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는 하나님

 

3월의 첫 주일인 6일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면서 산상변모 주일이고, 나머지 세 주일은 사순절 기간에 해당된다.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는 40일간의 교회절기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사순절 영성에 대한 이해나 실천이 미흡하다.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교회력과 예전 전통이 아무리 깊고 세련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답습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리의 영성과 신앙생활이 거의 개별 교회 중심으로만 준비되고 진행되기 때문에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입장도 교회에 따라서 중구난방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 일치도 요원하고 신앙의 본질을 건강하게 유지하기도 어렵다. 본질은 형식에 제한받지 않지만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사순절 영성을 담아내는 형식은 접어두고 본질만 짚자. 예수의 고난을 감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감격스러워한다.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흐느끼는 분들도 적지 않다. 목회자가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특별한 절기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이런 감정 위주의 자학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기독교 신앙의 감정적 차원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신파극처럼 감정의 과잉으로 본줄기가 훼손된다면 문제 아닌가.

예수의 고난은 감정의 차원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끌어들이는 신학 주제이다. 다음의 질문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인 예수가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이 말이 되는가? 신도 인간처럼 고난을 당하나? 이런 질문은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된 것이다. 가현설 논쟁으로부터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적 담론들이 이런 질문에 토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치열한 담론 투쟁의 결과이다. 이런 투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것이 없으면 진리는 죽는다. 다시 묻자. 신이 고난을 당할 수 있나? 고난당하는 신 개념이 인간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이 시지푸스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이 살해당하던 순간이었다. 다른 이들은 쉽게 숨이 끊어졌는데 한 소년은 계속 발버둥을 쳤다. 더 많은 가스가 주입되었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그때 한 유대인이 랍비에게 물었다. 지금 여호와는 어디 계신가?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이의 잔혹한 죽음에 여호와가 계신다. 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에 달렸다. 전능한 존재가 가장 무기력하게 죽었다는 역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텄다. 고난주간만이 아니라 사순절에 우리는 이 사실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런 고난과 십자가 신앙을 풍요와 경쟁력 제고가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청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의 영적 분발이 필요하다.

 

2011년 3월6일/ 주현절 마지막(산상변모) 주일

마태복음 17:1-9/ 메시아는 비밀이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위 본문은 소위 변화 산 이야기다. 예수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예수는 무슨 이유로 산에 오르셨나? 마태와 마가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누가는 예수가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셨다고 말한다. 기도하러 반드시 산에 오를 필요는 없다. 예수는 주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곤 했다. 여기서 산이 거론된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과 깊숙이 연관된다. 모세는 호렙산을, 엘리야는 갈멜산을 연상시킨다. 본문의 진행은 우리가 잘 알고 있으니 생략하자. 우리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왜 발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나?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사건이나 경험은 가능한 주변에 널리 알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거칠게나마 한번 짚어야겠다. 이것이 예수의 발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현상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전한다. 모세와 엘리야가 실제로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죽어서 먼지가 되어버린 이들이 어떻게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이것은 예수의 부활과도 다른 이야기다. 예수의 부활은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회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른 인물들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심리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다는 말인가?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경험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용모에 관해서 일언반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여기서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는 보도와(마 3:16) 같은 유형의 이야기다. 유대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초능력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들로 알려진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증하려는 것뿐이다. 모세도 시내 산에서 후광이 빛났고, 엘리야도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인물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으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세례 때와 거의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3:17 참조)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것은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 현현(顯現)이다. 즉 메시아 경험이다. 다른 것들은 소품에 불과하다. 설교자들은 소품에 신경을 쓰지 말고 핵심 서사(敍事)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예수는 왜 제자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가? 마태와 마가는 거의 똑같이 전하지만 누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르게 보도한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이르신 것으로, 누가는 제자들 스스로 입을 다문으로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아무 말 없는 누가와 달리 예수 부활 이전이라는 단서를 단다. 디테일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동일하다. 예수의 신성을, 즉 그의 메시아성을 함부로 누설하지 말라는 것이다. 메시아 비밀을 가리킨다.

본문이 말하는 메시아 비밀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신앙적 태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메시아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감당하는 것이다. 이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즉 그것이 비밀인 이유나 비밀이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대신 그것을 감당하는 것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하겠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라. 밭에 보화가 묻힌 것을 발견한 사람은 떠벌리지 않는다. 비밀의 희열에 감싸인다.(마 13:34) 이 말을 복음 선포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오해할 사람은 없으리라.

