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존재 질문
<존재와 시간>의 존재질문
오토가 설명하고 있는 이 대목은 이미 우리가 ‘하이데거 철학 맛보기’에서 한번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하이데거가 제기하고 있는 존재 질문에 관한 토대를 기초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존재와 시간>이 놓여 있는 상황은 지난 서양 철학사에 나타난 존재망각이다. 하이데거는 이 망각된 존재의 지평을 이제 시간의 맥락에서 풀어내려고 한다. “시간을 모든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본 연구서의 잠정적인 목표이다”(Sein und Zeit, 1).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논의하였지만 그것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앞으로 그의 시간 이해가 다시 나오겠지만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시간성의 특징은 미래의 우위라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미래에서 생겨나고 또 기재하는 미래가 현재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종국을 앞질러서 취함으로써 본래의 자기에게 도달한다. 따라서 시간성의 특징은 그것이 탈자(脫自, Ekstase)에 놓여 있다.”(세계철학대사전). 만약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의 특성이 이런 미래의 우위성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적 세계 이해와 다른 게 아니다. 결국 하이데거의 존재는 종말의 빛으로부터 현존재인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이 세상에 계시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존재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에 나타난 존재의 도그마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둘째,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 불가능한 것이다. 셋째,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도그마에 반대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선입관 내지 도그마를 반대한다. 첫째, 존재가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둘째, 이 개념을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은 존재가 존재자와 철저하게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셋째, 존재 개념이 가장 어둡다는 사실, 그리고 이 개념이 언제나 선이해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 심층에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고 있는 ‘존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존재 개념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지만 하이데거가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존재는 이러한 ‘우리의’ 개념을 넘는 것이다. 나무가 있다든지, 하늘이 푸르다(푸르게 있다)는 문장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그런 “있다”는 것을 뛰어넘는다. 오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유가 단지 하나의 자력적(自力的)이고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둔 주관의 개념형성적 내지 개념연결적 행위만이 아님을 발견한다. ‘존재’라는 근본개념은, 그 밖에도 사유가 사유하거나 혹은 사유할 때 사용하는 다른 개념들도 마찬가지로, 순전히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이다. 즉 사유가 일어난다는 것, 사유가 도대체 가능하다는 것이 존재의 선물이다.”(49). 바로 이런 생각, 즉 존재라는 개념이 단지 사유의 산물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가 존재의 선물이라는 사상은 하이데거 철학의 결과이며 그가 시도한 해석의 결과이다.
현상학적 방법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에드문트 후설이 발행한 <철학과 현상학 연구를 위한 연보>에 실린 연구서였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명제인 ‘사상(事象) 자체로’(zu der Sache selbst)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이전의 선입관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사태를 정밀하게 분석하려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파이네스타이’와 ‘로고스’의 합성어인 현상학(Phänomenologie)은 어떤 사물에 우리의 범주를 부과하지 않고서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언가 자신들의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서 범주화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매개는 인간의 의식인데, 만약 이 인간의 의식이 문제가 있다면 사물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현상학은 인간의 의식에 상관없이, 이 의식 활동이 기존의 철학활동이었는데, 사물 자체에 들어감으로서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상(事象)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 자체가 우리에게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의 근원이 하이데거에게서 훨씬 심원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의식에 상관없이 사상 자체에 접근하는 작업이 가능하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의 의식이라는 게 그렇게 엄밀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사상이 우리에게 왜곡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의식이라도 없으면 우리가 사상을 인식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현상학이 말하는 ‘사상 자체로!’라는 뜻은 인간의 인식활동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역사의 과정에서 고정된 그런 인식의 틀을 거부하고 사상(Sache)을 직접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상학적 방법론은 서양의 종합적이고 논리적인 방식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화두’를 붙들고 일시에 진리를 꿰뚫어보려는 동양의 선(禪)과 비슷하다 하겠다.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사태를 직관함으로써 그런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진리를 확보한다는 말이다.
