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회개하라!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았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을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3:1-11)  

강림절은 하나님이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이런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눈물을 마르게 할 하나님의 영원한 빛에 대한 희망입니다.
기독교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오심과 그의 구원을 희망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결합되었으며, 그리고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희망에 근거해서 유대인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한가지로 우리의 하나님이기도 한 그들의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신앙과 희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최종적 현재가 아직 이 세상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과 희망에 분명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면 이 세상은 무언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시아의 평화가 이 세상을 통치함으로써 불의와 증오와 전쟁과 고난이 오래 전에 극복되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만약 나사렛 예수가 이미 이 세상의 메시아, 그리스도, 평화의 왕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면 메시아의 평화 왕국을 감지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들이 확실하게 드러나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리고 화려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궁핍한 삶의 방식으로 지구의 한 구석에서 회개와 구원을 설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계사의 중심에서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국 십자가와 불의와 공포에 내던져졌지만 이미 그곳에서 은폐된 메시아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현재하고 있는 이 메시야성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아직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의 영광과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여 이 세계의 모든 어둠이 극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강림절에 유대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 목소리가 세례 요한이 선포한 사신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그의 선포에 온전히 담겨있다고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희망에 가득 찬 것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림절에 울려 퍼져야 할 외침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의 설교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오심과 그의 통치를 가슴 설레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다그쳐 묻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나간 세상에는 하나님의 오심이 심판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심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너무 빨리 속단하지는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버린 이 세상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야 할 우리의 세상입니다. 예언자들의 사신이 선포된 유대인들도 역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과 맺은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상들의 하나님에게 성실한 자세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임하리라는 이런 경고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면서 공동의 책임이 있는 이 사회의 삶에도 이에 해당되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일종의 능가될 수도 있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에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진부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 말의 사용을 너무나 난처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와 기독교는 지난날 거들먹거리던 건달들에게나 어울리는 철 지난 옷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옷이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죠.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정당들도 과거에는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적인 이름의 여러 요소들을 이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이 사회에서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지난날 공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져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제도가 곧 말라 죽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정적인 관용을 보이는 정도의 태도가 만연해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아직도 교회 제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말은 기껏해야 신앙생활에 흥미를 가진 집단들의 자기 표현일 뿐이라고 냉대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이런 냉담한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생각이 없는 탓입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이 사회가 감당해야만 할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서 다가오는 침울한 울림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고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미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 내맡기는 꼴이 될 뿐입니다. 이 심판은 이미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심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일어나는 결과이지 그 어떤 다른 것에 의한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완전고용과 수입의 증가, 고객들로 만원인 상점, 관광, 문화생활, 개인 주택, 쾌적한 생활, 이 모든 것들은 공허한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서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늘날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는 그 어떤 노력도 역시 이런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삶에 참된 의미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우리의 삶에 완전히 현존할 수 있게 하는 평화로운 신뢰심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이 참된 진리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깊은 채 하는 어떤 이들의 웃음 앞에서 난처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계몽된 것 같은 얼굴로 이런 미소를 보이면서 하나님과 기독교 신자들을 백화점과 전문점 시대에 여전히 한물간 잡화점에 매달려 사는 이들로 취급합니다. 이렇듯 종교 없이도 자기의 노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심각한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자기기만은 결국 자유와 반대되는 길로 흘러들어 가게 됩니다. 또한 쾌적해 보이는 삶의 중앙 무대 뒤편에 있는 삶의 공허감 속으로 점차 깊이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보려는 절망적인 외침이 점차 거세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있어야되는 곳, 즉 종교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마저도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계획된 사회 질서에서 얻을 수 있으려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회를 철저하게 제도화 해야한다는 이런 믿음이 단순히 행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사유를 지배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자유와 상반되는 망상으로, 즉 현실성에 대한 억압적이고 광기 어린 망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간 역사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엇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무의미와 거짓 희망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의 부름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이 세상이 회개해야한다는 부름,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부름 말입니다. 이런 부름에는 기성 교회의 이해타산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그 당시의 교회 신자라 할 수 있는 진지하고 경건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그 어떤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사신과는 분명히 달랐던 요한의 사신에서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선포해야만 했던 그 사신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사신은 오히려 그들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찾기보다는 자기들의 전통과 경건의 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의 전통만 중히 여겼지 하나님을 소홀히 섬겼다는 이 문책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려는 전통은 로마 가톨릭의 전통입니까, 종교개혁의 전통입니까? 앞으로 몇 달 안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내부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첫 걸음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아주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로이엔베르거 종교협정(1973년 바젤의 로이엔베르크에서 81개 교회가 협정한 신학선언, 역주)은 겨우 첫 걸음일 뿐입니다. 이미 수세기 전에 진리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종파적 충성 경쟁은 오늘날 대개의 경우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인식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과거의 대립들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교회가 자기 자신, 즉 자신들의 전통이나 상속된 구조들보다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로이엔베르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오늘 교회에 요구되는 회개의 징표일지 모릅니다. 이것을 미루면 그때는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마비된 전통을 수호할 뿐이라고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게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빨리 일어날수록 교회는 그 수모를 벗어나기 위해서 오히려 세상 풍조를 따르려는 몸짓을 서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만이 교회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라고 설교하려면 오늘도 역시 우리는 광야로 달려나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 현실에서 발길을 끊어버려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요한이 선포한 사신을 통해서 참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교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그 복음의 사신을 경멸하거나 오용하고 있는 이 세상과의 모든 연대를 단절하고 오늘 당장 광야로 뛰쳐나가야만 합니까?
예수님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외치던 광야에서 다시 사람들이 사는 문화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에게 돌아서라는 세례 요한의 사신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저자 거리에서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과 똑같은 사신을 전했습니다만,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위협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으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임박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신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돌아서라는 부름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이 세상 안에서 살지만 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미 현존하십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람들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신 겁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오늘날 이 세상을 통치하러 오실 하나님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함으로써 세상을 심판할 때가 임박했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물로만 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 불과 숨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문화 마을인 인간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그를 통해서 이미 현재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세계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이 외친 그 심판이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 심판은 은폐의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아직 세계 통치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세계 심판으로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능력과 영광으로 세계를 다스릴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은 모든 불의와 모든 고난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세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갈릴리 설교자의 능력과 영광이 아니라 그의 비천과 연약함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서라는 부르심을 따를 때 바로 구원이 임합니다.
그의 부르심은 개개인을 향하십니다. 그의 부르심은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향하십니다. 이 세상은 입으로는 평화를 노래하지만 점점 더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탐욕과 시기와 적개심에 사로잡히고, 평화와 상관없는 길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이 세상이 하나님과 종교를 이미 끝나버린 망상으로 간주하고 무시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에 가까이 임합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바로 이 세상과 우리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기독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그 어떤 절박한 사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개시(開始)하심으로써 그 자유와 생명의 나라에 참여하게된 기독교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말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자신의 무의미에 침몰 당하지 않으려면, 또한 절망 중에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미혹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사실 그런 사회는 구조적인 부자유만 생산해낼 뿐이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돌아서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사신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만이 인간의 삶에 의미와 자유를 보장해줍니다. 평화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시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 이 하나님의 평화만이 세상의 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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