 근동의 패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설교자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구약의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설교자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성서텍스트의 은폐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 구약의 표면적인 진술을 그대로 전하게 되면 성서해석의 아전인수로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잘 사는 이유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찾고, 동남아 국가들이 못사는 이유를 우상숭배 탓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제국의 폭력이 고대 아시리아, 바벨론, 또는 로마나 오늘의 미국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도 이런 정치 경제적인 힘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신명기사가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쑥대밭이 된 자신들의 운명을 역사적으로 반성하는 중이다. 국가의 운명은 단순히 정치나 경제 논리차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핵심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로, 또는 바알과 아세라와 몰록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상의 본질은 동일하다. 풍요와 다산에 대한 약속이다. 우상숭배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거는 행위이다. 풍요와 다산은 사람이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도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우상을 자본주의에서 발견한다. 자본 숭배와 금송아지 숭배는 다를 게 무엇인가? 오늘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름만 그리스도교 신앙을 붙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우상숭배에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흔하게 듣는 말이지만 설교자가 이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는 얼핏 보면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호와 신앙도 생존과 번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표면적인 것이다. 여호와 신앙은 불가시적인 것에 근거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단지 약속만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우상숭배는 실증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차이인데, 다음과 같다.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 통치에 의존한다면, 우상숭배는 안전과 번영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여호와 신앙에서 번영은 부차적이고, 하나님이 우선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 규례, 법도를 지켜야 했다.(16절) 그래야만 창조자 하나님의 소유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여호와는 바로 그들의 생명이다.(19절) 정리하면,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며, 우상숭배는 물질적인 토대가 바로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매달리는 삶의 태도이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파멸된 것은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았다.

설교자는 위 본문에서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해야 한다. 생명 지향적 삶의 태도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신명기가 본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물적인 만족만을 맹렬히 추구하는 이 시대에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과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들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분발이 필요하다.

 

2011년 2월20일/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마 5:38-48/ 원수사랑, 가능한가?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위 본문은 소위 ‘다섯 반명제’ 목록(마 5:21-48) 중에서 넷째와 다섯째 항목에 속한다. 마태복음은 이 반명제를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야 할 마태복음 기자의 이런 언급은 예상 밖이다. 여기에는 마태공동체의 고민이 놓여 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이어진 유대 전쟁은 유대교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든지 아니면 유대교 밖으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당시에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그리스도교는 일찌감치 유대교 밖으로 나갔다. 지역적으로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었지만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한 유대 그리스도교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결국 유대교의 요구를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율법의 근본인 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율법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오히려 율법보다 더 절대적인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반(反)명제로 표현된 것이다.

두 항목을 나누어 검토하자. 하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이다. 이것은 원래 좋은 뜻으로 시작된 율법(규범 윤리)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정신이기도 한다. 이런 법의 강제규정이 없으면 사람은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앙갚음을 한다. ‘눈은 눈으로’는 정의 사회를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는 악한 자를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한다. 정의를 넘어서는 윤리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이런 절대적인 무저항, 비폭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단적인 예가 성전(聖戰) 개념이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교인 가톨릭과 개신교끼리도 전쟁을 벌이곤 했다. 무저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비주류에서만 받아들여졌다. 퀘이커 교도나 아미쉬 종파,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폭력적인 사태 앞에서 무저항이 만능인가? 개인들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이다. 여기서 원수는 물론 이방인이다. 유대사회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를 돌보라는 가르침도 많다. 고대사회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도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이스라엘이 근동 지역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적자생존의 차원에서 타당한 윤리이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진멸하라는 명령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한 근거로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원수사랑은 과연 가능한가? 그렇게 노력하라는 당부일 뿐이지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씀인가?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원수는 누군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인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대적하는 이인가? 공공의 적이나 흉악범인가? 북한이 원수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이다. 첫째, 실제 삶에서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을 붙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의 영혼은 지친다. 둘째, 정의로운 투쟁을 망설이게 만든다. 히틀러를 술 취한 버스 운전자로 보고 승객을 살리기 위해서 일단 폭력적으로라도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실천했던 본회퍼에게 원수사랑 운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원수사랑은 도대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에 대한 완료된 대답은 아직 없다. 설교자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나름으로 답을 제시해야 한다.

필자가 볼 때 원수사랑이 말하려는 핵심은 48절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이 처한 삶의 자리가 유대교의 압박이라는 앞에서의 언급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 있었다. 율법 폐기론에 떨어질 위험성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온전한 의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이 하늘의 아버지처럼 온전할 수는 없지만 온전해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 이 긴장을 간단히 털어내지 않고 실존적으로 끌어안고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여기서 설교를 마감해도 좋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함이, 즉 칭의가 이런 영적 긴장감의 토대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도 있다. 설교의 진도를 어디까지 나갈 것인지는 설교자가 선택할 일이다.

 

2011년 2월27일/ 주현절후 여덟째 주일

고전 4:1-5/ 주께서 오신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독특한 위치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칭 사도였다. 예수의 생전에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열두 사도들에 비해서 정통성이 훨씬 떨어졌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역동적으로 예수의 사도로서 자리를 지켰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그는 베드로와 바나바의 위선을 책망할 정도였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도 사이가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문제 인물로 낙인찍혔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사도행전 보도는(행 16:9,10) 유대 그리스도교의 세력에 밀려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심한 갈등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여러 파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파가 그것이다.(고전 1:12) 이런 문제를 바울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고전 1-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나선 사람들이 파당을 나눈다는 사실이, 더구나 대립적으로 나뉜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웠겠는가. 바울은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일종의 자기변호인데, 그것이 위 설교 본문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충성이 그것이다. 충성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이 용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작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기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한다.(3절) 대단한 영성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자신감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책할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에 바울의 고유한 인식론이 자리한다. 사람의 인식과 판단은 잠정적이다. 결정적인 판단은 주님이 몫이다.(4절)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5절) 주가 어둠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한다. 고전 13:12절에서도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주가 오신다는 말, 감춰진 것, 판단 유보가 무엇인가?

설교자는 판단 유보를 현상학의 태두 E. 후설이 말하는 ‘판단 정지’ 개념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도 알아야 한다. 그 문제는 각자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주께서 오신다는 말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니까 간단히 짚어야겠다.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설교할 내용이 없으며, 설교의 방향도 왜곡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재림을 말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재림의 주는 바로 2천 년 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를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서른 살 초반의 역사적 예수로 다시 온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들림을 받아(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 즉 부활의 세계로 들어간 자다. 그가 온다는 말은 부활 생명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 순간이 오면 잠정적인 인식은 모두 제거된다. 세상의 자연과학적 판단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의 인식론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감춰진 것, 여전히 비밀인 것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판단은 이렇게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시시비비가 무용지물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 논쟁에 치열하게 참여했다. 예수도 안식일 논쟁에서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바울은 온 몸으로 유대교 및 유대 그리스도교와 싸웠다. 논쟁 없이는 진리가 세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독단적인 태도에 있다.(고전 4:6) 한국교회의 타종교 비난 같은 것들이 독단이다. 진리에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과 독단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것은 극과 극으로 다르다. 오늘 설교자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결론적으로 ‘주께서 오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모든 인식론적 토대를 설정하는 것이 이 설교의 핵심이다. 설교자들은 그것을 밀고 나갈만한 해석학적이고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이럴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으며, 세상의 판단으로부터, 또한 바울의 표현대로 자신의 인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겸손과 자유가(K. Barth,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20쪽 참조) 주현절 영성의 핵심이 아니겠는가.(설교공부, 2011년1월, 기독교사상 2011년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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