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존재의 역사

철학적신학 조회 수 1640 추천 수 0 2015.01.14 09: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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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역사

 

 

앞 시간에 나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지난 2천년 이상 역사를 계속해온 여러 철학 사조의 하나가 되거나 또한 또 하나의 철학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그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복원한다거나 데모크리투스의 원소론을 현대 물리학의 논리에 맞도록 재구성한다거나 아니면 언어철학이나 과정철학 같은 여러 철학 방법론을 구상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지난 서양의 철학사가 질문하고 사유했던 그 근원에 대해서 배후로 돌아가서 다시 질문하려는 것이다. 그 질문과 대답이 옳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질문을 근원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하인리리 오트는 <사유와 존재>에서 하이데거가 어느 젊은 대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형이상학의 표상하는 사고로부터의 뒷걸음(Schritt zurück)’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성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뒷걸음이라는 제목만 보아도, 그리고 그 제목이 말하는 것을 본다면 하이데거가 본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뚜렷하다. 하이데거는 어떤 철학적 체계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체계들이나 이론들이 모두 하고자 했던 것으로 돌아가고자한다. 그 사상 자체를 사유하고자 한다. 즉 체계와 이론이 모두 그 개념들의 도움으로 접근하고자 감행하였던 사상 자체를 사유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제계들을 뚫고 나가서, 모든 체계들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돌아가고자 시도한다. 즉 철학자들의 과제로 주어졌던, 사유해야 할 것은 단순히 철학의 수행된 사유 속에서 명료해지지 않았다(115, 116).

 

철학의 사유에 의해서 명료해지지 않은 그것이 곧 존재이다. 이제 우리는 1935년 이후 현저하게 문체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의 방법론적 엄밀성을 뛰어넘어 시적인 언어로 구사하고 있는 존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물론 <존재와 시간>이나 1929년 프라이부르크 교수 취임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존재가 중심 주제였지만 존재 문제를 직접 치고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무()개념을 통해서 우회하고 있었지만 하이데거 연구가들이 전회(轉回)’의 시점이라고 일컫는 1935년 이후로 그는 훨씬 직접적으로 존재에 천착하게 된다. 그 첫 걸음은 존재의 역사이다.

 

존재의 역사개념에 대해서

 

하이데거가 존재에 역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철학적 사유가 역사적 토대에 매우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걸 보면 그의 존재 개념은 이런 역사적 한계와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 지평과 관계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달리 그의 존재 개념은 역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논리를 오트의 설명에 따라서 차근하게 따라가 보자.

우리가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하이데거는 사유를 사유하려고 하는데, 그가 사유하려는 사유는 역사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가 말하는 사유는 인간의 주관주의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가 현존재의 사유 활동을 통해서 자기를 비()은폐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존재 질문이 가능한 현존재가 없으면 존재의 사유는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현존재는 역사의 과정에서 그런 사유 활동을 계속해왔다. 만약 존재가 이런 역사적으로 활동하는 현존재의 사유를 통해서 이 세계에 자신을 드러낸다면 당연히 역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존재는 이처럼 영속적으로 도래한다. 영속적으로 도래할 때 존재는 인간을 기다리면서 도래한다. 이러한 존재의 도래를 그때그때마다 언어로 나타내는 일이 사유의 유일한 사상이다.”(Brief über den Humanismus, 118). 여기서 핵심은 사유의 역사가 곧 존재의 역사라는 점이다. 예컨대 헬라 철학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뒤로 중세기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철학적 사유의 역사는 곧 존재의 역사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서양 철학사가 존재망각의 길을 걸어왔다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분석과 사유의 역사가 곧 존재의 역사라는 주장은 상호 모순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의 모든 전통과 작업을 존재망각 개념으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있다. 그는 서양 철학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서양철학의 사유를 사유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철학은 자신들이 존재의 역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존재의 역사에 참여한 셈이다. 예컨대 물고기들이 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수영 기술을 익혀왔다는 것과 비슷하다.

