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권위의 근원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태복음 13:10-17)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각인된 이야기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 사신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 걸까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비밀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는 비유로 하지 않으셨지만 군중들에게는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는 것말고는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군중들이 보고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끝 구절이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의 사신을 들었기 때문에 복되다고 축복합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경험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던 그 구원의 성취를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알려줄 수 있었던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비밀은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예수님에게, 또한 그가 선포한 사신 안에 현재 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미래로부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미래적인 것으로 선포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신을 듣는 자들이 지금 완전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미래에 의탁함으로써 이들에게 지금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왜 이 비밀이,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군중들에게는 직접 알려지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알려진다고 보도하는 걸까요?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전하는 사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그 자리에 현재 한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태복음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순수 지성적인 오해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통치의 현재를 어떻게 오해했는지 예수님의 공생애 전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비록 부분적이었지만 엄청난 불손을 발견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따라서 모든 전통과 전승을 상대화 시켜버리는 신성 모독적인 인간의 태도를 말입니다.
이런 오해를 막아보려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자신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불손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권위로 말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담겨있는 그런 권위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한 사신의 내용으로 인해서 불가피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군중들에게 주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한다는 구원 사신에 대해서 침묵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말과 인격 가운데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비유의  방식으로, 즉 간접적인 형식으로 알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하는 대신에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스스로 싹을 돋아나게 해야 할 종자로서의 사신에 대해, 또한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될 작은 겨자씨로서의 사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물이나 진주에 비교했습니다. 이것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겨있던 것들로서 어떤 값을 지불하고라도 즉각 손에 넣어야만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포한 사신을 곧 닫혀버리고 말 좁은 문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을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비록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라고 직접 말씀하지는 않았어도 그 분 자신 안에서, 그 사신의 선포에서 발생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논쟁의 도화선이 된 자신의 사신을 비유 형식으로 말씀함으로써 권위 문제를 사실성의 차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에 따라오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과 그에 의해 발생된 사건들로 인해서 그의 인격이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걸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 사실성이 의도하고 있는 바의 근본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군중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누가복음의 보도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보도는 우리가 예수님의 여러 다른 사신에서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과 상충됩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목적은 군중들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과 구별되어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런 사실성을 초기 기독교가 이해하기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다른 문제를 의미합니다. 신약성서는 이미 예수님에게 존귀한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 칭호들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예수 공동체의 신앙에 의해 헌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와 그 교직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그런 권위는 기독교의 사명을 수행해나가는 일에 별로 필수적이지 않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교권에 관한 이런 극단적인 형태들이 배척되면 될수록 이 교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관리 체제를 더 많이 생산해 냈습니다. 교권을 행사하기 위한 이런 제도들은 대개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듭니다. 교권을 앞세우는 일은 자신의 인격적 권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아보려 했던 예수님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실 그에게서 나타난 일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런 태도와 달리 이 세상을 향한 기독교적 사명이 항상 사실적인 바탕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종종 교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습니다. 로마 교황 요한 23세는 아주 예외적인 전형으로 빛나는 인물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도 그와 필적될만한 어떤 전형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기본 정신에 근거해서 교회의 형태를 갱신해 나가는 과업은 다른 게 아니라 교회의 관리 구조에 상존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지배 형식들이 세상을 위해 수행되어야할 교회의 사명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어느 정도나 방해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실성이 무엇인지를 굳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에서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형식은 우리와는 다른 예수님의 상황에 속한 특수성이니까요. 그 어떤 기독교인도 자기의 인격을 구원이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통한 간접적인 수단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에 관한 사실만을 설명하는 게 기독교인들에게는 훨씬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의 사실성을 신실하게 전하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이나 인류와 관계된 일로 생각해야지 그저 교회를 경영하기 위해서 그 둘레에 장식품을 매달아놓듯이 오용하면 안됩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현재를 규정하는 능력"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의 문제와 현재적으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전승의 경건한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직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진술에서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전승된 언어들이 세상과 맺는 관련성은 그 어떤 해석 작업이 없는 한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먼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전승된 언어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적 권위의 아우라를 씻어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단순히 세속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이 정치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성취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권위를 포기하라는 요청을 듣습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통치 같은 단어를 아무렇게 마구 사용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집단은 두 곳입니다. 종교와 정치입니다.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은 그 권위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정되지 않으며, 그리고 실제적인 일로 증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권위에 의존해서 강압적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무엇인가를 관철하려고 들면, 예수님의 경우와는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불손하다는 의혹을 삽니다. 권위는 사실적인 근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정치 영역에서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일만이, 즉 인간의 정의와 평화를 촉진시키는 일만이 그 정치적 권위에 토대를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와 평화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두 시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그것이 휴매니티를 얼마나 충실하게 담보해내는가에 따라 측량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통치구조는 공동의 행복을 창출해내기 위해서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충분한 합법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병들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빚게된 데에는 여러 사건이 기여했는데, 저는 여기서 우리의 정치 구조에 관련된 것들에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선도적 역할을 하던 한 정당과 한 그룹이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이 계속 통치권을 유지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에는 현대의 선거 유세 방식이 한몫 톡톡히 했습니다. 자기네 정당을 선전하는 그런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선전 방식의 목표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번 선거 운동 중에는 일반적인 행복에 대한 거시적 담론이 너무나 미미했습니다. 그런 논의보다는 유권자들을 선거용 선물로 매수해야겠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치권자들은 다수를 차지해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계속 유지시켜나가기 위해서 어떤 사안을 심도 깊게 논의하기보다는 단순히 돌아가면서 질문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정치적 통치는 그들의 공적인 권위를 익명의 사회 세력과 이익 집단의 계속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데만 사용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형식적으로만 민주적인 것처럼 합법화된 통치의 이러한 정치적 권위 구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분연히 들고일어난 우리 젊은 대학생들의 소요는 정당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脫이념화"의 파고로부터 우리는 어떤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까? 당시에 우리는 개인들이 소위 절대이념을 통해서 비인간화되어버리는 그런 위험들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反이념화에 기울인 그 열성으로 인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그 사회 구조를 인간다운 정의로 채우고, 그 구조를 비판하고, 교정해나가는 모든 노력들이 위축되었습니다. 결국 사회를 비판하고 나름대로 구성해보려는 예술 행위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노력들이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었고, 소비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세계관적인 연관으로부터 손뼉치며 벗어나는 일은, 즉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탈이념화되는 이런 현상은 오늘날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그것 자체가 이념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삶을 갱신시켜나가려는 세력들의 태도가 완전히 非이념적인 성격으로 변해갑니다.
