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아진 그들

 

5월은 부활절 절기가 계속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절 전까지 일곱 주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부활절을 한번 지키는 것으로 끝내고 다른 설교로 넘어간다. 그걸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 매주일 부활을 주제로 설교할 각오를 하는 게 좋다. 그리고 그런 작업은 가능하다. 청중들이 매주일 부활 설교를 듣는다면 설교에 식상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 설교자가 부활의 영성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청중들에게는 매번의 부활 설교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매주에 한 번씩 클래식 연주회를 찾는 클래식 애호가가 그 연주를 실증내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훌륭한 연주가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매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회력이 제시하고 있는 일곱 주일 정도는 부활절 설교를 하는 게 좋지 않을는지. 이런 설교의 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부단한 신학과 영성의 훈련이 필요하다.

5월이라는 달은 설교자가 부활설교를 피해도 무슨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면죄부 역할을 한다. 세속의 절기와 매칭이 된다. 5일은 어린이 날이래서 교회에서는 1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킨다. 8일은 어버이 날인데, 마침 주일이다. 대개의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킬 것이다. 15일은 스승의 날인데, 주일이다. 혹시 그 날을 스승의 주일로 지키는 교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5월은 가정의 달로 인식된다. 어떤 교회는 심지어 부부 주일을 지키기도 한다. 거기에 따른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아마 한국교회 강단은 5월 한 달 동안 어린이, 청소년, 부부,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성경구절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이런 설교 패턴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한 가지만은 기억해야 한다. 찬양예배나 삼일기도회가 아니라 주일에 드리는 공동예배의 설교만은 가능한 케리그마에 집중해야 한다. 어린이, 어버이, 가정이라는 주제는 굳이 교회가 나서지 않아도 이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그게 지나쳐서 문제가 될 정도이다. 특히 효도하라는 설교는 한국교회에 전매특허다. 가부장적인 정서가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교회의 주류 계급이 효도를 받아야 할 이들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예수의 운명에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통치를 전해야 할 시간에 상식과 교양에 속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직무 유기 아니겠는가. 더구나 오늘의 시대는 홀로 가정, 이혼 가정, 편모편부 가정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동성애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전형적인 가정을 창조의 원리로 전하는 설교를 듣는다면 시험에 들지 않겠는가.

 

5월1일/ 부활절 둘째 주일

사도행전 2:22-32/ 부활의 증인 공동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리스도교의 초석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한 상황에서는 매우 위태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교 일반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일반은 마음 수양, 도덕성, 기복 등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람들의 삶에 오히려 걸림돌이다. 십자가에 달린 이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부활도 증명이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이런 것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삼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불편하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감수했다는 뜻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런 질문은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도행전 기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첫 설교를 전한다. 베드로의 설교로 알려진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에 이어진 것으로,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 믿으면 출세한다거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 이외의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적으로 규정한다. 매우 중요한 개념규정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사람)의 책임이고,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아주 간단한 규정이지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십자가를 보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예수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는 게 대답일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를 알지 못했으니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런 대목에서 그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곤란하다. 그들도 우리처럼, 아니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메시아가 비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도 이런 일은 여전하다. 우리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지 못한다. 크고 작은 메시아 살해가 반복된다.

베드로는 부활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이어서 시편 16:8절 이하를 인용한다. 다윗은 참된 생명을 희망하고 노래했으며,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썩음을 벗어났다. 그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로 규정하고, 다윗이 예수의 부활을 내다보았다고 한다. 베드로의 시편 인용은 좀 복잡하다. 설교 시간에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24절에서 말한 그 사실을 32절에서 다시 확인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깊은 영성과 특별한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가 바로 생명의 주인이시다. 세계 완성자이시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으로 불러내셨다. 예수의 부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신 세계의 비밀이 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생명 사건을 예수의 부활에서 경험한 것이다. 종말이 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사건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청중들은 그 고백의 근거를 어디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설교자는 짧은 설교 시간에 그것을 다 해명하기는 어렵기도 하고, 해명할 필요도 없다. 설교는 신학강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사태를 설교자 자신은 일단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의 과정에서 청중들과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이다.

