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언어의 세계와 신학의 세계

철학적신학 조회 수 1901 추천 수 0 2015.01.14 09: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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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세계와 신학의 세계

 

 

로고스

 

우리는 앞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사유, 언어, 세계의 구조 안에서 해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으며, 이 중에서 사유 문제를 어느 정도 충분히 다루었다. 이제 두 번째 항목인 언어가 왜 존재의 지평인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현존재인 인간이 존재의 역운에 응대하는 것으로서의 시원적 사유가 표상과 계량이라는 주관주의적 사유를 극복하는 것처럼 언어도 기본적으로는 역시 주관주의적 언어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아마 우리의 수업과정을 꼼꼼하게 따라온 학생들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점을 이미 포착했을 텐데, 그중의 핵심적인 것은 곧 데카르트 이후, 키에르케고르를 거쳐 20세기 초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꽃을 피운 주관주의의 극복이다. 약간의 시각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철학 사조는 일단 생각하는 인간의 주관을 철학의 기초로 간주한다. 그 사유하는 인간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근원이 밝혀지거나 물리적 본질이 밝혀진다는 생각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적 전통에 내재해 있다. 오늘 우리가 논의해야 할 언어의 주관주의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선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말을 한다고, 또는 말을 소유한다고 생각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은 그 언어를 통해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언어를 소유하고 처리한다는 뜻이다. 표면적으로는 당연히 인간이 말을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이런 현상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다. 처음으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어머니가 가슴에 안고 젖을 주면서 이 어린아이가 알아듣건 못하던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많은 말을 들려준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어느 순간에 그 언어를 따라하다가 그 언어의 의미를 포착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무엇이 발생하는 것일까? 어떤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그 아이가 어떻게 깨닫게 되는 것일까? 비로 우리가 몇 가지 언어 규칙을 설정하기는 하지만 근원적 언어 사건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 자체가 일으킨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헬렌 켈러와 그의 선생님이신 설리반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설리반 선생이 어린 헬렌 켈러에게 사물과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 깨우쳐 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헬렌 켈러는 모든 사물에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설리반 선생이 헬렐 켈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티알이이’, 즉 나무라는 단어를 알려주고 이어서 실제로 나무를 만져보게 해도 헬렌 켈러는 손바닥의 영어 단어와 촉감으로 다가온 나무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했다. 어느 날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로 데려가서 시원한 펌프 물을 손으로 만지게 하고, 이어서 손바닥에 워러라는 단어를 써주었다. 그 순간에 헬렌 켈러는 모든 사람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그 이후로 학습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언어 사건이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 자체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지 모른다. 인간이 어떤 사물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게 아니라 언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존재했다는 말인데, 이 언어의 근원적 사태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역운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요한복음이 진술하고 있는 언어에 대해서 한 대목 짚고 넘어가자. 요한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로고스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었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1:1-5).

 

우리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정도의 해석으로는 우리가 요한복음이 말하려는 세계를 충분히 따라갈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과 똑같은 분인 로고스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요한은 이 로고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출현했다고 진술한다. 아마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자해서 모든 사물을 언어로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창조사건을 헬라 철학의 로고스와 연결시킨 것 같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는데 사람은 여기서 제외된다. 창세기 기자가 의식적으로 이런 차이를 두었는지 아니면 단지 인간 창조를 강조하다가 우연하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일단 그렇게 구별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사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보도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이 창조 사건에 동참한다. 어쨌든지 창조 사건에 하나님, 언어, 인간, 세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작동되고 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언어이다.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그 창조가 언어로 일어났다는 두 가지 명제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존재론은 언어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소리와 문자로 전하는 도구인 언어를 하나님이라고 규정하는 게 정당할까? 언어가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때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를 구별해야만 이런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주의적 언어와 계시론적 언어를 구별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단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주관주의적 언어이고, 존재의 역운에 의존하는, 혹은 그것에 응대하는 언어는 계시론적 언어라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하이데거가 표상적 사유와 계량적 사유를 구분했듯이 언어에서도 역시 이런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문제를 좀더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설교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교회의 언어가 설교자의 주관적 자기표현인 경우가 있고, 또는 하나님과 계시의 근원에 응대하는 경우가 있다. 설교자가 성서를 해석해서 청중들에게 선포한다는 그 표면적인 현상만 본다면 이 두 경우를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겠지만, 또한 설교 현장에서 당장 구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또한 역사 과정에서 그런 차이가 구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십자군 출정을 독려하는 설교라거나 면죄부를 판매하는 설교 같은 것들은 역사 과정에서 설교자와 교회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세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가거나 그것을 강화하는 것에만 설교의 초점을 두었던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주관주의적 설교에 머문 것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큐티성서읽기나 강해설교유형들은 한결같이 주관주의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설교들은 거의 도그마를 강화하는 차원에 고정될 뿐이지 진리의 지평을 작동시키지 못한다. 바울이 비판한 동성애를 여전히 비판할 뿐이지 성과 윤리의 새로운 지평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존재의 집