또 하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의 존재 분석은 현상학 방법론에 의한 선험적 배후 질문인데, 이 선험적인 지평과 역사적 지평이 도대체 상응하는 개념일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 질문이 바로 선험적이기 때문에 바로 존재는 역사적이라고 한다. 서양적 사유가 하나의 역사로 묘사되는 이유는 1) 상이한 시대에 상이한 것이, 그리고 상이하게 사유되었기 때문이고, 2) 이처럼 시대를 따라 모종의 시종일관성, 모종의 필연성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119). 말하자면 현존재의 주관주의적 사유와 판단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사유로서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규정된 것으로서 사유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사유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 스스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역사라고 할 때 그 역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연대기적 성격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 개념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주관을 뛰어넘는 시원적 역사라 할 수 있다. 흡사 우리가 신적인 계시의 역사를 언급할 때 생각하는 그런 역사이다.

그런 존재의 역사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특정한 시기에 작동되던 그런 특징을 서술함으로써 이런 존재의 역사를 설명한다. 각각의 시기는 사유의 사상(事象)과 주제를 사유하는 고유한 방식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헬라인들은 피지스, 즉 자연을 오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사유했는데, 그런 피지스가 스콜라주의에서 또 다른 개념으로 사유되었고, 근대와 현대의 자연 이해가 또 다시 고유하게 변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사유의 역운(歷運, Geschick)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흐름은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요인의 집합의 결과로서 단순히 우연하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운명, 하나의 내적 필연서, 하나의 통일적으로 철저하게 주장(主掌)하는법칙에 순복하다.”(119).

 

헤겔과의 차이점

 

그가 말하는 역운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전환한다면 계시와 섭리가 결합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방식을 따라가면서 그가 철학과 신학의 미묘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칼 바르트의 원역사가 시원적이고 선험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안고 있듯이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개념도 역시 구체적인 사유의 역사를 사유하면서 훨씬 근원적인, 선험적인 역사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적인 신론에 근거해서 절대정신이 지배하는 역사의 완성을 내다보는 헤겔의 존재의 역사와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하이데거 자신이 그 차이를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사유의 사상(事象)이 무엇인가? 헤겔의 경우에 사유의 사상은 절대적 사유 속에서 존재자로 사유된 존재이고, 절대적 사유인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존재가 사유의 사상이지만 이 존재는 존재자와 차이가 있는 존재이다. 즉 헤겔에게는 그런 차이보다는 절대정신이 중요한 잣대로 등장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그 중심에 나선다.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존재가 존재자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것도 아니다. 존재자의 존재는 가능하지만 존재의 존재자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존재자 없이 존재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구별하는 게 하이데거 철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둘째, 사유의 역사와 대화할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인가? 헤겔에게는 철학사와의 대화를 위한 표준이 이전의 사유자가 사유한 것의 능력과 범위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역시 역사적 전승과의 대화를 위한 표준을 찾고 있기는 하지만, 사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되지 않은 것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셋째, 대화의 성격은 무엇인가? 헤겔은 지나간 철학역사와의 대화가 지양의 성격이지만 하이데는 지양이 아니라 뒷걸음(Schritt zurück)이다. 지양은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된 구역으로 집중하게 되지만 뒷걸음은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영역을 지시한다.

하인리히 오트에 의한 헤겔과의 세 가지 차이점 중에서 두 번째로 진술된 사유되지 않은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유된 것은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사유된 것이 그것의 본질 공간을 얻는다.” 이런 그의 사유방식은 동양의 노장과 매우 흡사하다. 산봉우리를 말하지 않고 깊은 계곡을 말하는 것, 양보다는 음을, 있음보다는 없음을 통해서 궁극적인 세계에 도달하려는 도()와 비슷하다. 과연 하이데거가 사유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유되지 않은 것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사유한 이데아를 직접 밝히려 하지 않고 오히려 플라톤에게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유의 근본경험을 인식의 목표로 삼는다. 하이데거가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사유되어야 할 것은 바로 사유된 것에 있다기보다는 사유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되지 않은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Nichts)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유가 출현하고 또 다시 돌아가는 일종의 사유공간이다. 사유된 것은 아직 사유해야 할 것이 아직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유해야 할 것은 일종의 한계로서 사유되지 않은 채 숨어있는 채로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하이데거는 지금 철학의 전통과 대화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유의 역사, 즉 존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화의 방식이 헤겔처럼 사유된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유되지 않는 것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사유는 늘 사유되지 않은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유는 모든 사유된 것 배후에서 그 해당되는 사유의 사유되지 않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사유되지 않은 것을 목표로 질문할 때 그 해당되는 사유와 대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유와 더불어서 같은 사상(事象)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유된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는 철학적 체계를 우리의 대상으로 삼아 객관화하고 만다.