그 대답을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b) 예수의 부활 사건은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증인들의 증언은 복음서와 서신들이다. 그것을 상세하게 살피면 그들이 놀라운 근원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의 증언은 아니다. 부활은 역사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증언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증언에 진정성이 있다면 비록 고대인들의 세계 이해에 근거한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즉 신화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에서 출발했으며, 그 증언을 계속해서 간직해왔고, 지금도 그 증언을 선포해야만 한다.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고 있는 것에 운명을 건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회는 부활의 증인 공동체이다. 예수의 부활에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미래를 걸었다. 그 사실을 말과 삶으로 증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럴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가.

 

5월8일/ 부활절 셋째 주일

누가복음 24:13-35/ 눈이 밝아진 그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헬, 기대어 누워 있는지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오늘 설교의 본문인 눅 24:13-35절은 그 유명한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로, 누가복음의 특수 자료에 속한다. 부활 전승 중에서 가장 길다. 병행구인 막 16:12, 13절은 그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더구나 이 두 사람이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전했지만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믿었다는 뉘앙스로 보도한다. 부활에 대한 보도가 왜 이렇게 다른가? 왜 이렇게 정밀하지 못한가? 이런 보도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여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설교자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설교자가 적당한 길이로 설명하면 된다. 이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잘 꾸리기만 해도 한편의 설교로 충분하다. 설교자에게는 작가와 같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이야기의 깊이로 들어가는 상상력이다. 연극으로 치면 2막으로 구성할 수 있다. 1막은 두 제자가 중간에 끼어든 한 남자와 함께 길을 가는 장면이다. 그들의 대화는 메시아적 차원에 속한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될는지. 2막은 주막집에서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다. 한 사람은 길을 더 가겠다고 하고 다른 두 사람은 함께 머물자고 붙든다. 아마 이 두 사람은 길을 오면서 이 한 사람에게서 어떤 강력한 느낌을 받지 않았겠는가. 영적 순간은 자칫 지나쳐버릴 수 있으니 기회가 왔을 때 붙들어야 한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부활의 주님이 성찬식을 거행하듯이 떡을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는 순간에 제자들의 눈이 밝아진 장면이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고 정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색맹은 색깔을 구별하지 못한다. 빛이 없으면 보는 게 불가능하다. 백내장이나 노안으로 시력이 감퇴되기도 한다. 더 심한 경우에는 환각을 보거나 착시를 일으킬 때도 있다. 똑같은 대상을 보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실제로 보이는 사실까지 다르다. 예술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세상의 보물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는지를 보라. 모래 한 알이 우주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유적 전문가의 눈은 남이 못 보는 걸 본다. 바둑의 수도 그렇다.

영적인 시각도 비슷하다. 메시아 사건을,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어떤 이들은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다. 고유한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식별하는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부활의 주님이 왜 가야바나 빌라도에게 나타나지 않았는지, 또는 예루살렘 저자거리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는지를 생각해보라. 영적 시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주님이 떼어주신 떡을 받아들기 전에는 아무리 부활의 주님이 옆에 있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빈무덤을 본 제자들도 자동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천천히 그들의 영적 시각이 열리면서 경험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은 실증적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로운 경험으로만 남아 있다. 마치 화가나 작곡가가 어떤 영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을 그림으로, 또는 악보로 기록해보지만 사실적인 증거로 남는 건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험된 고유한 생명 사건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승으로 물려받았을 뿐이다. 다시 보이지 않게 된 부활의 주님을, 그 사건은 승천 전승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 다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다른 길은 없다. 엠마오 두 제자처럼 눈이 밝아져야 한다. 이런 영적 시각을 밀의(密儀)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변증하지 않았다. 영적인 눈이 밝아지려면 두 가지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성서의 세계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열린 눈으로 보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세상을 열린 눈으로 보려면 고정관념을 넘어서야한다. 그것이 없으면 부활 경험은 불가능하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관점으로 보면 성만찬적 시각이 관건이다. 이런 시각이 우리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설명을 설교자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해야만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5월15일/ 부활절 넷째 주일

