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기도에 대하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구와 기원과 간청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오. 그래야 우리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우리 구세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 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뜻을 적절한 시기에 분명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1-6)

지난 수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위기에 빠졌다고 말들 해왔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어졌고, 의심스러워졌으며, 불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매한가지로 적용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위기는 결국 기도의 위기에서 나타납니다. 그 현실성이 의문스러운, 혹은 우리의 일상에서 더 이상 고려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소원해진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 기도가 드려지지 않습니다. 식탁 앞에서 드리는 감사기도, 그리고 아이들이 잠자리에서 드리는 저녁기도조차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정말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신 걸까요?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건 아닐까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세상살이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할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에서는 경건 생활이 힘들어져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게 않게 됩니다. 설령 기도를 드린다해도 우리의 기도가 진부한 형식들로 굳어지거나,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기도가 고통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더 이상 하나님과 연결된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게 아니라 타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유발된 하나님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위기에서 벗어나 보려는 노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단절시켜버리는 것은 바로 요헨 클렙퍼의 노래에 있듯이 "죄의 마력"입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모든 이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말없는 비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표상과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이 말없는 비밀에 대해서 주의 깊게 통찰하는 것을 배우려고만 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을 오감으로 감지한다는 사실,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실들조차도 분명히 당연한 게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남김없이 온전하게 이해한 사람은 매순간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확인하듯이, 겉으로 볼 때 연민을 살만한 위기와 고단한 삶의 상황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나, 혹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매순간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감사의 마음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우리 시대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혹시라도 그 어떤 부족한 것이 있어서 아직 완전하지 않다 싶으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킵니다. 이런 소동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에 대해서도 무리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정말 부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게되면 당연히 불평과 불만이 늘어갑니다. 결국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지려고 발을 질질 끌면서 끊임없이 줄달음치듯 살아갑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영혼의 병에 그 뿌리가 놓여있습니다. 요즘 같은 풍요의 시대에 정신병이 더욱 더 늘어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게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매순간을 감사할 이유와 동기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정신치료 같은 것은 결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져서 그 어떤 힘겨운 일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게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런 마음이 모든 기도의 실제적인 토대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우선 간구를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가 그런 간구와 무조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에는 여러 다른 형식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에는 기도의 몇 가지 형식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감사기도, 즉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카리스티아라는 단어는 이미 원시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가리켰던 바로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감사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안에 현재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임박은 교회 안에서 영속적인 형식이 되었는데, 이 하나님의 임박에 대해서 감사 드리는 의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이러한 감사 의식이, 즉 유카리스티아가 어쩌다가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 놓이게 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명시적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는 많은 형식의 기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그 이외의 모든 기도는 이 감사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우러나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감사해야할 구체적인 조건 없이도 가능합니다. 생명에 대한 소박한 감사의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절로 노래가 나올 만큼 기쁨으로 충만한 기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이미 기도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없이 찬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는 우선 이런 감사하는 마음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사의 마음이 정말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깨닫게된다면 우리는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분명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고, 또한 감사하는 마음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아주 의식적으로 기도 속에 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를 경배, 즉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과 연관시켰습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에 긷든 아름다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고난과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진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경배로 도달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서 최종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간구에도 역시 해당되는 말입니다.
간구는 감사와 경배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런 간구만을 확실하게 들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하시오. 그러면 받을 것이요! 요한복음이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그 통치의 도래와 그 사랑의 현재로 충만하셨던 것처럼 완전히 그런 예수님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몰두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만이 확실하게 응답 받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로 시작됩니다. 또한 그 뒤로 이어지는 기도, 즉 일용할 양식과 사죄에 대한 간구도 역시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것을 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채서 그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는 간구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원과 의지가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간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뜻은 애당초 우리의 간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던가요?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간구하기도 전에 당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들의 아버지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6:8).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늘 쓸 것과 필요한 것이 따라다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의 이면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한편에서는 감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느끼는 필요성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훨씬 먼저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말없는 간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를 황폐하게 할 어떤 것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신다고 말했습니다(롬8:26). 성령이 이처럼 우리를 대신해 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가까이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우리가 감사하고 경배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있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가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 건지 분간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는지 알지 못할 때 성령이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드리는 간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기도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지닌 본래적인 깊은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과 매 한가지로 간구할 때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간구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구할 때 우리의 소원과 기대가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수행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성찰은 설령 구체적으로 표명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룀으로써 어떤 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지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구함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소원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들이 정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로 이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로 마치셨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의 투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싸우는 투쟁입니다. 간구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간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는 곳에서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올바른 간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소원에만 맴돌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기도는 역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즉 자기만의 빵과 자기만의 용서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이것을 간구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던지 간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추구하는 바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시며, 그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역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그의 생명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세력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증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본문은 속전이라는 상(像)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즉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이 속전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셨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와 경배와 간구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드려집니다. 이 예배 공동체에 속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근본적으로 예배는 몇몇 소수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필요만을 채워주는 게 아닙니다. 예배에서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관계된 일들이 수행됩니다. 예배는 구체적인 예배 형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없는 감사로 채워 가고,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함으로써 그 의미가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실천을 대체해버릴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쾌적한 대용물도, 무력한 대용물도 아닙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해지는 비판처럼 기도는 누군가를 돕는 실천적인 일과 관계없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갈 목표 설정을 해명하고, 우리가 행동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선교적 과업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예배 시에 우리가 드리는 감사와 간구에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선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임박에 대한 사신을 모든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되며, 그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소원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훨씬 더 많은 감사와 희망을 품게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맺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필요를 모든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우리의 모든 필요가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우리의 모든 필요는 잠잠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모든 기도의 시작과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간구하는 것으로 집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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