하이데거의 이런 사유방식이 우리에게 약간 낯설기는 하지만 오히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친근한 느낌일 들 정도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활동하고 계시하는 하나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는 가르침을 자주 받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곧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와 비슷하기 때문에 인간의 주관적 판단과 사유는 늘 부분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성서의 진술은 곧 사유되지 않은 것(이것은 곧 인간의 주관주의적 인식론의 한계일 수밖에 없는데)을 사유함으로써 그것의 근본 대상을 우리가 마주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는 곧 신학의 계시와, 하이데거의 사유되지 않은 것은 곧 하나님의 은폐성과, 인간의 주관주의적 인식론의 한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지적은 성령에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독교의 인간론과, 그리고 그의 미래 우위적 시간성은 곧 기독교의 종말론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이런 도식적 연결이 부분적으로 비약될 가능성이 많긴 하지만 기본적 착상에서는 상통할 수 있다.

 

사유의 사상(事象, Sache)

 

사유되지 않은 것과 연관해서 이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좀더 심화해보자. 하이데거의 근본 질문인 존재는 사유의 사상’, 즉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즉 존재자 자체는 아직 사유의 사상이 되지 못한다. 존재만이 곧 사유의 사상이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유의 사상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사유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분명히 존재자이다. 이런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워서 인간은 철학의 길로 접어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자들의 경이가 아니라 사유의 경이로움을 지적한다. “일찍이 그리고 갑자기 하나의 사유가 있다는 이것을 누가 놀란다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이 세계 안에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그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지능이 발달해서 가능했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이런 주관주의적 사유방식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 인간의 사유가 늘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즉 인간의 주관주의적 사유는 훨씬 근원적인 어떤 것(Sache)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유해야 할 것, 즉 사유의 사상은 단순히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와는 구별되지만 존재자에게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그 무엇, 즉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는 존재자와 더불어 밀접하게 상호 공존한다.”(127). 존재자와 존재의 변증법적인 상호공존이 곧 존재자의 존재이며, 그것이 곧 사유의 사상이다. 하인리히 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명히 우리는 존재자에 대하여 숙고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존재자를 통하여, 그리고 사유의 주관들인 우리 자신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존재 자체가 존재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 존재는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이 존재자의 존재로서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존재는 동시에 이 존재자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사유해야 할 것으로서의 사유되지 않은 것은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차이 속에 있는 그 존재 자체이다. 자체 상 결코 존재자가 아닌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우리의 숙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존재는 사유의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127)

 

나는 하양에서 가까운 환성산을 가끔 올라갔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그 자연을 보면서 이런 자연 현상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개입할 틈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존재는 현존재의 사유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는데, 숲은 현존재의 사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갈 것이다. 숲이라는 존재자는 그것을 숲이라고 사유하는 현존재의 사유로 인해서 숲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말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해명은 늘 실증적이고 경험론적인 지평에서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투명하지 않다. 우리가 그의 해명을 이해하려면 이런 경험론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곧 선험성’(a priori)이다. 우리는 숲만 볼 게 아니라 숲으로 경험되는 것 너머의 사상(事象)을 보아야 하는 데 그것이 곧 숲의 존재이다. 비록 외면적으로는 숲이라는 존재자가 현존재의 사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경험 너무의 지평에서 본다면 그것을 숲으로 사유하는 현존재의 사유행위가 그 숲을 숲으로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이 사유행위는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사유의 사상인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능력이다.