베드로전서 2:1-10/ 예수의 기이한 빛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사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벧전 2:1-10절에는 어려운 개념의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그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일단 중요하다. 그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설교의 중심이 흐트러질 뿐만 아니라 설교할 내용도 빈약해진다. 신령한 젖(2), 보배로운 산 돌(4),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5), 버린 돌과 머릿돌(7),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기이한 빛(9)이 그것이다. 한 단어만 설명하는 것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설교 시간에 그 모든 걸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는 전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열거된 단어를 관통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또한 그를 믿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구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수 경험에 근거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 본문은 구약의 제사 행위와 연결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거룩한 제사장으로 규정한다는 특징이 있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 중에서 이것보다 더 정확한 것도 없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제사행위의 핵심은 사죄이다. 사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은 하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설교자는 이런 구약의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사죄와 구원, 죽음과 생명에 관계된 일이야말로 신령한 제사다. 그런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려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을 제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가 그것이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성격으로 규정된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구약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시편 118:22절을 인용해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도 인용했다.(막 12:10)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 구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했다는 증거다. 여기서 버린 돌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머릿돌은 부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인생의 집을 세운 이들이다. 그래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말했다. 이런 설명이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을 모르는 이들이다. 설교자는 이런 설명을 실질적으로 이해한 다음에 청중들에게 전해야 한다.

부활을 머릿돌 삼아 신령한 집을 세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뜻이다. 그것을 가리켜 본문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한다. 기이한 빛은 곧 부활을 가리킨다. 왜 확실한 빛이라고 말하지 않고 기이한 빛이라고 하는가? 당연한 말이다. 부활은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의 선취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명징하게 경험할 수는 없다. 이는 곧 하나님 경험과 비슷한 차원이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불붙은 가시떨기를 보았다. 그것이 기이한 빛이다.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 하나님, 부활은 기이한 빛이다. 이것을 모호하다고 말하지 말라. 종말에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 앞에 선 사람은 그것을 기이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1백년 후의 미래를 생각해보라. 그 순간이 곧 다가오는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두 시간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기이한 빛이 아닌가. 우리를 종말의 생명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바로 기이한 빛이 아닌가.

베드로에 따르면 기이한 빛에 들어간 이들은 거룩한 제사장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통해서 경험한 기이한 빛의 제사장들이다. 설교자는 이런 진술이 공자 왈로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생명의 깊이, 그 신비, 그 현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설교는 싸구려 약장사의 선전선동에 떨어진다.

 

5월22일/ 부활절 다섯째 주일

요한복음 14:1-14/ 예수는 하나님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또는 믿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17장은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다. 이렇게 긴 연설을 한 자리에서 말씀하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 번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이 편집해서 정리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교자는 약간 곤혹스럽다. 이렇게 긴 구절이 공관복음에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 복음서를 문자적인 차원에서 일점일획도 틀린 게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곤란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차원에서 틀림이 없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고별사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공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특별한 영적 감수성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요한복음의 이 고별사가 다른 방식으로 공관복음에 다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설교자가 설교시간에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 자신은 알고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은 위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게 왜 공관복음서의 주장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인가?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의 집에 가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은 공관복음도 누누이 말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곧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리킨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절) 그러자 도마가 길을 모른다고 말한다. 솔직한 대답이다. 도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공동체에 많았을 것이다. 도마는 훗날 부활한 주님을 실증적으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6절에 그 유명한 그리스도론의 중심에 해당되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빌립은 8절에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건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불안과 요구가 무엇인지를 의미한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기 어려워하던 이들도 있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자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다.