 

기초적인 방향을 정리했으니까 이제 하이데거의 언어 존재론속으로 직접 들어가자. 독일 철학자들 중에서 하이데거만큼 독일어의 독특한 특성과 구조를 자유롭게 다룬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해서 독일어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언어와 철학의 관계를 확보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에게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가택에 인간이 거처한다. 사유하는 자들과 시작(詩作)하는 자들은 이 가택의 파수꾼이다. 그들의 파수는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말함을 통하여 이러한 개방성을 언어로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함으로써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한다.(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53)

식물과 동물은 그 환경 속에 퍼져 있으나 존재의 밝혀줌 속에는 들지 못하고 이 밝혀줌만이 세계이며, 그들은 자유롭게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다. ...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어떤 유기체의 표명도 아니고 생물체의 표현도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기호의 성격으로부터도 생각할 수 없고 의미성격으로부터도 아마 본질에 적합하게 생각할 수 없다. 언어는 존재 자체의 밝혀주고 감추는 도래이다.(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70)

 

우리가 일반적으로 언어를 의사소통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훨씬 심층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할 때 이것은 존재와 언어의 불가분성, 그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존재의 밝혀줌, 존재의 말건넴은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더 시원적인 면에서 볼 때 언어가 말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과 언어가 말을 한다는 것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려면 일단 하이데거가 제기하는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언어의 피상적인 해석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이런 언어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말하기는 표현하는 것이다. 2) 말하기를 인간의 활동이다. 3) 말하기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이고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한결같이 언어를 인간의 소유로 간주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언어가 인간의 주관 활동이라는 뜻이다. 이런 언어 현상은 우리의 삶에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시인이 시를 쓴다거나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도 결국 삶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 훈련이 능숙하게 된 사람들의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삶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시인들의 사유를 통해서 형상화된 시 세계는 그 시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고 드러내는 언어의 존재론적 작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언어의 말인 셈이다. 즉 그것은 언어사건이지 인간의 자기표현이 아니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표현이나 활동이 아니다. 언어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시 속에서 언어의 말하기를 찾는다. 찾는 것은 말해진 것의 시적인 것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 어느 겨울 저녁 ... 우리는 시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겨울 저녁의 묘사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미 임재해 있는 것을 묘사하지도 않고 장차 있을 것의 인상을 만들지도 않는다.” 오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론 말하기는 우리가 그것을 표현으로 표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가 그 본질에 있어서 우리에게 그렇게 표상되도록 누가 혹은 무엇이 보증하는가? 언어가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동시에, 그리고 먼저 언어가 말한다는 뜻이다. 언어가 말하는 것이지 인간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오트, 203 쪽에서)

 

어느 겨울 저녁

 

이제 언어가 말한다거나 또는 언어가 말하도록 존재가 명령한다는 하이데거의 해석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 저녁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들어보자. 우선 트라클의 시는 다음과 같다.

 

눈이 창가에 내릴 때

저녁 종이 길게 울리고

식탁은 여럿을 위하여 차려지고

집안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방랑하다가

어두운 오솔길로 문밖에 이른다.

은혜의 나무는 금빛으로 꽃피운다.

서늘한 땅의 물기에서.

 

방랑자는 조용히 들어선다.

고통은 문지방을 돌이 되게 했다.

그 때 순수한 밝음 속에 빛난다.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이 시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리는 저녁, 삶의 나그네들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선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빛이 감돈다. 인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물이 거룩해지는 순간이다. 하이데거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한다.

