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님은 영이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19-24)

금년 들어서 기독교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앙적 삶의 심연에 불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담긴 언어들, 즉 하나님과 그의 구원, 아들을 보내심과 그의 성육신, 대속적 죽음과 그의 부활이라는 언어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앙적인 언어와 더불어 신앙의 실체가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너무나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언어들은 이 세상이 급변하는 동안에도 예금잔고 안에서, 바람 없는 온실 안에서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 전승의 귀한 언어들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완전히 무능력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언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들은 이제 이 세상 현실성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현실성은 한때 기독교적 언어들이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그것인데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전승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이 전승의 내용들이 일상적 노동세계와 소비행태 안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우리를 해방시켜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성서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새롭게 문자화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별로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서 말씀은 각 경우마다 여러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충분한 전통적 표상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 사이에 놓인 그 대립을 알고 있습니다. 이 대립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언급에서 표출되는 위기의 근본적인 의미가 아닐까요?
이런 주제는 요한복음서가 우리에게 보도해주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의 핵심입니다. 이 대화는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기준으로, 즉 참된 종교의 기준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미 4세기 동안이나 종교문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북이스라엘 왕조와 남유대 왕조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뒤에 유대 왕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유대 공동체로부터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의 그리심 산 위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성전은 마카비 왕조 때인 기원전 128년에 유대 광신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첫 종파 분리인 셈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같은 야웨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유대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최소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마실 물을 달라고 하자 매우 놀라워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세세한 사정을 밝혀내자 또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그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고,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는 종교문제를 제시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에게 바르게 예배드릴 장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대화에서 세 가지 요점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종교와 하나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어떻게 제기되는가, 둘째는 참된 하나님 예배는 종교적 전통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셋째는 참된 하나님 예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는가 라는 그 질문의 방식과 통로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겉으로는 숨겨져 있지만 무엇이 과연 원래의 사실인지를 지난날 다섯 남자와 살았던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녀로부터 선지자로 고백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한 여자의 사생활을 들추어냈다는 사실에 너무 밀착시켜서 읽으면 안됩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숨겨져 있지만 원래는 참된 현실성의 심연들을 인식하고 해석할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이야기에서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현상의 고유한 의미가 은폐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무엇인가를, 즉 그것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서 각성된 사람으로, 하나님에 의해 각성된 사람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런 각성된 지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 드러나 있는 것과는 달리 사물의 본질을 알아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대화에서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인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하는 일을 망각했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이 과업을 다른 이들에게 방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현실성의 근원에 대해 언급할 적법성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눈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관통해나가는 능력으로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본질을 말한다는 것은 이렇게 당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모든 사물의 근원에 대해서 능통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인 남자에게 예배할 장소와 참된 종교에 대해서 그 순간에 질문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잘못된 형식으로 질문합니다. 그녀는 그 귀중한 질문을 종파적 선택의 문제로 던졌습니다. 이 대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이 옳은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참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질문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이 옳은가, 아니면 개신교가 옳은가에 대한 질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거의 똑같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 질문은 불교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길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그런가에 대한 질문과도 결코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어떤 종파적 전통에 서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질문을 존중하시고 대응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진지하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것을 망각해버릴 위험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일상이 세속화되면서, 소비적 삶의 행태가 압박해 들어오면서 질식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존에서 비상한 것들과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의 차원은 정말 간과되면 안됩니다. 이런 차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맴돌 듯이 살아가는 현실성에서 정말로 소유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시각을 열어줍니다. 일상적인 삶의 한 중심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을 뛰어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생각들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구역질과 무료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초조감이 우리를 가득 채워버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사회적 삶에서도 불안이 엄습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종교의 기본행위이며, 모든 현실의 심연에 대한 자각입니다. 겉으로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그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면 말입니다. 이런 심연을 인식해 가는 것으로부터 모든 종교적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배는 경우에 따라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거짓 세력들을 붙잡고서 그것이 곧 모든 현실들을 심연으로 움직여 가는 힘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국가에 묶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동질성과 대립은 혈통의 문제이며, 따라서 자신이 노력해야할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그리고 실제적으로 진지한 대상을 국가로 여김으로써 자신이 살아갈 여러 염려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행복도 최선의 방식으로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도 이런 경배는 오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즉 종교적 전승에 완전히 몰두함으로서 현실성과의 접촉을 단절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종교적 의무는 인간의 삶에 추가된 멍에와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바른 장소가 그리심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에 대한 선택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바른 경배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충성에 대한 질문은 이런 전통에 서는가, 아니면 저런 전통에 서는가를 통해서 답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전통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사마리아인에게서가 아니라 유대인에게서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4:22). 말하자면 구원은 불교도나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 기독교인을 통해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의 전통을 진리 자체와 동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역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비록 그들이 그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올바른 전통에 대해서 암시를 하긴 했지만 아직 참된 예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는 놀라운 일들을 발견해야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종교적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에서 눈을 뜨게 해줍니다. 만약 이런 종교 전통이 우리 자신의 삶에 있는 현실성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전통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전통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모든 양식들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맙니다.

