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길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게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40:1-5)

신구약성서를 총 망라해서 살펴보더라도 오늘 설교의 본문 말씀처럼 역사성이 강하게 내포된 부분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를 횡단하는 때로부터 시작해서 세례 요한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인도되는 이스라엘의 전체 여정이 제2이사야가 선포한 오늘의 이 한 말씀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오늘 우리가 함께 축일로 지키고 있는 세례 요한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2이사야의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마태복음에서(마3:3) 세례 요한을 지칭하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요구가 사해의 광야 공동체를 태동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을 광야에서 기다리기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광야에 등장했을 때 이 말씀에 의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요한은 오늘의 본문을 쿰란 공동체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말이 됩니다. 말하자면 제2이사야가 생각했듯이 광야에 하나님의 길을 내야한다는 소리가 외쳐진다고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부르는 분이 광야에 서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성서의 헬라어판에서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임박한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를 회개와 세례로서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에 나가서 외치라는 소명을 느꼈던 것입니다.
제2이사야가 깨달은 이 부르심은 실제로 구약성서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를 수 있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역사의 초기에 당한 위기와 궁핍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육체와 모든 사람 앞에서 계시되는 시점까지 이를 수 있는 그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런 활 모양의 다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재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적인 선진 제국의 변방에 놓여있던, 더구나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머물러 있던 이들의 삶은 분명히 궁핍의 궁핍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척박했던 팔레스틴 땅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와 궁핍에도 불구하고 이 광야 시대는 하나님과의 첫 일치가 이루어진 시대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별이 빛나는 시기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 광야 시절을 약혼기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은 선진국이 되어야한다는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고, 오히려 야웨의 도움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궁핍한 시절에 내재할 수 있는 이런 축복에 대해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그 직후에 어느 정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정말 살아있다는 것에 관계된 시야가 예민해지는 경험입니다. 전쟁이 막 끝난 1945년은 독일 판 광야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광야의 한 복판에서 영적인 각성이 열리는 듯 싶었습니다.
광야에서 겪게된 생존의 불확실성은 그 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게된 전형적인 시대였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철저하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나 사건은 이런 하나님의 도움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광야 한 복판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은 그들이 매일 배불리 먹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삶의 광야가 시작되는 모든 곳마다 하나님의 도움이 이미 자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오히려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는 굶주림을 면치 못하며, 그곳에서 희생당하기 십상입니다. 기적적인 도움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매우 특별합니다.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광야"라는 말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광야가 점점 커지는구나. 마음속에 광야를 품고 있는 자에게 화가 임하리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명하게 된 이후로 허무주의의 상(像)이 되었습니다. 허무주의의 이러한 정신적인 광야에서부터 어떤 조치 없이 우리가 사뿐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부르시는 분을 따라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한 부르심을, 이것은 곧 오늘 본문의 예언자가 깨달았던 바로 그것인데, 이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부르심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광야에서는 일반적으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광야에 뚫린 길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이 부르심을 듣게 될 경우에, 그래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독특한 몰아적 경험을 하게되는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라는 광야에는 이와 같은 명백한 길의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이 모든 허무주의의 영역에는 방향감각의 상실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실 역사상 상당히 많은 이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될 경우에 광야에서 빠져나가야 할 순례자들의 탈출구를 묘연하게 만드는, 그리고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파멸하게 만드는 일종의 신기루(Fata morgana )였음이 종종 증명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구나 서구를 막론하고 이 허무주의의 광야에서 등장한 마술적인 상을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 민족들이 이러한 신기루를 통해서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합니까? 하나님이 소집한 천상회의에서 제2이사야가 감지한 부르심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르심이 하늘로부터 감지되고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인간에게 경험된 역사는 다시금 새롭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부르심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승된 것을 유지해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찌꺼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인 전승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 전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행위는 오늘 우리 시대에 아주 특별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외경상실의 유혹입니다. 흡사 죽어버린 그 무엇인 것처럼 전승된 것들을 계속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이 전승된 것은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온 것같이 우리에게 새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2이사야는 광야시대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새롭게 감지했습니다.
