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굳게 지키시오!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나타날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요한계시록3:1-6)

우리는 오늘 성서 본문에 나오는 사데 교회의 어떤 행위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행위가 잘못되었을까요? 사치스러운 도시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이웃의 궁핍을 잊어버린 걸까요? 또는 박해가 심한 시절에 신앙을 고백할만한 용기가 없었던 걸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데 공동체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그저 허공을 울려댈 뿐입니다. 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의 본문에서 몇 마디로 짧게 요약된 그 설명이 매우 절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그 몇 마디가 바로 오늘 유럽 기독교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데 교회처럼 살아있다는 이름만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처럼 살고있다는 그 명분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현재 이슬람권에 속해있는 그 근동 지역입니다. 기독교가 그 지역에서 밀려난 이후로 우리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세계 기독교의 중심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로는 죽었습니다. 뜨겁고 단호한 신앙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젊은 교회로부터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곳에서 우리에게 오는 학생들은 우리 유럽 교회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실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기독교는 놀랍도록 부흥했습니다. 지난 1940년 이후로 교회 신자가 50%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전체 국민 중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지난 100년 사이에 세배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지쳐버렸습니다. 이 문제는 사랑의 행위에 관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언급할만한 게 있지만 말입니다.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신앙고백에 관한 겁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내적으로 공허해지면 결국 사랑도 마비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위가 개입되면 자칫 잘못해서 자신의 쾌적한 삶과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삶이 유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풍요로움에 자족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경고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심판의 경고를 우리가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 심판의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표상으로부터는 가능한 멀리 도망쳐 나오는 게 상책이라고들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 그저 빙긋 웃을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지성적이고도 의미심장한 듯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 심판의 경고를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그림은 예수님이 한 무리의 혹성을, 즉 우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는 우주론적인 상징을 손에 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이런 진술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가 선입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화적"이라는 표제어 때문에 기독교 전승의 모든 지평을 성급하게 끝장내버리고 맙니다. 혹은 최소한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어 있습니다. 사데 교회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세 번 외칩니다. 생각하시오, 지키시오, 극복하시오!

1.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3절). 이 말씀은 우리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한 번 가졌던 경험과 느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감상에 젖어 뒤돌아보는 어린 시절의 신앙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그의 말씀, 그의 행위, 그의 죽음, 그의 부활입니다. 또한 이 한 인간을 통해 전체 인류의 역사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온 그 전환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계된 대강절의 심층적 의미에 속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대강절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인물이었던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세상에 한 번 오셨으며, 또한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그 사건이 그에게서 한 번 일어났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역사적 유일회성에서 오늘 우리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 거듭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히 신뢰하게 만들고,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너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본질이 되셨다는 사실은 더 이상 시적(詩的)인 전환점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 관계는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부터 유래하여 완성되고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아무리 많은 신화적 요소와 전설적 구조가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한번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이 단순히 신화와 전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요점입니다. 한번 세상에 오셨던 그분이 우리 스스로는 유지해나갈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오늘도 역시 이끌어주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바로 요체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관심을 유지시켜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사신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리고 그 대답을 전혀 모르거나 잠정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 기독교 사신이 무엇을 전승시켜왔는가에 대한 관심 말입니다. 이런 관심과 질문과 답변들은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성서를 읽고, 그 내용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일어납니다.

2.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3절). 전승된 것을 지키는 일은 오늘날 너무나 간단하게 비난받습니다. 그 전승은 무언가 시시하고 생각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가볍게 여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 특히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승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들과 기꺼이 경쟁해야합니다. 이러한 자기 비판은 분명히 여러 점에서 심층적인 의미가 있고, 게다가 필수적입니다. 날이 갈수록 현재의 삶에서 더욱 더 낯설어지는 전승들을 그저 막무가내로 고수해나가는, 정말 영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세상과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틈만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못한 비판도 있습니다. 비판적인 주장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전승을 무조건 확신해버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전승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넘겨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승이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 근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의 외경심을 갖고 대합니다. 그래야만 비기독교인들도 우리가 이 전승을 우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해줄 것입니다. 반면에 전승이 보도하고 있는 그 내용을 내다버리는, 그래서 그 전승 이외의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려는 재해석은 너무나 값싼 태도입니다.
전승에 대해서 무비판적인 자세로 대하지는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사건을 명명백백하게 확증하고 고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기독교 사건은 우리의 세상에 한번 오신 예수님에 의해 열려진 우주적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에서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과의 그 어떤 틈도 벌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현실을 예수님 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현재의 삶에 더욱 확실하게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래 전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았던 과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만물이 나아가게 될 미래에 오실 분이라는 사실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우선 "깨어 있게" 됩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정당성을 확실하게 지켜나갑니다. 이것은 곧 "깨어 있으시오"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기독교 전승이 언급하고 있는 현실성을 그것의 모든 문제점들과 더불어 아무런 편견 없이 인식하는 일에 깨어있게 된다면, 우리가 이미 잠자는 자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과거에 오신 분으로만 생각했지 부활한 분으로나 앞으로 오실 만물의 주님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게 지키시오"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언가 어렵고, 불가해하고,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너무나 값싼 지침을 따르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승이 유래하게된 그 사건이 모든 안개 층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럴 때 올바른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며, 고유하고 순전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3. 마지막까지 관철되어야할 이러한 지켜내는 일은 오늘 설교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어야할 극복입니다(5절). 극복은 물러서는 것과 반대입니다. 완고한 전통주의자는 모든 불안한 질문 앞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이들은 오늘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종교적인 자연보호 공원으로 물러나 버립니다. 그러나 극복하는 자는 세상과 그 세상의 질문에 맞섭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을 재발견할 때까지, 또한 예수님을 세상에서, 바로 우리의 세상에서 주님으로 인식할 때까지, 일곱 별과 일곱 영을 손에 든 분으로 알아볼 때까지 그 전승된 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사유와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면 안 됩니다. 이 양자 안에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미 기독교 전승에서 각인된 세상으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조형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물리학이나 경제, 그리고 정치 영역에서도 한결 같이 진행되어야합니다.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분의 그 현실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 자주 언급되어있는 흰옷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을 특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런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또한 일 세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통해서 극복한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역시 참여하게될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예수 자신이 약속한 사실은 실현되어나갑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면, 예수님도 그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인정한다는 약속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버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단지 이미 오셨던 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던 이분의 생명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대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행하신 모든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분은 다시 오실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죽음 저편에서 우리에게 오실, 그리고 죽음에서 난파당할 우리의 생명을 건져내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언제, 어떻게 우리 생명과 세상 생명의 미래가 될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가 밤중에 도적처럼 오신다는 말은 어느 시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시는 방식, 즉 그의 미래와 현재 살아가는 우리의 이 생명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어둠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있는 자로서 그 미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