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설교자는 이런 성경의 표현을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런 표현은 빈말이 된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가리켜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10, 11절) 이것은 영적인 사태이다. 보이는 예수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치는 바로 영적인 사건이다. 그런 말을 모두가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을 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하나님의 메시아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된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바람과 나무의 관계를 보라.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거기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인격, 삶, 운명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즉 하나님 자체를 본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모든 것을 걸었으며, 지난 2천년 동안 그것을 전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나? 그것은 복음서와 신약성서 전체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메시아에게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 치유, 축귀, 사죄 등은 모두 인간 구원의 메시아적 사건이다. 십자가는 메시아 사건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예수로 인해서 메시아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의 부활이다. 그의 공생애에 일어난 사건이 메시아적 사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인 부활이 선취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설명이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청중들은 듣긴 들어도 영적 공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청중들의 반응에 일희일비 하지 않아도 좋다. 가끔 따분한 설교를 해도 좋다. 그 설교가 진리와 닿아 있다면 어느 때가 되면 청중의 영혼을 크게 울릴 것이다. 좋은 설교의 특징이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으면 된다. 본문 1절에 따르면 요한공동체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서 근심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자신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이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을 믿으라.

 

5월29일/ 부활절 여섯째 주일

사도행전 17:22-31/ 부활은 심판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유럽의 철학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제논 등이 모두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그리스 철학의 본산지는 우리말 성경 용어로 아덴으로 표기되는 아테네다. 플라톤은 그곳에 아카데미를 세웠다. 아테네의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도 연관이 깊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철학은 진리를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 그리스도교가 철학과의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부들은 철학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예컨대 삼위일체론이 그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삼위일체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혼불멸설도 그것이 비록 부활 사상과 대립되는 부분이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섭리 사상은 스토아 철학과 깊이 연루되었다. 철학이 바로 신앙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앙의 보편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배척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는 오늘날 진화론을 그리스도교가 배척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 가장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간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그곳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닥치는 대로 논쟁을 벌였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탓인지 바울을 데리고 당시 유명한 법정인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다. 바울의 연설이 22-31절에 나온다. 이 내용은 당대 최고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변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증의 역사는 그 뒤로 계속되었으며, 지금의 신학과 설교도 역시 변증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변증의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우격다짐이 아니라 진리론적 논리를 확보해야만 변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으로부터 변증을 시작한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을 만들 정도로 종교심이 강했다고 한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신을 전하겠다고 했다. 그 내용은 본문에 나와 있으니, 설교자들이 알아서 설명하면 된다. 여기서의 핵심은 자연신학의 가능성이다. 27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절)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한 종교성이 있다. 그리스도교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들이 더듬어 찾는 그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기술공학이 지배하는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나 용납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새롭고 결정적인 증거를 주셨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건이다. 이제는 더듬어서 신을 찾으면 상태에 머물지 말고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사건으로 천하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부활이 어떻게 심판이라는 말인가? 설교자라고 한다면 이 질문을 A4 용지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직 설교자의 준비가 덜 된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의 요령만 찾을 게 아니라 해석학적인 토대를 갖춰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십자가와 부활의 실체적 진실, 그리고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이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과 죽음의 극치이다. 부활은 하나님이 배타적이고 고유한, 즉 종말론적 방식으로 인간의 반역을 해체한 사건이다.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인류의 문화사를 검토해야 하며, 오늘의 시대정신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부활이 세계 심판이라는 말은 부활을 통해서만 세계의 허위의식이, 즉 사이비 생명 사건이 폭로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설득력 있게 전하려면 설교자의 신학적 영성이 농익어야만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표면적으로 풍요로운 것 같지만 오히려 죽음을 열매로 맺는다. KAIST 학생이 금년 들어 4명이나 자살했다. 정부는 생명의 젖줄인 강을 기술공학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곳곳에서 삶의 의미가 실종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영성을 삶의 토대로 삼을 것인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을 절대화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각자가 더 깊이 생각해보시라.(설교공부, 2011년4월, 기독교사상 2011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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