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그 사실을 단순히 암송해야 할 명제로만 전달한다. 이를 위해서 창조과학계 유에 속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신비를 문학적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기만 하면 그 이외의 모든 것도 믿을 수 있다거나, 거꾸로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책망할 수도 있다. 상투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첫째, 기도해야 한다. 둘째, 성경을 읽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 그 이외에도 더 많은 항목을 나열할 수 있다. 이런 요령만 알고 있으면 설교는 어렵지 않다. 설교의 성패는 설교자의 진정성과 말하는 기술에 달려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설교다. 말씀의 정곡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설교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에 길들여지면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물론 이런 설교에서도 청중들은 나름으로 은혜를 경험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은혜를 받는 것처럼 포즈를 취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유혹이다. 청중들의 영적 눈높이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설교자의 영성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청중들이 경험하는 은혜와는 별도로 설교자만의 영적인 길이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텍스트의 표면에 머물지 말고 그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마치 맑은 물을 마시려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위 본문을 다시 생각해보시라. 저 문장을 제시한, 그리고 그것을 전승한 사람들의 영적 떨림에 관해서 생각해보시라. 그들은 ‘태초’를 생각했다. 우주의 시작이다. 물리학에서는 그것을 빅뱅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대폭발이 일어났다는 말인데, 그것이 일어난 태초는 과연 무엇인가? 그 태초 이전은 또한 무엇인가? 이런 사유에서 우리는 영적 떨림을, 다른 말로 현묘(玄妙)의 어지러움을 경험합니다. 개인의 실존적인 차원에서도 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태초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는 순간일지 모른다. 전혀 다른 두 질료가 하나로 결합해서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 인간이 된다. 또한 그 이전의 ‘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지금 필자는 우주물리학과 사람의 생물학적 근원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 본문을 읽는 청중들로 하여금 본문이 말하는 시원(始原)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영적인 떨림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뜻이다. 설교자들이 우선 성서기자들의 영적 깊이를 따라가기 위해서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런 통찰과 직관과 사유 없이는 성서텍스트의 그 영적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이런 과정 전체를 가리켜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단어는 헬라 신화의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에도 그들이 외국인 관계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신의 언어는 단순히 외국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헤르메스와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해석학은 어원적으로 번역, 통역, 해석이라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번역은 주로 문법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다루는 것이고, 통역은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삶의 지평을 새롭게 끌어올리는 것이다. <진리와 방법>을 쓴 가다머(Gadamer)는 이 세 번째 단계의 해석 사건을 가리켜 ‘지평융해’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하면 성서기자들의 영적 떨림이 오늘 우리와 일치해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 떨림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오늘 설교 현장에서 이런 영적 떨림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라. 그것이 없다면 설교가 상투성에 떨어졌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영적 떨림이라는 단어를 종교적 엑스타시로, 즉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리면서 경험하는 심리적 황홀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종교적 경건으로 생각한다. 세련된 방식의 종교행위에 참석했다는 만족감 같은 경험을 말한다. 영적 떨림이 그런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원이 다르다. 그 어떤 존재유비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경험하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성서기자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 할 영적 경험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경험에 이르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필수적인 작업이 해석이다. 그러니 해석 없이 어찌 설교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의 본문인 성서텍스트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으로 알려진 모세도 사실은 하나님을 직접 본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2,23) 이 은폐성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처한 엄정한 영적 실존이다. 여기에 바로 설교자의 영적 실존도 담겨 있다.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으면서 그 하나님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의 영적 실존은 참으로 고단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철학자들이 진단한 것과 동일하다. 실존철학은 사람을 피투적인 존재(das geworfenes Sein)라고 했다.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말은 세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우리는 세상에서 사물을 고체와 액체와 기체라는 범주를 경험한다. 미시의 세계에서는 소립자로 경험할 것이다. 그 이상의 경험은 불가능하다. 고체이면서 동시에 액체인 사물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기체이면서 고체인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직선이면서 곡선인 어떤 것을 우리는 모른다. 이 세상에 주어진 조건으로만 이 세상을 경험하고 산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자. 여기 열대어가 들어 있는 어항이 있다. 열대어는 물을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열대어는 물에 던져졌기 때문에 물을 대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 안에 그냥 들어 있을 뿐이다. 열대어가 물을 인식하려면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물고기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세상의 진면목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다.

위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이지 하나님을 은폐시키는 말씀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 말씀 계시를 철학적 사유로 혼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을 단순히 신학적인 미숙성이라는 말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인식론적 도구에 의해서도 재단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교정되어야 한다. 계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이다. 하나님과 계시는 나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로 존재하고, 계시는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나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신학개념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를 보라. 하나님이 자기를 아직은 완전히 나타내지 않으셨다. 실제로 그는 여전히 숨어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는 분이라고 해야 옳다. 이 사실을 칼 바르트는 정확하게 보았다. 하나님은 변증법적으로 은폐의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며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라고 말이다. 은폐가 완전히 사라지고 계시가 완성되는 때가 곧 종말이다. 종말은 창조의 완성이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은 잠정적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종말이 와야만 우리는 얼굴로 얼굴을 보듯이 궁극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에 근거해서 C. S 루이스는 <Till We have faces>라는 책에서 먼 훗날이 되어야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석학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적 맥락으로 들어가는 신학적 노력이다.

은폐성 개념을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직접 연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죄에 빠진 인류를 대신한 죽음이며, 거기에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직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연루되어 있다. 첫째, 전지전능과 무소불위의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끝난 대답이 아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라면 간단히 말씀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게 아닐까? 둘째, 예수의 십자가는 당시에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예수의 운명이 실패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길로 믿는다. 왜 그런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실증이 있는가? 아니다. 십자가 구원사건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해석되어야만 한다.

십자가와 더불어,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설교 주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그 부활을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키실 궁극적 생명의 선취(先取)라고 믿는다.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간단히 이렇게 묻자. 부활의 현실성(reality)은 무엇인가? 그것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작동되는 이 물리적 세계에 사는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는 부활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가 궁극적인 생명을 완벽하게 해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영생, 영광스런 삶, 완전한 안식,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라는 성서 용어들이 있지만, 그것으로 다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의 도그마가 불확실하다거나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토대들이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 실체를 확연하게 드러낼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의 인식론적 과정도 역시 잠정적이며, 따라서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 나가서 성서의 은폐성이야말로 성서가 탈(脫)은폐의 속성을 지닌 진리(알레테이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진리의 탈은폐성에 이르는 작업이 필자가 반복해서 거론한 해석학, 즉 해석의 능력이다.

해석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도는 없다. 물론 몇 가지 필요한 공부는 있다. 성서텍스트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성서 원어와 역사비평 훈련을 받아야 한다.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등, 신학교에서의 공부는 총체적으로 해석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만으로 해석의 능력을 확보하는 건 아니다. 삶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성서 자체가 이런 인문학적 통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글머리에서 제시한 창조 전승은 바벨론 포로라는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지금 바벨론 포로라는 기구한 운명에 떨어졌다는 사실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식하고 고백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삶과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강단의 형편은 어떤가? 중층적으로 생명의 신비를 열고 있는 성서텍스트가 설교자의 고유한 신학적 시각에서 해석되는 설교를 별로 찾아보지 못했다. 성서의 영적 깊이로 천착해 들어가는 해석은 없고 단지 포장 기술만 차고 넘친다. 영적인 신탁(神託)은 없고 종교 연설만 횡행한다.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과욕망을 놀라운 입담으로 자극하고 선동하는 설교자가 강단을 독점하는 실정이다. 설교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과 목회,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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