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성령 충만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 (에베소서 5:15-20)

신약성서의 서신들을 읽다보면 마무리 부분에는 늘 충고가 나옵니다. 이런 충고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사랑 받는 단락이 못됩니다. 직접 자기가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더구나 설교자나 그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는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기꺼운 마음으로 충고를 듣고 싶어하겠습니까. 따라서 이 충고 부분을 해석하려면 갑절의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보통 "충고"라는 말에는 도덕적으로 편협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주 쉽게 따라 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할 본문 말씀에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놀라우리 만큼 거리가 먼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술(포도주)이라는 단어에만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일이 금지되지 만은 않았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세부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기 전에 완전히 일반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적인 삶의 기본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본문 말씀의 큰 틀과 일반적인 시각에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에서 시간적으로 제한 받는 것들을 핵심적인 것으로 다루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여러 가르침들은 우리 시대의 경험으로부터 적지 않게 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들은 예배드릴 때 베일을 써야한다는 바울의 지침 같은 것들입니다(고전11:13이하).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기독교적인 삶이 유별난 이상을 세워 나가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인간적인 것들을, 참된 인간적인 삶들을 생생히 그려나간다는 사실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거시적인 틀에 속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로움에는 무언가 이론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들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지혜로움은 삶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각도에서 명확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과연 어디에 삶의 예술이 내재해 있는지를 귀띔 해주고 있는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삶의 예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겠습니다.

지혜로움은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자기의 삶을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눈여겨보십시오." 염려와 일상의 반복, 혹은 필요한 것을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또한 피상적인 오락이나 즐기면서 매일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도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오늘 편지의 발신자가 말하듯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치 격언 같은 어법으로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에서 마이스터(대가)가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삶의 마이스터가 되는 걸 배우는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을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는 마이스터가 되기는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울이 그 당시에 말했듯이 "세월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여상하지 않은 관계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계들은 인간성이 별 문제 없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그냥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다움이 인간의 삶을 끌어갈 수 있게 해야할,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그 길을 방해하고 있는 정치, 사회적 관계 같은 거대한 차원에서만 타당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유효합니다.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과 옳은 순간을 아주 쉽게 포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대적 삶의 조급증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한 해 한 해를 잡담으로 허송하지 않고, 또한 우리 인생을 염려와 근심에 억눌려서 파손 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래야만 우리는 적절한 순간에 정의를 실천하고, 매 순간에 완전히 충실함으로써 삶을 성취해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목표는 기독교적인 삶을 긍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세계를 도피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순간을 포착하고 세월을 "아껴라!"는 호소 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긍정하는 태도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실제로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곧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역으로 우리 삶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담겨 있어야할 귀중한 내용이나 그런 과업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과 상호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님의 뜻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십계명을 상기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그런 이해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지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단순히 규정에 따라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매번 마다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으며, 또한 당연히 그래야만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퀴리오스, 즉 주님이신 예수님을 주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여러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랑의 영에 깊숙이 현존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이 요구를, 그리고 에베소서가 각론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이 가르침을 저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엡5:21). 우리는 이 말씀을 왜곡된 교권을 강화시키는 단서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이 요구하는 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피차간에 그리스도의 영 안에 거 하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답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일치를 이루고, 그 동질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어 바른 순간을 포착해가도록 합니다.

둘째,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며 참으로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앞에서 한번 언급한 바 있는 영,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매사에 무엇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즉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술(포도주)에 취하여 사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으로 충만해져야한다고 말입니다. 매우 특이하고 실감나는 비교이지요! 영의 충만과 술취함 사이를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무조건 포도주가 영의 충만과 대립된다는 뜻으로 취급하면 위험합니다. 이 비교의 핵심은 술이 아니라 취함 그 사실입니다. 아마 에베소에는 맥주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편이나 환각제 같은 마취제도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과 공통되는 한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승화되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아주 즐거운 기분을 들게 한다는 이 마취제들은, 과연 포도주나 맥주나 아편, 혹은 환각제 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과 현재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이를 가리켜 "방탕하다"고  표현합니다. 마취로 인해서 자기를 망각하게 되면 결국 자기 의식도 마비되어 버립니다. 이런 마취제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겠다는 생각이며,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표현이지 삶이 완전히 고양됨으로써 우러나오는 생명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의미에서 자신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이런 초월은 열광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사실 열광(Begeisternug)이라는 말에 공연히 영(Geist)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건 아닙니다. 모든 영적인 근원에는 열광적인 그 무엇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삶은 위로 고양됩니다. 예술적인 영감이나 예술품 감상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하게 합니다. 학문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도 이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렇게 고양된 실존을 경험하는 것은 환각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훨씬 심원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영이 우리를 고양시킨다고 해도 우리가 자기 망각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은 더 높은 단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영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영에 충만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 영은 물론 예수님의 영을 말하겠지요. 에베소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예수님의 영은 영 일반에 속한, 즉 이 세상이 창조될 때 불었던 하나님의 숨결과 함께 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은 곧 어떤 영이 참되며 해방시키는 영인가를 판단해주는 시금석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이 여기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은 어떤 유별난 기독교의 정서가 아니라 영입니다. 영이 중심 주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중재해주신 영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찬양과 성례전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기독교가 신뢰했던 예배 찬송의 의미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찬양할 때, 특히 공동으로 찬양할 때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갑니다. 우리는 충만한 생명으로 고양되는 것을 느낍니다. 자유로워지고 즐거워집니다.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예전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한 마음을 갖게될 때도 똑같은 경험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이 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와 예전은 우리가 찬양할 때 어떤 영에게 충만해져야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 그 사랑의 영, 하나님에게 감사를 돌리는 영에게 충만해져야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이 영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신 영입니다. 그 영은 모든 생명 안에 내재하며,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생명체들이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바로 그 영입니다.

셋째,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깨어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영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활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찬양은 틀림없이 우리의 가슴을 충만하게 채워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영으로 충만히 채워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맑은 정신으로 올바른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온전히 깨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실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는 분명히 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서 찬양하는 그 순간을 뛰어넘어 한 주간 전체를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엡5:20). 모든 것을 감사한다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즉 우리에게 부닥치는 모든 억압적인 사건과 고된 일에서도 여전히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물론 이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일상의 염려와 우리 인생의 온갖 수고에 휩싸여 있을 때 우리를 그런 것에서 해방시키는 영의 활동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영의 능력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삶은 역시 깨어있는, 지혜로운, 그리고 영에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