셋째, 위에서 언급된 사실에서 이미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특하게 설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의미심장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는 영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헬라 철학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차원이 다른 의식의 본질로서 표상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한계가 없는 인간의 혼과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오늘날 더 이상 고수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었던 이런 생각을 향해 제기된 무신론적 비판이 오히려 어떤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헬라 철학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몸에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아주 당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의식은 그 어떤 육체적 필요성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으며, 현재 우리의 육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공간적 제한과도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혼과 몸의 연결로 인해서 파생되는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더구나 무제한적으로 인식하고 무제한적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의식으로 생각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사상은 이러한 표상의 전제, 즉 육체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독립성을 거부합니다. 오늘날 의식의 기능은 항상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의식으로서의 하나님은 이제 인간이 확대되어 반영된 영상(映像)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 전승된 "영"이라는 단어는 이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에 따르면 이 단어는 비상한 사람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실현되는 놀라운 능력을 특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놀라운, 완전히 다른, 그리고 인간을 놀라게 하는 분으로 행위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분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고대인들이 하나님을 곧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못되는 걸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성이 바로 행위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한 인격체라고 간주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닐까요?

영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놀라운 심연입니다. 구약성서도 이렇게 "영"은 생명을 창조하는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이 보이는 몸을 다시 살려내고 마지막 호흡을 다시 소생시켜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영에 대한 이런 이해는 무엇보다도 의식이나 사유와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신약성서의 배경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죽게 될 우리의 몸도 영에서 발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영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게되지만, 새로운 생명은 이와 달리 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주장은 영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고대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과 생명의 연결은 바울만이 아니라 요한의 경우에도 똑같이 발견됩니다(고전15:45, 롬8:11, 요6:63 참조). 바울과 똑같이 요한은 영을 살리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생명에 대한 이해인데, 사실 오늘 우리의 이해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도 아주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생명은 그저 살아 있는 단백질 덩어리로만 개념화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전체가 부분에서 현재하고 있듯이 거듭해서 놀랍게 나타나는 경험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은 현존적인 것으로부터 이해되면 안됩니다. 현대의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생명은 이미 단백질 덩어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안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변 환경에 의해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적인 동물인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생명 현상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인간의 영에게 정확히 어울리는 말입니다. 영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피안에서 자신의 거점을 찾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 거점을 찾는 게 아니라면 어디서 찾는다는 말일까요? 인간은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자리합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유와 세상에 대한 인식을 획득합니다. 영과 자유는 상관되어 있습니다. 요한과 바울은 영이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일치합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진리의 능력인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 진리의 능력 안에서 우리 의식의 외부에 있는 견고하고 창조적인 토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토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생명 안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숨결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 숨결은 우리의 안과 밖 동시에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를 우리의 위로 끌어갈 수 있는 힘입니다. 동시에 모든 생명에 충만한 이 숨결은 우리에게 진리와 자유의 원천입니다. 이 숨결에 우리 자신을 안심하고 내맡기는 것이 우리가 미래에 얻게될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미래에 우리는 일상적인 데만 몰두해 버리는 천박성으로부터, 또한 거의 비슷한 현상이라 할 우리의 상이한 종교 전통의 편협성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래는 예수님의 사건 안에서 이미 해방하는 현재입니다. "... 그때가 올 것이오. 지금이 바로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할 그때요."(요4:23).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통적으로만 주장되는 모든 하나님 표상을 딛고 넘어서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전승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판을 몹시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도 예수님이 증거하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표상이 아무리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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