 

존재망각의 길

 

우리는 앞에서 존재의 역사개념에 대해서 검토했다. 존재는 현존재의 사유행위에서 고유한 역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이 논점의 핵심이었다. 존재자의 본질을 사유하려는 인류의 사유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유의 사상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서양 철학사는 인류의 주관주의적 사유 능력이 발현된 것이 아니라 존재가 고유한 방식으로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의 길을 걸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하이데거가 존재망각의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양 철학의 사유가 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게 그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존재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존재가 현존재의 사유에게 자신을 사유해야 할 것으로 보내주는 것이 곧 존재의 밝혀줌의 역사’(Lichtungsgeschichte)인데, 실제로는 이 역사가 곧 존재망각의 길이라는 것이다. 존재가 자기를 사유하도록 내어주는 그 밝혀줌의 역사에서 오히려 존재가 망각되었다는 이 사실을 하이데거는 철학의 독특한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서 해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오트의 설명에 따라 이 드러냄의 초기인 플라톤의 사유와, 니체에 의해서 일어난 마지막인 기술을 다루어보겠다.

 

플라톤의 이데아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해석함으로써 서양 철학사에서 전혀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플라톤 이전에 진리는 존재자의 비은폐성이었지만 플라톤에 의해서 진리는 바르게 바라봄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보았던 탈레스처럼 존재자에 대한 엄정한 분석과 판단이 아니라 그런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이데아를 정확하게 바라봄으로써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인 비은폐성에서 이데아를 향한 인간의 인식론적 토대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늘 변화무쌍하고 잠정적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아무리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 본질을 파악해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그런 것보다 우선하는 것으로서 바르게 바라보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은 정당하다. 동굴 안에서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즉 안의 바라봄에서 밖의 바라봄이 우선적이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알레테이아가 이데아의 멍에 밑에 떨어졌다.”고 표현했다. 즉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보다는 이데아를 향한 인간의 인식론적 토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이런 사유를 가리켜 주관주의의 근원이라고 해석한다. “플라톤의 사유에서 형이상학이 시작된 것은 동시에 휴머니즘의 시작이다. 이 말은 여기서 본질적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 가장 넓은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이에 의하면, ‘휴머니즘은 형이상학의 시작과 전개와 종언에 연결된 진행을 뜻한다. 여기서 생기는 진행은 인간이 각기 다른 관점에 따라 매번 그러나 고의적으로 존재자의 중심으로 옮겨가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최고의 존재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131). 플라톤의 이데아는 형이상학의 시작이며, 그것에 기초를 두고 서양의 형이상학의 계속적으로 인간 중심의 사유를 발전시켜왔다는 말이다. 그 종점에는 바로 현대의 기술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하이데거는 기술은 완성된 형이상학이다.”라고 설명한다.(Vorträge und Aufsätze, 80).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형이상학의 길이 이제 권력을 향한 의지라는 니체의 철학에 의해 현대 기술로 끝맺음을 한 셈이다. 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유가 휴머니즘이라고 했는데, 결국 인간의 주관주의적 사유가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현대의 기술 시대에 이르러 극대화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형이상학의 결말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의 길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형이상학의 종결을 넘어서서 또 하나의 시작으로 이행하고 있는 중이다. 왜 니체의 철학이 형이상학의 완성이며, 그것이 곧 현대 기술로 나타나는 것일까?

