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좀 둔다는 사람들은 복기라는 걸 할 줄 안다. 한번 둔 바둑을 다시 그대로 반복하는 걸 말한다. 거의 300 수 내외에 이르는 순서를 외워서 복기한다는 게 신기하다. 피아노 독주자들도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악보를 그대로 외워서 연주한다. 이들이 머리가 좋아서 기보(棋譜)나 악보(樂譜)를 외우는 게 아니다. 거기에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뿐이다. 성서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게 바로 설교 아니겠는가. 성서와 악보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다고 봐도 좋다. 더 나아가서 음악경험과 하나님 경험도 비슷하다. 우선 필자가 경험한 음악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겠다.

1) 2000년 사순절 기간에 필자는 독일의 베를린에 있었는데, 거기서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교향악단과 합창단이 함께 연주하는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 고전 음악에 대한 소양이 별로 없는 필자가 그때의 경험을 음악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리에 대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종종 불협화음을 내는 베르디의 그 작품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여 있는 작곡가의 영적인 상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가 작곡하기 전에 이미 그런 소리가 있었는가, 아니면 베르디에 의해서 창조되었는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소리를 베르디가 밖으로 불러냈을 뿐이다. 그런 일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리를 듣고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작곡 행위도 예언자들의 신탁(神託)경험과 비슷한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2) 영화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 2006)은 서양 음악의 대부라 할 베토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목에 나오는 ‘카핑’은 알아보기 힘든 작곡자의 원 악보를 출판사 쪽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필사하는 작업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영화는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마지막 교향곡 9번, 일명 <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후 필사자인 안나 홀츠라는 젊은 여성의 도움으로 직접 지휘를 맡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은 베토벤의 대사를 들어보시라.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 내 머릿속엔 소리로 가득 차있어. 절대 멈추지 않아.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그리곤 어떻게 했지?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게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어, 내 곡을 듣는 즐거움을. 그게 신의 사랑인가? 친구가 할 짓이냐고?

듣지 못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소리가 가득 차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작곡가는 소리를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까지 한다. 그들의 영혼이 소리의 존재론적 세계와 일치했다는 뜻이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영적 차원을 경험한 성서기자들과 비슷한 경험이다.

3) 2006년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다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는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소나타를 비롯해서, 다양한 악기의 협주곡과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한다. 당대에 나름으로 뛰어난 궁정작곡가였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향한 콤플렉스로 인해서 정신병원에 갈 정도였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세계가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 필자는 모차르트 특집을 다루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모차르트의 영혼을 울린 그 소리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에게만 놀라운 음악 세계가 주어진 것일까? 도대체 음악이란 무엇인가? 왜 지구에만 소리가 존재하게 된 것일까? 소리 경험과 하나님 경험은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같은가?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음악 세계를 열어가는 소리에 대한 존재론적인 체험보다는 음악 기술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은 처음부터 바이엘 악보를 보고 수백 번 반복해서 그걸 외운다. 그렇게 해서 손가락을 잘 돌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원래 음악의 본질인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아니다. 더 근원적인 소리의 세계는 봄비 내리는 소리, 밤 꾀꼬리 울음소리, 천둥소리, 눈 오는 날 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 등등이다. 음악 경험은 기술 습득과 능력이 아니라 소리와의 존재론적 일치이다. 그런 경험 없이 악보를 그대로 연주할 수 있는 기술 습득에만 치중하는 것은 음악의 길이 될 수 없다.

오늘 강단의 가장 큰 문제도 역시 설교를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 구원 통치의 존재론적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단지 전달 기술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효과적인 스피치 훈련에 몰두하고, 청중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청중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이 이렇게 인간적인 기술의 차원으로 떨어진 이유는 설교자들이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다는 데에 놓여 있는 게 아닐는지. 그 내막으로 한 발작 들어가 보자.

소리와 계시

위에서 인용한 베르디,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지금 우리는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이 보표에 그린 악보만 접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악보가 음악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악보는 작곡가의 음악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 음악의 실체는 소리이다. 소리를 기호에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기호와 실체를, 즉 악보와 소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그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가 경험한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악보가 기호이듯이 성서 텍스트는 기호이고, 소리가 실체이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실체(reality)이다. 악보라는 기호가 소리라는 실체를 담고 있듯이 성서라는 기호는 계시라는 실체를 담고 있다. 모차르트 연주자들이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의 소리를 찾아내야 하듯이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성서텍스트와 계시가 구분된다는 사실을 먼저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악보와 소리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악보에 소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장조, K.279 악보를 보았다고 하자. 이 악보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보는 소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소리를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보는 연주자에게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말을 걸 뿐이다. 시각적 차원의 악보에 청각적 차원의 소리가 숨어 있는 셈이다.

우리 설교자들에게 성서는 이와 비슷하다. 성서는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바르트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 자체와 일치하는 건 아니다. 흡사 음의 존재론적 세계로부터 들려온 어떤 소리를 보표에 그려 넣은 모차르트의 악보처럼 성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혹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성서 기자들의 언어적 진술이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되어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실증적인 사실로 전한다. 그런 방식으로 설교하더라도 입담만 있으면 나름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청중들은 실증적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청중들의 영적 눈높이에 설교자들도 길들여지고 있다. 창조적인 설교를 듣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교자나 청중들이나 원초적 계시 사건에 대한 경험이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말씀의 은폐성, 계시의 은폐성이 무슨 뜻인지 예를 들어보자. 여기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가 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의 길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여전히 숨겨진 계시이다. 간단히 생각해보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며, 종말에 세상을 완성한 심판자이다. 전지전능이 그의 본질이다. 그런 하나님이 유대인 한 남자의 저주스러운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크게 틀린 게 아니다. 예수가 세상에 왔었는데도 세상이 하나도 변한 게 없다면 그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이다. 이들의 반론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은폐의 방식으로 구원사건이다. 거기에 은폐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성서해석이며, 더 나아가 설교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서텍스트를 통해서 원래의 구원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 원초적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간 피아니스트라고 한다면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기만 해도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자들도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이 있다. 전문 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설교자들도 역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악가들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기 위해서 쏟아 붓는 훈련과 노력이 성서 텍스트를 해명해야 할 설교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설교자의 전문성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통찰을 말하는데, 이럴 때만 악보에 은폐된 소리가 노출되듯이 성서에 은폐된 하나님의 말씀이 노출된다.

어떤 이들은 신학이 아니라 영성이 설교자들에게 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학은 단지 학자들의 이론이고, 영성은 성령 경험이라고 구분한다. 신학은 인간의 인식론에 불과하고, 영성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이다. 이런 탓에 한국교회에 신학무용론이 팽배하다. 이런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다. 신학 없는 영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거꾸로 영성 없는 신학도 불가능하다. 영적 현실에 대한 경험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과 영성을 대립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신학도 모르고 영성도 모르는 사람이리라.

마지막으로, 필자의 생각에 설교자는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유행가 가수가 아니라 음악의 도(道)를 추구하는 클래식 성악가에 가깝다. 서편제 영화의 한 대목이다.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배만 고프다면서 소리를 배우기 싫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소리는 밥보다 좋은 거야!” 하고 나무란다. 득음을 위해 용맹정진 하는 소리꾼의 절규다. 성서텍스트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설교자도 그렇게 외쳐야 하는 게 아닐는지. 하나님의 말씀은 밥보다 좋다고 말이다. 이미 성서가 그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이걸 아는 사람은 다른 데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강단과 목회,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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