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해방, 부활, 안식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참석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이 몸에 밴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주일공동예배만큼은 빠뜨리지 않는다. 좋은 습관이요, 좋은 전통이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우리는 훨씬 많은 헌금을 드린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리라. 주일 성수와 십일조 헌금은 한국교회를 읽을 수 있는 키워드다. 막강한 인적 토대와 물적 토대로 한국 교회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기간에 큰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큰 교회는 모두 한국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 여러 제삼세계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이 선두를 차지한 현상과 비슷하다. 기독교의 성장과 한국의 경제성장은 샴쌍둥이와 같다.

갓 태어난 유아가 크지 않는다면 병들었다는 증거다. 성장은 생명의 본질이다. 문제는 무한정의 성장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죽을 때까지 계속 키가 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라 강박증이다. 한국 경제 규모는 세계 15위 권이다. 개인 소득은 2만 달러 규모이다. 이제 만족할 만도 한데 대통령을 비롯해서 모든 국민들이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있다.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을 원한다는 것인지. 정치인들은 이런 욕망을 자극해서 표를 구한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면서도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두 배 더 잘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욕망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평생 돈 버는 것에만 마음을 둔 사람이 늙어서 그런 마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도 물리학이 말하는 관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향해서 뭐라 말할 처지가 못 된다. 경쟁력 제고가 최고의 가치로 작동되는 시대정신과 투쟁해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의 논리를 직간접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목회 패러다임이 총체적으로 교회 성장만능론에 빠져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필자는 여기서 교회 성장에 대한 찬반 논쟁을 전개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서 충분할 정도로 논의되기도 했고, 또한 딱 부러지게 결말이 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성장만능론, 또는 성장일원론으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 노릇을 못하며, 신자들과 목사들이 영적 피로증에 노출되었다는 것만은 짚어야겠다. 교회 노릇은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행하시는 존재론적 구원 사건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온통 정신이 빠져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연민이다. 영적 피로증이라는 말은 영적인 쉼이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심층적 인식과 찬양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참된 안식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에 다툼이 얼마나 많은가? 이게 모두 안식이 없다는 증거들이다.

다른 생각을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매일 기쁘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앙을 성찰할 필요는 있다. 통일교나 신천지 같은 사이비 이단에 유혹된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이 거기서 참된 구원을, 즉 참된 안식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자학에 빠져서도 희열을 느끼는 동물이기에 안식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 많다. 일주일 동안 피곤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주일에 하루 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디 정상으로 보이겠는가. 이런 문제는 종교현상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니까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대신 교회가 말하는 안식이, 영적인 쉼이 무엇인지를 말하겠다. 좋은 보석감정사가 되려면 진짜 보석을 계속 관찰하라는 말이 있듯이 참된 안식을 제공하는 기독교 영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기독교의 본질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주일예배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주일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린다. 주일은 안식일이 지난 첫 날이다. 초기 기독교가 언제부터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지는 문헌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기독교가 로마정부에 의해서 공인되고,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로마 황제가 주일을 공휴일로 정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주일에 예배를 드렸지만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로마 황제들에 의한 일이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결정된 4세기의 공의회를 로마 주교인 교황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소집했다는 사실에서 기독교와 로마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 교리와 교회 정치가 총체적으로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유는 이미 그런 방식이 아니면 로마를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의 세력이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독교의 주일 예배가 자리를 잡았다. 뛰어난 정치인들은 늘 대중주의적이다.

기독교의 주일 예배는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과 연결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이었다. 바울도 선교 지역에서 안식일을 택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이나 기도 처소를 방문하곤 했다. 안식일은 십계명 전승에 속한다. 십계명은 출애굽과 신명기에 나오는데, 안식일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다. 출애굽기의 안식일 개념은 창조 사건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한다.(출 20:8-11) 신명기의 안식일 개념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출애굽기의 안식일 개념은 창조이고, 신명기는 해방이다. 창조 영성과 해방 영성이 곧 안식의 단초라는 말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자.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서 시작된다. 사도신경이 창조 사건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결국 우리는 피조물이며,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상투적인 것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창조는 추상적인 교리로 남고, 인간의 업적이 모든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안식이 불가능하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면 불안하다. 목회나 신앙생활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보다는 자신들의 업적이 상위에 자리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교회 노릇을 바로 하고 영적 피로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창조 영성의 회복이 급선무이다.