 

말하기는 겨울 저녁 시간을 명명한다. 이 명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확정 가능한 대상들과 표상들을 기호표시에다 매다는가? 그 명명은 제목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명명은 부른다! 부름은 불리는 것을 더 가까이 부른다. ... 이리로 부르는 것은 근처로 부르지만 그것은 또한 부름 받은 것을 원처(溒處, Ferne)에 내버려둔다. 그것은 이리저리로 부른다. 이리 임재 속으로 그리고 저리 부재 속으로 부른다. 눈내림과 저녁종의 울림은 여기서 우리에게 향하여 말해진다. 그것들은 부름 속에서 임재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지금 여기 이 방 안에 임재해 있는 것 중에 끼지 못한다. 어떤 임재가 더 고차적인가? 여기 방에 있는 것이 더 고차적인가, 혹은 부름 받은 것이 더 고차적인가? ... 부름은 물()들을 초대하여, 그것들이 인간에게 ... 관여하게 한다. 눈내림은 인간을 밤 깊이 어두워지는 하늘 밑으로 데려간다. 저녁종의 울림은 사멸할 자들로서의 인간을 신성들 앞으로 데려간다. 집과 식탁은 사멸자들을 땅에 매어둔다. 그러니까 명명된 물들은 부름 받으며 자기에게로 하늘과 땅, 사멸할 자들과 신성들을 회집한다. 이 넷은 본원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호향성(相互向性)이다. 물들은 이 넷의 사중자(四重者, Gevierte)를 자기에게 머물게 한다. 이처럼 회집하면서 머물게 함을 우리는 물의 물화라고 명명한다. 물들 속에 머무는 사중자가 세계이다. 명명에서는 명명된 물들이 물의 물화 속으로 부름 받는다. 물들은 물화하면서 세계를 전개한다. 세계 속에 물들이 머문다. ... 물화하면서 물들은 세계를 분만(分娩)한다.(오트, 사유와 존재, 204쪽에서)

 

하이데거에게는 인간적인 말하기는 아직 언어가 아니다. 인간적인 말하기는 사멸자들의 말하기로서 자기 자신 안에 존재론적 토대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말하기와 관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말하기는 철저하게 언어의 말하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시인들이 무언가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게 참된 말이 되면 자기의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소리와 문자로 나타나지 않은 언어의 말건넴에 응답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언제나 어느새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세계의 의미성에 대하여 그처럼 대립해 있을 때만 말할 뿐이다. 시원적 언어는 존재 자체이다. 존재는 언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말하기는 하나의 응대이다. “사멸자들은 사멸자들이 청종하는 한에서 말한다. 사멸자들은 구별(Unterschied)의 고요가 명하는 청종을 무엇이 유성화(有聲化)하는 말로 나타내는지를 세계와 물의 구별의 명령에서 추축해낸다. 그러므로 언어에서 스스로를 알아 차리어 청종하면서 추축하는 말하기가 응대이다. 그러나 사멸적인 말하기가 자신을 말해진 것으로서 구별의 명령으로부터 알아차림으로써 사멸적인 말하기는 그 방식대로 부름에 따르고 있다.”

이상의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일단 하이데거가 주관주의적 언어관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학생에게는 하이데거의 이런 해명이 거의 신비주의적인 진술로 들릴지 모르겠다. 흡사 마술사가 주문을 외움으로써 요정들을 불러내듯이 하이데거가 설명하고 있는 시인들은 시원적 언어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심부름이다. 위대한 시에서 우리가 전혀 새로운 존재의 차원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다만 시원적 사유에서도 우리가 질문한 것처럼 시원적 언어의 명령을 새겨들을만한 영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이런 일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라면 그 이외의 민중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아마 하이데거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에게 불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존재와 언어의 엄밀한 관계를 해명하고 있는 그에게 다른 부분에 대한 모든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접적으로 이에 대한 대답을 하이데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미 하이데거는 인간의 주관주의적 말하기와 시원적 말하기를 구분한 바 있다. 인간이 쏟아내는 대개의 말하기는 결국 이런 주관주의적 말하기라 할 수 있다. 비록 주관적 표현이지만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하기는 그렇게 말하도록 강제하는 존재의 역운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런 차이를 명확하게 포착하고 적당하게 구별하는 작업이 곧 철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리라.