따라서 요즘 우리 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소요사태를 단순히 안녕과 질서라는 기준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소요가 근본적으로 뜻하고 있는 바는 그 무엇보다도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다움의 의미가 더 이상 분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의 모습 말입니다. 이런 소요를 보고 그 본질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인간다운 삶의 토대와 명실상부한 민주질서에서 끝내 정착하지 못하다면, 그래서 이런 깨달음으로부터 정치 행위의 가시적인 성과들이 도출되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계속적으로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리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상대적인 자유만을 누리면서도 모든 중차대한 과업이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역시 그 권위를 형식적으로만 합법화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권위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대학 사회에서는 보직이라는 권위와 교수의 형식적 권위를 헐어내는 일이 시급합니다. 대학이 의미 있게 개혁되려면 단순히 그 구조의 변화에만 매달릴 수 없습니다. 대학의 새로운 모습은 교육의 근본적인 과업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새로운 모습은 단순히 공격적인 자세로 임하는 상이한 집단의 힘겨루기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대학 교육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 실제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모든 집단들이 생각을 모아야합니다. 우리 교수들은 여기서 분명히 자기 전공 분야만을 위한 좁은 이기주의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전공 이기주의라는 것은 끊임없는 전문화로 인해서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첫 인상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버리면 안됩니다. 여러 전문 분야 중에는 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그러나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일에서는 본질적으로 공헌하는 분야가 많습니다. 따라서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대학의 지적인 수준이 반드시 유지되고 향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또한 이를 위해서 필요한 기구적인 예방수단을 강구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대학이 감당해야할 교육 기능의 붕괴는 불가피합니다. 학생들이 교수의 권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필요 불가결한 정신적 훈련이 면제된다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대학의 갱신으로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창졸간에 대학의 붕괴로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 교수직을 임명하는 새로운 방식, 즉 교수 채용 방식이 앞으로 교수들을 훨씬 싼값으로 채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게된다면 결국 교수의 질은 향상될 수 없습니다. 이런 충고는 모든 세대들에게, 오늘의 문화 정치가나 교수들, 또한 오늘날 비판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이 지금 그럴듯한 업적을 내고 있는지 아닌지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내디딘 발들은 이미 문전에 놓였습니다! 조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대학생, 교육 행정가, 교수, 대학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아주 분명하게 판단 받게될 기준은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또한 이로 인한 휴매니티의 제고를 위해서 대학을 개혁하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교회도 역시 휴매니티를 제고하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따라 판단됩니다. 이는 곧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증거하며 활성화시키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교권이나 조직이나 전통적 삶에서가 아니라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런 사실에서 주님을 향한 교회의 성실성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활동은 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개인적인 삶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적인 삶과 그 구조에서 휴매니티에 관한 일을 자신의 고유한 업무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왜곡된, 여전히 자신에게서 해방되지 못한 인간의 얼굴을 구원하기 위한 업무로 말입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않든 간에 아주 간단히 자기를 확인하는 도구로, 단순히 사회 체제를 이념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안전장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이 보도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만큼은 비유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에게 현재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숨긴 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신학적으로 전승된 언어들이 우회적으로 선포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명백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 문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인 "현재를 규정하는 힘"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지시하고있는 혁명적 능력을 우리 자신의 삶에 속한 문제로 여길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곳에서 이런 일에 연합하고 있습니까? 이런 과업이 더 이상 단순히 교회의 부수적인 과업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의 특징으로서 교회의 형태를 규정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종파적 특수성에 대한 우상숭배를 물리칠 수 있으며, 또한 일치하는 기독교로서 인류의 미래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자체가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유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비유로서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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