여기서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는 단지 정치적인 의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이미 갖고 있는 그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극대화하는 그 무엇이 곧 권력에의 의지이다. 인간의 의지는 그에 의해서 이미 의지로 나타난 것(sein Gewolltes)이다. 이 세계가 곧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의 산물이라는 논리에 이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피지스, 로고스, 일자, 이데아, 에네르게이아, 실체성, 객관성, 주관성 같은 사유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형이상학이 불필요한 시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 이후, 즉 기술 시대에서 전면에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역설이다.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사유가 아닌 어떤 것인 기술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과 그것의 완성인 기술 사이에는 역설이 개재한다. 여기서 기술이 형이상학적 사유의 결과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의 본질을 원소라고 본 것에 근거해서 원소를 중심으로 한 기술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연결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기술은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인간의 근본 자세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완성 시대에 등장하게 된 현대기술의 속성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인 이 세계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역운을, 이를 좀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기술의 속성

 

오늘 인간의 테크놀로지를 최고의 업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술 메시아니즘이 우리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정신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은 피조물의 절대화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성서의 진술과도 맞아떨어진다. 현대기술에 대한 그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와 대결하고 있는 성서의 메시아니즘에 어떤 깊이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1) 하이데거는 니체의 하나님은 죽었다는 말을 해설하면서 현대 기술은 자연, 세계, 존재자 일반을 철저하게 대상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2) 기술 시대에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자세는 계량적인 성격이 있다. 존재자는 그 존재자의 존재와 상관없이 인간에 의해서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말이다. 과학은 존재자의 계량적 대상화의 한 방식으로서 의지에의 의지 자체가 정립한 조건이고, 이 조건을 통하여 의지는 자기 본질의 지배를 확보한다. 그러나 존재의 모든 대상화는 존재자의 조달과 확보로 끝나지 않고 존재자로부터 대상화의 계속진행의 가능성이 마련되기 때문에 대상화는 존재자를 고집하고 있고 이 존재자를 어느새 존재로 간주한다.”(Was ist Metaphysik?, 39)

3) 하이데거는 기술 중심의 패러다임을 의지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곧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 발생한 통찰이다. 이제 의지는 단지 의지만을 지향할 뿐이지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외면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기술이 끊임없이 인간의 의지만을 지향함으로써 인간복제까지 넘어가려는 현상이 바로 이런 의지에의 의지이다. “만물에 대한 이러한 무제약적 처분이 기술이다.”(135). 이런 의지에의 의지에는 기본적으로 진리의 시원적 본질이 상실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지라는 것이 결국은 주관주의의 극단화이기 때문이다.

4) 하이데거에 의해서 사유된 기술은 설비’(設備, Ge-stell)이다. 기술에 의해서 모든 존재자는 인간을 위한 설정 가능한 존립체(Bestand)가 될 뿐이다. 여기서 존재자와 존립체의 차이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자세하게 탐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전에는 대상이 늘 대상으로 있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현대 기술에 의해서 존재자들이 인간에 의해 설정되어야만 그것이 확인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되고 말았다는 점만 확인하면 충분하다. 기술이 존재자로서의 자연을 설비에 의해서 그것과 다른 존립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풍차는 단지 바람을 받아서 에너지를 일으키는 역할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즉 에너지를 보관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자이지만, 이제 핵발전 시설은 에너지를 마음대로 저장하고 변형하게 된다는 점에서 존립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기술이 인간마저 설정 가능한 존재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술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5) 모든 세계를 인간에 의해서 설정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가는 기술이 형이상학의 완성이라 할 니체의 의지에의 의지에 의한 마지막 현상인데, 이 의지에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역운(歷運, Geschick)을 거절한다는 게 하이데거의 분석이다. “의지에의 의지는 모든 것을 무역운적인 것 안으로 경화시킨다.” 무역운적이라는 말은 곧 무역사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이 세상을 설비하고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지에의 의지가 무조건으로 작동하면 존재의 역운은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사성은 변증법적이다. 기술에 의해서 인간이 무역운적인 것에 빠지면 빠지는 만큼 다시 역운적인 것에 의해서 추월당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기술 시대의 한 복판에서 형이상학과 기술의 역운적 성격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작업을 통해서만 인류는 세상이 단지 설비에 의해서 존립체에 머무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6) 하이데거는 단지 기술을 단죄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기술을 부정한 채 순수한 정신주의에 빠지거나 낭만주의적 복고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기술의 본질을 숙고함으로써 그 본질을 존재의 역운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역운을 감지할 때만 인간은 존재와의 본원적인 만남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가 볼 때 기술의 본질은 자체 상 기술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존재의 역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운성(die Geschickhaftigkeit der Geschichte)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개념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정리하고, 이어서 그의 학문적 엄격성과 예언적 성격의 결합에 대해서 해명함으로써 하이데거 철학과 맺어야 할 신학적 해석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앞에서 역운에 대해서 몇 번 언급했는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 역운은 무슨 뜻인가? 하이데거에게 역운은 존재자의 존재의 개방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 속에 자신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질문이 가능한 현존재인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제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이 떠오른다.” 또는 인간에게 그 어떤 것이 밝혀진다. 이러한 밝혀짐은 인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사유하는 사유의 사상인 존재에게서 일어난다.