참고적으로 이런 관계를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에 벌어진 진리 논쟁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수백 년 이상 내려온 자신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이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예수가 보기에 그들은 잘못된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었다. 모세를 출발점으로 삼는 율법이 비록 좋은 뜻으로 시작되었겠지만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감추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 왜곡의 길이 시간과 함께 더 심화하면서 그런 것이 참된 것으로 인식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게 곧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이다. 이에 반해서 예수는 그런 모세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선입견 없이 어떤 사태를 직접 치고 들어감으로써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수와 바리새인 중에서 안식일을 정확하게 이해한 쪽은 어디일까? 우리가 질문할 필요도 없이 예수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수는 진리를 본 사람이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사람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어떤 세계를 본 사람이야말로 현상학이 제기하고 있는 ‘사상 자체로’ 들어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하인리히 오트가 설명하고 있는 하이데거 사유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서 검토하자. 이 특성은 물론 현상학적 원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 본원적인 것, 또는 시원적(始原的, anfänglich)인 것과 지열적(枝劣的, abkünftig)인 것이라는 사유도식은 <존재와 시간>, 그리고 하이데거 후기 사상에서도 계속해서 출현한다. 여기서 특히 ‘시원적’이라는 부사가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하이데거는 늘 모든 현상을 시원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반면에 지열적인 것은 시원적인 것에서 나와 드러난 것들을 가리킨다. 기독교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시원적인 것이며, 이 세상은 지열적인 것이다. 오트에 의하면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은혜를 뚫고 나가 지열적인 것에서 본원적인 것으로, 즉 ‘사상 자체로’ 돌진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현상학의 과제이다.
2. ‘해석학적 순환’은 하이데거가 사유하는 근원적 방식에 속한다. 해석학에서 이 순환은 일반적으로 ‘부분’과 ‘전체’가 서로 순환적으로 해석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뜻인데,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와 사유의 순환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사유를 통해서만, 그리고 사유는 존재를 통해서만 이해된다. 이 두 세계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연관되지만 동일한 개념은 결코 아니다. 자칫 존재와 사유가 순환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이미 그런 오류를 극복하고 있다. 여기서 순환오류라는 것은 A를 통해서 B가 증명되며, B를 통해서 A가 증명된다고 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증명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게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기 때문에 연역이 아니라 명시화에 핵심이 있으며, 증명이 아니라 지시와 이해와 추적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3.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구조개념은 결정적인 의미가 있다. 우선 오트가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요약해보자.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는 본질적으로 현존재에 속해 있고, 현존재의 ‘기초적 구조’(Fundamentalstruktur)를 뜻한다. ‘구조’는 ‘구조물’, ‘접합체’를 의미한다. 한 사상(事象)의 구조, 혹은 구조들은 ‘개장(開場)’될 수 있다. 우리는 껍질을 뚫고 들어가, 불확정한 다양성 속에서 사상의 첫 인상을 뚫고 들어가 사상 자체가 본래 어떻게 건축되어 있는지 인식한다. 그러니까 구조들을 개장하는 길은 은폐와 가상적 외양과 잠정성을 뚫고 사상 자체에 이르는 현상학적 길이다.
구조개념에서 흥미 있는 것은 사상이 하나의 구조물로서, 자체 질서정연하고 의미 있는 접합체로 사유된다는 것이다. 사상이 구조물로 사유된다는 게 무엇일까? 여기에 ‘다리’가 있다고 하자. 그 다리는 그것 하나만으로 다리라고 할 수는 없다. 강이나 내, 기둥, 다리 양쪽의 땅 등등이 연결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철, 나무, 시멘트 등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훗날 하이데거는 사물을 ‘사중자의 회집’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통찰도 역시 이런 구조개념에 의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구조개념이 신학 작업과 어떻게 상응하는지에 대해서 오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어 본다면, 신앙의 개념이 보통 분리시켜서 정의할 수 있는 지식, 동의, 신뢰라는 세 가지 개념을 단순히 첨가함으로써는 규정될 수 없다. 도리어 우리는 신앙의 유일하고 고유한 구조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58).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
하이데거의 철학을 실존철학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존재철학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비록 그의 사유 구조 안에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존재를 설명하고 드러내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건너뛴다면 그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앞에서 잠간씩 다루기는 했지만 여기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우선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자들 뿐이다. 나무, 시냇물, 돌, 고양이, 코스모스 같은 존재자들은 우리의 주변 세계이며, 그것들을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사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이지만 그 존재는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존재자들의 존재를 질문해야만 할 것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질문이 가능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존재자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질문이 가능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현존재(Dasein)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존재를 묻는 존재자는 인간이다. 인간의 존재양태는 질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질문하면서 존재한다. 즉 질문할 능력이 있을 때 인간은 존재한다.”(59). 여기서 오트의 설명을 좀더 인용해보자.