 

2011년 3월13일/ 사순절 첫째 주일

로마서 5:12-19/ 생명의 왕국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인 칭의론이다. 로마서를 본문으로 설교할 경우에는 일단 칭의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만이 아니라 개신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모든 설교의 토대는 칭의론이다. 칭의론이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오해는 값싼 은혜이다. 우리의 업적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다보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실종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관념이나 언어에 떨어진다는 말이다. 더 극단은 구원파 유의 신앙이다. 이들에게는 죄마저 추상으로 떨어진다. 칭의론은 오히려 죄의 무게를 크게 본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사람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지 값싼 은혜에 떨어지거나 회개 무용론에 떨어져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한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다. 12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 한 사람은 아담이다. 그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죄가 개인과 사회의 보편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죄를 규정하는 율법이 나오기 전에도 죄의 결과인 죽음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윤리나 도덕을 함양하는 것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윤리와 도덕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도 없다. 친구에게 욕을 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아무도 죄의 존재론적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아담의 죄는 불순종이었다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순종의 결과였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죽음이 임하게 되었다면 예수의 순종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망이 왕노릇 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생명이 왕노릇 한다.(롬 5:17)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것의 현실성(reality)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고 있는가? 실제로 생명이 충만한가?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불안하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는 죄가 왕노릇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를 피해보려고 열광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우리의 영적 실존을 외면하는 태도이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한다는, 즉 생명의 왕국에서 살게 되었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다시 칭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말은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이다.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진 게 아니다. 표면적에서만, 무늬로만 약간 좋아질 수 있을 뿐이지 근본에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의로운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칼뱅은 전가(轉嫁)된 의를 말한다. 이것을 관념적인 교리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실증적인 의가 아니라 법적이고 전가된 의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동일한 차원에서 구원과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아직 생명의 왕이 된 것은 아니다. 생명이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덧입혀졌을 뿐이다. 생명과의 완전한 일치는 종말에 일어난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빛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빛에 반사될 뿐이다.

종말에 완성될 생명과 빛을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 그것을 규범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교회 출석이나 기도, 헌금으로 기준을 찾을 수도 없다. 최소한의 방향만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가에 달려 있다. 그의 운명에 얼마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것만큼 우리의 영성도 달라질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물리 경험도 그렇다. 물리의 세계에 어느 정도의 깊이로 들어가는가에 따라서 물리학자의 수준이 달라진다. 시인도 그렇고, 예술가도 그렇다. 우리는 영적인 물리학자들, 영적인 시인들이다. 그리스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생명의 왕국에 거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바울처럼 고백하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갈 2:20 참조)

 

2011년 3월20일/ 사순절 둘째 주일

요한복음 3:1-15/ 인식의 거듭남에 대해서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 본문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본문에서 ‘거듭남’을 주제로 설교한다. 도대체 거듭난다는 게 무슨 뜻인가? 공관복음서는 니고데모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듭난다는 개념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공관복음서는 대신 회심을 말한다. 중생과 회심은 똑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중생은 헬라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회심은 유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중생은 인간 내면의 새로운 변화를 가리킨다면, 회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게를 둔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중생과 회심을 하나로 봐도 잘못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중생이나 회심 개념을 심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새사람 되었다는 식이다. 못된 버릇을 고치는 수준의 이야기이다. 공허한 주장이다. 그런 차원의 중생은 다른 종교와 자아 성취 프로그램들이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니고데모의 변화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갈등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11절이 하나의 단서이다. 다른 구절에서는 인칭대명사가 단수로 나오는데 11절에서는 갑자기 복수로 나온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유대교를 향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언이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역사적 실재 인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니고데모 이야기가 꾸민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이 전승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설교자들은 본문에서 가능한 중심 주제에 천착해야 한다. 주변적인 주제를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럴 경우라 하더라도 중심 주제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 즉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진술은 요한복음 공동체와 대립해 있던 유대교의 주장을 대변한다. 그들은 예수를 위대한 스승으로만 인정했다. 근거는 예수가 행하는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에서 확인했다.(고전 1:22)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예수를 그런 스승으로 인정할 테니 당신들도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런 요구를 줄기차게 받았다. 오늘도 형태만 달라진 채로 똑같은 요구와 유혹이 교회 안팎에서 제기된다.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 정신적 스승, 혁명의 기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 천박한 요구는 예수를 심리 치료사 정도로 받드는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교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았다. 선을 분명히 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유대교의 요구는 육에서 난 것이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요구를 일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영육 이원론의 시각으로 보면 곤란하다. 인간에게는 영과 육이 모두 소중하다. 그리스도교는 한 번도 육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적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삶까지도 끝까지 밀고나갔다. 육으로 난 것은 유대교의 주장, 즉 예수를 위대한 스승으로만 인정하는 것이다. 나름으로 고상한 주장이다. 선생은 학생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다. 학생들을 계몽시킨다. 인격적으로 훈화한다. 복지를 향상시킨다. 그것만으로도 선생의 역할은 크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상대적으로 가치 있는 삶으로 안내할 뿐이다. 이에 반해 영으로 난 것은 그리스도교의 예수 인식과 경험이다.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인식의 패러다임 쉬프트(사고틀 전이)를 가리킨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 안 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함의 대상이었다.(고전 1:23) 메시아는 승리자여야만 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예수 사건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적인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보았지만(11절) 유대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다.