이 전승된 것은 완전히 새롭게 위에서 내려온 부르심으로 경험되는데, 이러한 힘은 그것을 담아낸 말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저 공허하게 드러난 말이 아니라 역사를 형태화한 그 말만이 그런 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광야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이런 이유 때문에 광야 시절에 대한 기념과 축제가 유지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광야의 역사는 세기를 거듭해서 부르심으로 자리 매김되었습니다. 항상 거듭해서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새로운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도 이 광야 시절을 배부름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충고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충고의 능력은 계속적으로 여러 전승 층을 형성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일어났던 영적 분위기의 상승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가장 궁핍했던 시절에 경험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기억을 부단히 유지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시에 우리 삶의 내용으로 다가왔던 것을 신실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풍요의 시절에도 유효합니다.
제2이사야는 이것을 다른 상황에서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광야는 유대 백성의 대파국을 통해서 또 다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광야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을 고향 땅 팔레스틴으로부터 분리해버린 상황입니다. 이제 광야에 얽힌 이 고대사는 광야를 가로질러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 이 추방된 사람들에게 또 다시 새로운 부르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땅과 새로운 출발이 약속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광야를 가로질러 왕의 길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개선 행진으로 팔레스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고향으로의 귀환은 개선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땅을 밟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종살이가 끝나지 않았고, 채무가 면제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위로가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이사야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기를,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세상 앞에 하나님이 계시되기를 원했습니다.
사해에 모여 있던 경건주의자들과 광야에 나선 세례 요한은 제2이사야의 이 말씀을 다시금 새롭게 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외침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사해의 쿰란 공동체는 율법에 몰두하고, 요한은 하나님의 미래를 선포함으로써 그런 준비를 했습니다.
오직 한 성서 말씀이 한 인간의 모든 삶을 이렇게 철저하게 규정해버리는 일들이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삶이 제2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각인되었던 것과 같은 일들이 말입니다. 성서 말씀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따른다는 사실이 아마도 세례 요한 시대에는 그럴 만 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세례 요한에게는 제2이사야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관통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다시금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 볼 때 현재 우리는 지난 전쟁 중이나 그 직후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그런 광야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정신적인 허무주의의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조건이 월등한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는 경험이 우리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실제로 광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금욕적인 삶을 그대로 모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살았던 방식을 무조건 따라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광야를 가로지르는 길과 그 희망의 길을 건설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2이사야는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에게 이르러서야 그렇게 이해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역시 이런 부르심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길이 열린다는 하늘의 선포만을 듣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길을 내야한다는 외침을 듣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조장해 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을 위로하는 일, 마지막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이런 것들은 우리의 과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승리의 길을 가도록 길을 내는 일은 우리의 과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내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아가는 바로 그 현장에서 이런 일꾼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대학의 정신적인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허무주의를 뚫고 나갈 그 길을 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서, 개인적인 삶에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사유와 실천에서 성서의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는 언덕들은 낮아지고 계곡들은 돋우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학문적 영역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현대 정신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천착하고 있는 학문 행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과 만나기 위해서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유산으로 돌아서는 일은 하나님의 미래로 돌아섬으로써, 그 희망을 붙잡음으로써 바르게 이루어집니다. 이 희망만이 허무주의를 극복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곧 희망의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앞에 있었던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전체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희망을 향하여 그 길을 예비하는 자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등장도 곤란했을지 모릅니다. 길을 예비하는 자가 없었다면 길 자체인 그분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구약성서가 없었다면 기독교 교회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성서의 역사가 걸어온 길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내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미래도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오신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사실이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세상을 심판할 자가 오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진 목수의 아들이 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유유히 내달려야할 길로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길을 건설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항상 다르게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건설하지 않으면 그 역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써 건설해야할 그 길을 우리가 신뢰함으로써 그 길 자체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건설해야할 그 길은 이미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옳은 길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기 위해서 오늘도 자신의 몸과 피를 통해서 우리와 연합하려고 합니다. 이 길은 자신의 삶을 순교로 끝낸 세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목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의 영광인데, 이 영광은 곧 우리와 온 인류의 미래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의 무상성이라는 광야에 가로질러 있는 우리의 길을 왕의 길로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이 왕의 길을 유유히 개선행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온 백성에게 위로가 임하고, 종살이가 끝나고, 면책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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