현존재에게서 현존재의 존재에 있어서 문제되고 있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를 ‘실존’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존은 “그 자신이거나 혹은 그 자신이 아닐 수 있는 (현존재의) ...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실존은 단순히 ‘현존재’에 대한 정확한 동의어만은 아니다. 도리어 현존재는 존재자이고, ‘실존’은 이 존재자의 특수한 존재양태이다. 현존재에게는 실존이 문제된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에게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문제된다. 현존재에게는 현존재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가 문제된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는 ‘실존’이라 부른다. 현존재가 선택해야 할 현존재 자신의 가능성으로 ‘미리’ 각기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현존재에게 있어서 본질적이다. 그런데 바로 현존재의 이러한 ‘미리 자기됨’(Sich-voraus)을 실존이라 부른다.(60)
위에서 인용한 오트의 설명은 존재와 현존재와 실존의 연관구조를 적절하게 해명하고 있다. 존재질문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현존재로서 실존이라는 존재를 갖고 있다. 즉 현존재의 존재는 곧 실존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명제이다. “현존재는 존재자이고, ‘실존’은 이 존재자의 특수한 존재양태이다.” 이 명제 자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른 생명체나 사물은 존재질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존이 없으며,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양태가 곧 실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현존재에게 본질적인 ‘미리 자기됨’이 실존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Sich-voraus는 ‘자기를 전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사유하는 것이 곧 실존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인간은 물론 죽음, 불안, 부조리, 두려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곧 인간의 ‘미리 자기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는 ‘존재’를 새로운 지평에서 언급하기로 작정했지만 그것의 출발은 어쩔 수 없이 현존재인 인간과 그 현존재의 존재인 실존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미묘한 긴장이 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가 지속적으로 질문하려는 대상은 ‘존재’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결국 현존재라고 일컬어지는 인간과 그의 실존이라는 점에서 실존철학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분석이 없다면 존재질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그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가리켜 기초 존재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론들이 이 기초 존재론에 의존하고 있다. 학문들은 근본적으로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그러한 학문들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 속에서 예시되어 있다. 예컨대 역사학은 역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데, 이 역사와 역사인식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 속에 예시되어 있다. 역사와 역사인식은 현존재 자체가 현존재의 구조에 따라 한 역사적 존재자라는 점에서 역사와 역사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오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하이데거 해석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여기서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존재의 구조의 분석이지, 일종의 ‘실존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실존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질문의 범위 안에서 방법적으로 필요한 한 걸음이다. <중략> 그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실존’을 중심적, 혹은 배타적 주제로 삼는 시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63)
세계내(內)존재와 신학적 객관성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위한 첫 걸음으로서 우리는 이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 구조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오트에 의하면 여기서 나오는 결과들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신학적 사유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그 이외의 모든 관계 방식들보다 본원적이고 우선적인 것이다. 예컨대 현존재의 실존론적 토대가 불안이라고 보더라도 그것도 역시 세계내존재라는 사실보다는 지열적 차원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계내존재는 이 지구라는 세계의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실존론적 차원을 의미한다. 이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인식’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이야말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가 갖고 있는 특수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핵심을 일단 정리한다면, 하이데거는 주관주의적 인식론, 더 정확히 말해서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를 극복하고 인간의 인식행위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존재양태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오트의 설명에 따라서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한다고 할 때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있고 인식당하는 객체인 어떤 대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데카르트가 ‘코기토 에르고 숨’ 명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유하는 주체에 모든 존재론적 토대를 놓는 방식이 바로 이런 주객도식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유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어떻게 그 구체의 내면적 영역으로부터 나와서 다른 외면적 영역 속으로 들어가며, 인식이 어떻게 하나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며, 대상 자체가 어떻게 사유되어 결국에는 주체가 그 대상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영역 속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하이데거가 문제로 삼는 것은 사유의 과정에서 주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 객체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한 마리의 토끼를 본다고 하자. 