 

대담(Zwiesprache)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언어해석을 좀더 정확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하이데거와 횔덜린 사이에서 벌어진 어떤 관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횔덜린과 하이데거가 살던 시기는 1세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직접 만난적은 없지만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자신의 철학적 구도에서 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대담이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서 주석했다. 그것을 모아놓은 책이 <시와 철학>이다. 오트의 설명에 의하면 신학자와 설교자가 성서 말씀에 대해서 갖는 관계가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신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만큼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통해서 존재의 역운과 사유와 언어의 관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약간 까다롭기 때문에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을 찬찬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접근해보자.

하이데거의 횔덜린 주석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주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담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횔덜린의 시를 자기 식으로 주석한다거나 아니면 횔덜린의 시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으로부터 들려오는 말건넴에 응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가리켜 오트는 극단적인 역사화라고 한다. 횔덜린의 주관이나 하이데거의 주관이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적 지평을 하나로 묶어내는 어떤 힘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그 본질에 있어서 의견제시(Meinen), 기호표시(Bezeichnen), 전달,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부름대답함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오는 말에 대한 일차적인 주석적 질문은 무슨 의견이 제시되는지, 무엇이 표현되는지에 대한 게 아니라 어떤 형태를 취하도록 무엇이 부름받았는가, 무엇이 말을 건네는가, ‘존재의 말중에 어느 것에다 대답이 되는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관건은 그 낯선 것을 주석해 내는 것(auslegen)’도 아니고 자기 것을 주석해 넣는 것(einlegen)'도 아니다. 참된 관건은 자기 것과 낯선 것의 대담 속에서 사상(事象)‘의 근처에 도달하는 것이다. 주석자는 여기서 과거로부터 울려오는 말의 사유 운동 속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주석자는 저 말을 이미 건네어준 동일한 사상, 즉 동일한 말건넘에 대립자가 되어 존재의 동일한 말에 대답하게 된다. 이미 과거의 그 말은 이미 존재의 동일한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즉 횔덜린의 시도 역시 존재의 말에 대한 대답이고, 하이데거의 주석도 역시 횔덜린과의 대담을 통해서 존재의 말에 대답한다. 이런 방식의 주석은 언어분야에서 주관주의를 철저하게 극복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대담 개념은 성서를 주석해야 할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성서 주석자는 성서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서를 자기의 주관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성서 기자들에게 말건넨 그 근원적 사태의 말걸음에 응대해야만 한다. 이런 해석학의 문제를 가다머의 지평융해개념으로 설명한다면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해됨으로써 새로운 지평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지평은 각각 고유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존재의 역운에 맞물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대담 개념을 성서 해석과 연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어보자. 예컨대 여기 동성애자들을 비판한 사도 바울의 편지(1:26,27)가 있다고 하자. 대개의 설교자들은 이 텍스트를 읽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의 청중들에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한다. 대담 개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면 우리는 일단 이 텍스트가 무엇에 대한 응대이었는가에 대해서 숙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여러 주석 방법을 통해서 이 텍스트의 지평을, 즉 바울에게 말을 건넨 사상(事象)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었든지, 아니면 인간의 품위였든지, 아무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삶이라는 지평을 어느 정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바울의 텍스트로부터 직접 어떤 말을 새겨듣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그 텍스트로부터 찾아내는 게 아니라 그 텍스트와 연관된 사상으로부터 말을 듣는 게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동성애자들을 바울과 똑같은 방식으로 비난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학의 언어적 세계

 

언어를 단지 인간의 주관적 표현이나 그런 표현을 위한 기호로 간주하지 않고 존재의 말걸음에 대한 응대라고 간주하는 하이데거의 언어 이해는 늘 성서 텍스트를 기준으로 작업하는 신학의 입장에서도 귀를 기울어야 할 대목이다.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대담 개념을 중개로 해서 신학 행위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차원에서 언어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하이데거가 폐기한 언어의 주관주의적인 오해를 신학에서도 가려내야 한다. 이 작업은 일차적으로 교의학과 설교학에 영향을 끼치는 성서의 주석학에 관계된다고 한다. 그런데 오트에 의하면 성서의 역사-비판적 주석이 바로 주관주의적 언어이해로 규정되었다. 역사 비평은 과거의 텍스트가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본래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데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가는 차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성서 증인들이 각개 명제를 가지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정확하게 발견해냄으로써 바울과 요한과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이사야와 시편 저자들을 주석해내면 안된다. 도리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들과 더불어서 대담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의 인도를 받아서 계시의 공통적 사상(事象)에 직면해 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이유는 우리가 그들 모두와 더불어서 하나의 성도의 교제에 속하기 때문이다.”(오트, 213,214). 성서 기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정화하게 파악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훨씬 본원적인 신학 작업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서 기자나 많은 신학자들도 역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들과 영적인 교제 안에 있다.