이제 설교의 결론은 무엇인가? 위의 해명이 오늘 청중들의 삶에 어떻게 부닥칠 수 있겠는가? 이건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자칫하면 관념적인 교리 설명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거북스러워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명에 동참하자. 예수의 운명에서만 우리가 구원을, 즉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예수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설교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현장에는 예수의 운명 운운을 막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청중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다. 늘 이유식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청중에게나 설교자 자신에게나 다 유익하다. 청중들이 쉽게 따라가기 힘든 영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설교자 자신이 실제로 알고 설교한다면 결국은 청중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니까.

 

2011년 3월27일/ 사순절 셋째 주일

출애굽기 17:1-7/ 표적을 구하지 말라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 17:1-7절은 이스라엘이 광야 시절에 겪은 일종의 에피소드다. 물이 떨어진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이야기다. 광야시절에 일어난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바로 앞에서 일어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도 동일한 구조다.(출 16:1-36) 먹을거리가 떨어진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고 한다. 더 앞서 일어난 마라의 쓴 물 사건도 비슷하다.(출 15:22-27) 광야 생활 초창기에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마라에서 물을 얻었지만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의 기도 끝에 물이 정화되었다고 한다. 시련, 원망, 기도, 그리고 문제 해결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사건은 앞의 것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 행동이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똑같은 잘못이 반복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심각한 신앙의 위기로 각인된 것만은 분명하다. 오죽 했으면 모세가 마지막 설교에서도 이 사실을 거론했겠는가.(신 6:16)

이 전승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설교자는 여기서 어떤 주제를 끌어낼 수 있는가? 물이 없어서 서로 다투거나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이 왜 하나님을 시험한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장 마실 물이 없어도 얌전하게 앉아서 하나님이 해결해줄 때를 기다려만 하는가? 성서기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 17:1b)고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사태는 위급하다. 민족 전체가 지금 이동 중이다. 광야생활에서 물은 생존의 필수다. 이들이 빠져나온 이집트는 최소한 물은 풍족했다. 이 상황을 그냥 믿음으로 밀고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구성원들이 옥신각신하게 마련이다. 설교자는 텍스트의 상황을 리얼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논란과 다툼을 가리켜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라는 출애굽기 기자의 평가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먹을거리와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거나 서로 다툰 것 자체를 훈계조로 설교의 중심주제로 삼으면 안 된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했다는 것이다. 본문이 정확하게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확실한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이다. 그들은 증거를 표적에서 찾았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는 표적을 다시 원했다.

표적을 찾는 일은 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유대인만의 특징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을 구한다. 큰 교회당 건축이나 교회 성장 등을 하나님이 함께 하는 표적이라고 주장하며, 또는 병 치료를 그런 표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의 삶도 표적 신앙과 다를 게 없다. 경제 발전으로 국가를 비교한다. 연봉으로 직업의 귀천을 규정한다. 삶의 계량화가 일상이 되었다. 표적 신앙이 왜 잘못인가? 이런 질문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성서텍스트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능력이 없는 설교자는 해석을 놓치고 선동선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표적 신앙은 하나님을 인간의 인식과 범주 안으로 제한하는 삶의 태도이다. 이런 삶의 태도에서는 하나님 신뢰가 자라지 못하고 부단히 시험에 들릴 수밖에 없다.

표적이 없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와 고난을 상징하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16:1-4) 요나의 표적은 바리새인들이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와 고난이 어떻게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표적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것을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독자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바울의 대답으로 대신하겠다. 바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 23)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궁극적 진리의 표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핵심은 이것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표적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는 표적을 행하신다. 그것이 예수 사건, 예수 운명에 드러났다.

이런 설교는 뭔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이 되는가? 더 강력한 요구를 청중들에게 하고 싶은가? 그들의 열정을 끌어낼만한 비장의 무기를 행사하고 싶은가? 그것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먼저 표적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억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 영혼을 화염으로 불사를 때만 표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설교공부,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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