토끼를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는 토끼라는 대상의 모양이나 촉감을 통해서 그것을 토끼라고 인식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매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 토끼를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든지, 아니면 토끼를 의학실험용으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내가 객체를 인식한다고 보는 게 우리의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인식 과정에 대한 배후 질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토끼라는 대상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이다. 즉 현존재가 주체로서 객체를 인식하는 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결국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고 이 세상을 양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인식하는 그 현존재의 존재양식이 곧 세계내존재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존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작업은 질문의 지평을 현존재의 인식 방법론이 아니라 그 인식의 존재양식으로 돌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관이 어떻게 객관에 도달하느냐, 하는 질문으로서의 인식문제는 표면에 머물고 만다. 그 까닭은 그것이 ‘영혼’과 ‘세계’ 이 두 가지를 거짓되게 고립시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고, 도대체 주관성과 객관성 같은 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비로소 만들어 주는 저 진짜로 관계되어 있음을 아직 전혀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5).
오트에 의하면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통해서 뚜렷해지는 것은 실존론적 분석론이 근본적으로 ‘선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하이데거 철학 자체가 선험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철학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있는 현상학이 그런 선험적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드러나서 작용하고 있는 사태와 원리들이지만 하이데거는 그런 것들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주객도식에 의한 인식론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식론 사이에 결과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주객도식에 의하면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은 어떤 사실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주체가 됨으로써 결국 이 세계는 도구적 대상으로 떨어지게 되겠지만 현존재의 인식행위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하이데거의 인식론에 의하면 존재의 자유가 훨씬 적극적으로 확보됨으로써 세계는 결코 도구적인 대상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이 신학과 맺는 연관성을 오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계를 인식하는 작업이라 할 신학도 ‘주관’과 ‘객관’을 정적(靜的)으로 고립시켜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이분법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가 구분되어 있고, 인식되는 하나님이 또 하나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식으로 주관과 객관을 고립시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식의 차원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작용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지만 그의 그 존재성도 역시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는 아니다. 오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만남이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인식할 수 있는 선험적 사건으로서의 인식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오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예를 들자면, 신인식에 있어서(히브리어 단어 jada', 즉 ‘알다’의 완전한 실존적 의미에 있어서) 사람과 하느님이 미리부터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어야 할 객관으로 대립될 수는 없다. 만남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만남에서야 비로소 하느님이 누구시며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다. 하기는 하느님은 그분이 사람과의 만남을 도외시하고도 하느님이시다. 그분의 만남은 그분의 자유로부터 유래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명제도 하느님과의 만남의 이해로부터만 비로소 해명된다. 그 반대로 사람은 사람이 하느님과 만나는 것을 도외시하고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은 어느 경우에나 하느님과 대결하고 있다.(69)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이데거는 인식의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그것의 지평을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이라 할 수 있는 세계내존재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의 철학적 착상에 근거해서 우리는 신학과 설교의 주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매우 강력한 현상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독교인 개개인의 신앙적 경험을 절대화하는 그 오류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작용과 더 나아가 그것에 근거한 인간의 결단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삼는다는 것은 흡사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자연과학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실존론적 차원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서 거의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라는 말을 우리의 용어로 바꾼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마저도 우리의 주관주의적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안에 들어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주관적 사유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새롭게 열리게 되는 미래를 향해서 인식론적 태도를 열어놓는 반면에, 이전의 모든 인식론적 구조와 원리의 잠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오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도리어 다음과 같은 처리방법이 우리에게는 현상학적이고 이에 따라 신학을 위해서 속박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신학이 모종의 표준적이고 방향 지시적이며 존재론적인 개념들과 원리들을 전제하지 않고, 만남, 사유라는 의미에서 계시와 신앙 자체의 언제나 이미 주어진 행위, 즉 발생사건으로부터 출발하고 아무 편견 없이 그것을 서술하려고 착수하는 것이다(72).