역사 비평을 뛰어넘는 대담 방식의 주석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우리가 성서 기자들과 함께 공통의 사상에 직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주관에 묶이거나 자기의 주관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 자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상태가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마 계시에 직면하는 일은 모든 신학자나 설교자에게 가능한 게 아니라 횔덜린이나 하이데거처럼 그런 세계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가나 시를 쓸 수 있다는 주장처럼 언어도단인 셈이다. 들을 귀가 있어야만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법이다.

 

둘째, 신학자들은 성서의 언어 속에 계시의 역운(Geschick)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신뢰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성서와 2천년 신학의 역사를 통해서 구성된 언어의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이런 역운을 단절시키는 행동, 즉 기독교 신앙의 동일한 내용을 다른 용어로 조작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언어 자체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자가 언어의 각인된 공간과 전통 안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족쇄에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계시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응답하도록 해방 받은 자이다. “참된 자유는 선택 가능한 무제한한 자의(恣意)가 아니라 오히려 먼저 오는 말건넴에 대한 응대의 자유이다.”(214).

계시의 역운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신학이 간혹 신학적 전통을 쉽사리 해체하고 새로운 용어를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예수를 갓 쓴 사람으로 묘사한다거나 하나님을 남성이 아니라 여신으로 바꾼다거나, 그래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른다는 것은 그렇게 신중한 처사는 아니다. 특히 이런 문제는 토착화 신학이나 여성신학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기독교 교리가 고정 불변은 아니지만 이러한 변화는 계시의 역운에 응대하는 방식에서 조심스럽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언어에 있는 대답의 성격은 신학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말은 대답이다(Wort ist Antwort). 언어의 말건넴 성격은 곧 대답을 요구하듯이,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우리의 대답은 언어로 실행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언어 앞이나 뒤가 아니라 안에있다.” 기도, 선포, 그리고 신학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신앙적 진술은 하나님의 계시가 말건네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대답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언어로 진술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는 신앙적 실존이 경험될 텐데, 그것마저도 본질적으로는 계시의 부름에 대한 일종의 대답일 것이다.

 

넷째,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언어에 있는 대답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부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 저녁을 주석하면서 이 시가 존재를 불러낸다고 했듯이 신학도 근본적으로는 계시를 불러낸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가 존재를 불러낸다기보다는 존재의 역운에 응대함으로서 존재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신학에도 적용된다. 기독교의 예전, 케리그마, 신학적 언설은 일종의 부름이다. 하나님을 부른다. 흡사 마법사의 초령처럼 언어로 진술된 기도는 하나님을 불러낸다. 인간이 주문을 외움으로써 신을 불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로 계시하는 하나님을 전제한다면 망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부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학의 언어는 이미 태초에 계셨던, 창조 사건에 개입했던 바로 그 로고스의 말건넴에 대한 응대이면서 동시에 그 로고스가 계시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오트는 (혹시 자신의 선생인 칼 바르트의 문장으로 흉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아래와 같이 아름다운 의문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을 초령(招靈)할 수 있는가? 하느님이 나타나시도록 사람이 그분을 말로써 초호(招呼)할 수 있을까? 이것이 혹시 인간의 교만과 사악한 불경이 아닌지?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른 면에서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분의 성호를 자랑하고 그분의 구원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따라서 그분은 인간적인 말을 중개로 하여 인간 사이에 현재적으로 되도록 그분을 그렇게 초호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의 예언적, 케리그마적, 또한 우리의 신학적 언설은 포기될 수 없도록 이러한 위탁에 응하지 않는가?

따라서 신학적 언설의 부름은 어떤 종류인가? 그러한 부름은 하느님을 초호하기는 해도 겸손하게 그리고 하느님을 초령하고자 하지 않는 기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에 대하여 정말로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모든 신학적 언설을 그 근거에 있어서, 그리고 그 시행에 있어서 비록 외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즉시 가시적으로, 동시에 내면적으로, 그리고 참으로 하나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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