안식일에 대한 출애굽 전승이 말하는 해방 역시 인간 구원의 근본이다. 구약성서는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귀환을 하나님의 행위로 말한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주변 제국에 의해서 늘 시달렸던 그들이 하나님을 해방자로 고백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또한 해방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은 손에 닿지 않았지만 이미 당도한 하나님의 구원을 고단한 역사에서 희망한 것이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영성이다. 창조와 해방의 영성에 근거해서 십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곧 쉼이다. 노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종과 나그네도 노동을 멈춰야 한다. 심지어 가축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열악한 삶의 조건에 놓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만은 완전히 쉬라는 것이다. 십계명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의 노동해방을 선포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그것을 모방한 것뿐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해방의 영성인 안식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경험했다. 그들은 이제 굳이 안식일이라는 날짜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삼일 후는 바로 주일이었다. 부활 경험이 왜 창조와 해방 영성의 토대인가? 부활은 임사체험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 행하신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 아무도 창조의 능력이 없으며, 아무도 창조의 실체를 모른다. 무(無)와 유(有)의 적대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이외에 없다. 마찬가지로 부활은 세상에서 반복 가능한 사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생명 사건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창조의 능력을 경험했다. 거기서 거들은 참된 안식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일의 출애굽 전승이 가리키는 해방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제 그를 믿는 사람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부활은 곧 죽음의 극복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케리그마이다.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경험에서만 참된 안식이 가능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배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된 안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인식하고 경험한 그들은 이제 주일예배 공동체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런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른다.

창조, 해방, 부활 영성에서 말하는 안식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경쟁 만능의 세상살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도 가능하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이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일반 신자들이 지금 당장 수도승처럼 살 수는 없다. 아이들과 먹고 살려면 돈벌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아무리 주일예배 공동체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부단히 창조적인 일을 만들어내야 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필자는 그런 치열한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신앙의 기초이며, 신앙의 방향성이다. 자신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되 근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은 구원과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고 거기서만 참된 안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며, 신뢰이고, 결단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 칭의론에서도 분명해진다. 바울과 루터가 그렇게 강조한 칭의(稱義)는 믿음으로 주어진다. 생각해보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곧 생명이며, 구원이고, 영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의가 주어진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자기의(義)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벼운 멍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무거운 짐은 세상살이의 고통이 아니라 종교적인 멍에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신앙의 본질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로워졌다. 무늬가 달라진 게 아니라 근본이 달라졌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처럼 종교적인 수고와 짐을 지고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참된 신앙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를 여기서 일일이 말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 예만 들자. 수 년 전에 아무개 목사가 쓴 <게으름>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만 보고 게으름에 대한 미학을 다뤘다고 생각했지만, 필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의 게으른 삶을 훈계하고 있었다. 훈계 정도가 아니라 닦달하고 있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게으르게 사냐, 하는 투였다. 그는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복음과 은총을 선포한 교회 지도자가 복음과 은총을 부정하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서가 말하는 창조, 해방, 자유, 부활, 칭의, 종말,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는지.

끝으로, 한 마디만 하자. 한국 교회는 일을 대폭적으로 줄여야 한다. 신자들을 뺑뺑이 돌리듯이 쉴 새 없이 교회 자체 프로그램으로 몰아넣지 말았으면 한다. 모든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안식일, 즉 주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일에 시달린 사람은 정작 일해야 할 세상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교회에서 영적인 안식을 누릴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한 세상을 위해서 명실상부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복음과 상황, 2010년 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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