존재론적 해체의 방법
하이데거의 궁극적 관심은 존재질문이었다. 그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앞에서 몇 번 지적했듯이 서양 철학사가 ‘존재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양 철학사에서 망각된 존재의 지평을 살려내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존재론적 틀과 인식론적 방식의 배후로 돌아가서 ‘존재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서양 철학사의 존재론을 해체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철학사적 전통을 모두 폐기 처분하려는 게 아니라 그 누구보다 훨씬 철저하게 전통과 대화함으로써 망각된 존재의 명료화를 향해서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하이데거의 이런 작업이 또 하나의 철학적 사유방식을 제시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지난 전통적 사유를 시원적 차원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사유의 사유이지 또 하나의 사유 방법론은 아니다.
이제 오트가 ‘존재론적 해체의 방법’이라는 주제로 설명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시도를 차분하게 따라가자.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역사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현존재는 늘 그것의 사실적 존재에 있어서, 즉 그것이 이미 어떻게 있던 대로 그대로이고 그리고 이미 ‘무엇’이었던 그대로이다.”(Sein und Zeit, 20). 사유로서 드러나야 할 존재의 통로인 현존재는, 즉 인간은 그 존재의 힘에 의존해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그 흔적인 철학사이며 자연과학의 발달사이며, 인류사이고 문화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현존재는 존재질문이라는 구도 안에서 중심적 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존재만이 존재를 질문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와 결탁되어 있다는 점에서 존재는 결국 역사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존재이해에 관한 현존재의 역사는 바로 철학적 사유의 전통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시 그런 철학적 사유의 전통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질문의 논술은 역사적인 질문인, 질문 자체의 고유한 존재의미로부터 자기 자신의 역사를 배후 질문하라는 지시를 듣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한다면 고유한 질문 가능성들을 충분히 소유하고서 과거를 실증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하여 존재질문의 논술이 역사학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Sein und Zeit, 20).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질문은 연대기적인 질문이라거나 철학적 정보에 속하는 질문이 아니라 사상적(sachlich) 질문 자체에 속한다.
이런 역사적 질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적 질문이 가능하려면 존재질문이 가능한 현존재를 완전히 전체적인 틀에서, 그리고 역사적 깊이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자칫 전통이 일종의 도그마가 되거나 진부한 원리로 떨어질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역사주의적 존재론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고대 존재론적 전통을 존재질문의 단초에 의한 본원적인 경험으로 대체, 또는 해체하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려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무조건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비록 존재질문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길을 가고 있지만 끊임없이 전통과의 대화를 유지하고 있다. 존재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체계적인’ 업무는 전통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형태로 수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역시 그는 사유의 사유자인 셈이다.
그가 말하는 전통과의 대화는 기존의 철학자들이 밝혀놓은 길을 단순히 따라간다거나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런 데서 발생하는 지열적 체계를 꿰뚫고 ‘시원적인’ 경험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서만 현존재의 질문은 결국 존재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신학자들은 신구약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가 창조한 세계를 해명하는 자들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작업은 그런 과거의 문서와 전승을 적절하게 연구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수준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이러한 방식의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 하나님을 사유했던 사람들의 흔적만 따라가는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각각의 시대에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경험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시원적 경험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고정된 것으로 자리를 잡은 체계를 해체하고 그런 사유로 나타난 하나님을 ‘사상적으로’(sachlich) 접근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신학적 전통에 대한 시원적 인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세계를 사상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인문학적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태도는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신학적 인식과 사유의 근원을 향한 직관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 계시의 주도권을 전제하는 것이다.
목사님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라는 소제목 아래 첫줄..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존철학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존철학이 맞겠죠?
이제야 4장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