만약 하이데거의 역운을 신학적 용어와 비교하려는 사람은 계시, 혹은 성령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리 계시의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는 일은 없고 간접적으로만 늘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그 무엇은 곧 하나님이다. 계시는 하나님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런 모순적인 존재양식을 명쾌하게 풀어내거나 규정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어떤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것과 하나인 계시는 이런 점에서 우리를 하나님 망각에 빠뜨리게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호렙산의 불, 출애굽, 구름기둥과 불기둥, 여리고 성 함락, 이사야의 환상 같은 경험이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경험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간학적 현상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행위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만 여전히 사유되지 않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런 긴장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신다.

 

역사 예언의 특징적 성향

 

오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역사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에는 예언적 성향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예언적인 성격이라는 말은 존재의 역사를 현상학적 접근 방식인 선험성에 근거해서 해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앞에서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가 미래적 우위론에 있다고 했는데, 이렇듯 아 프리오리의 시간의 역사를 말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예언적인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비록 기술 시대에 형이상학의 끝났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에게는 사유의 길마저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 형이상학과는 다른 시대가 왔다는 사실은 예언적 진술 이외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전달될 수 없다. 이는 곧 칼 마르크스가 윤리적판단과 요청을 포기하거나 혹은 포기한 체 하면서 그 대신에 자본주의의 절정과 파국,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및 계급 없는 사회가 필연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같다.” 위대한 사상은 거의 시의 방식으로 진술되고 있듯이 하이데거의 예언적 진술은 그 정당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훨씬 강력하게 만든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그가 사유하고 질문하고, 또한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포기에 대해서, ‘들길의 소박성에 대해서, ‘뒷걸음에 대해서 말하는 데서 그런 예언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트에 의하면 이런 진술에 하이데거의 독특한 파토스가 있다고 한다. 이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설비할 수 있는 기술의 본질과 대립하는 파토스라는 말이다.

이러한 파토스와 선험적인 사유라는 냉정함이 결합될 수 있을까? 한쪽은 논리와 합리를 뛰어넘는 예언적 지평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사상 자체로뚫고 들어가려는 철저한 학문 방법론의 지평인데 말이다. 오트에 의하면 하이데거에게는 이런 결합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런 결합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명쾌한 의식을 통해서 사유와 언어의 끝자락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 그것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칼 바르트가 신학적 실존의 자리를 놀라움이라고 말한 것은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가운데서 단지 인간의 주관주의적 종교경험만을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와 세계의 사태를 뚫고 들어간 다음에 그가 만나는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은 단지 놀라움을 일으키는 분으로만 고백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이러한 궁극적인 신앙의 자리를, 루돌프 오토의 <Das Heilige>에 나오는 누미노제라는 본원적 종교경험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하이데거는 어느 한 순간에도 자기가 말하는 존재를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아니 거꾸로 그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말이다. 하인리히 오트는 이런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유입하는 장래는 비형이상학적이고 극단적으로 비판적이고 자체적으로 꿰뚫어 밝히는, 밝은 사유이면서도 역운적이고 사상 자체와의 만남에서 자기 자신을 결연히 유지하는 사유이다. 이 사유는 아마 사리에 맞는 신학이 추구할만한 사유라 하겠다.(143, 역본에서 필요한대로 고쳐 적었음,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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