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밥                        

요 6:48-51

여기 우리들 중에서 약간 나이가 든 분들은 전쟁 당시에 우리 국민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아주 엄격하게 듣고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생명은 지상선(至上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용된 말들 때문에 서로간에 불신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말들은 너무나 쉽게 권력자들의 철면피한 변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는 변명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우리에게 신성불가침입니다. 최소한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생명권에 대한 논쟁도 역시 뜨겁습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된 모든 입장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신성불가침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배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태도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생명은 그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강박 당하지 않으며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실질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말고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듯 단순하게 사는 것이 아주 쉬워 보입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성취된 삶의 조건들을 이루어내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역시 똑같습니다. 우리는 매 학기마다 이런 조건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에 우리의 삶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런 일에 너무나 쉽게 맡겨버립니다.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동만이 아니라 여가 준비에서도 역시 우리를 혹사시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고유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폭풍이 매 순간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폭풍이 우리를 거듭해서 생명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과연 우리를 이런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근원적인 생명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꽃을 든 아이처럼 말을 잃은, 그리고 자연적인 생명 방식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문명의 조바심과 나름대로의 필요성에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늘날 간단히 망상으로 취급됩니다. 루터 시대보다 훨씬 간단히, 20세기의 청년 운동보다 훨씬 간단히 망상으로 취급됩니다. 인류에게는 이제 기술문명으로부터 탈출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완벽한 패러다이스를 우리는 도저히 꿈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에,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조건들이나, 따라서 염려와 걱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될만한 그 상태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주기도에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간구는 한결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밥 그 이상입니다. 이 간구는 영과 영혼의 양식을, 우리의 이웃들과 서로 돕고 사는 삶으로의 전환을, 인식의 빛남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환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전환을 간절히 원합니다. 인간은 밥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을 인간적으로 만들고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로 하고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충만하게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염려하느라 우리 자신을 소진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염려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밥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용할 양식이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합니다. 또한 영혼과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물질들이 아무리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것에서 생명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 조건들과 그것에 대한 염려로부터 생명 자체를 기대하는 한, 우리의 생명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거짓 필요성이기도 하는) 늘 새로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냥에 나서느라고 공허한 상태로 머물고 맙니다.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향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상태가 됩니다. “나는 온갖 향락에 취함으로써 또 다시 그런 향락에 대한 열망으로 쇠잔해집니다.” 이 괴테의 언급은 이렇듯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충족되지 않은 삶의 굶주림이라는 큰물결이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치고 그로 인한 파괴적 결과들이 파생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줍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생명의 조건들은 생명 자체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참되고, 온전한 생명을 말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즉 영혼의 양식이나 육체의 양식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소유물의 반복을 통해서는 생명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삼세계 민중들에게 밥보다 더 큰 것을 갚아야 합니다. 그 양식은 배고픈 사람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만족시켜주며, 따라서 그 만족은 곧 새로운 굶주림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모든 굶주림을 밥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이 언급한 ‘생명’의 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입니다.”(4:34).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당하고 있는 굶주림을 해결하는 생명의 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밥을 먹은 다음에 다시 허기가 져서 또 다시 밥을 찾아 나선다거나, 다른 약속을 찾아다니게 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굶주림을, 내용이 풍부한 참된 생명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단 한번에 만족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건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영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뜻은 그의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이 덕을 보고 있는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을 그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거나 생명의 세속적인 조건에서 찾으면 안됩니다. 요한복음 6:63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과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전체 구약성서의 통찰을 다시 한번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 현상에서 창조적 생명력의 일시적이고 허무한 모습만을 인식합니다. 이 생명력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의 피조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밥이라고 일컬은 것으로서 지상적 밥이라 할 생명 조건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 자체를 선물로 줍니다. 우리가 이런 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며,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 필요한 삶의 조건이 허락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조건에서 더 이상 생명 자체를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밥으로부터 성취되고 그 의미가 획득됩니다.
생명의 밥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 축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사실상 인간의 위기와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에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위한 밥”을 통해서 세계의 고난을 제거하라는 유혹 말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져버렸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해결하는 참된 생명을 인간에게 제시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인간에게 밥을 해결해주는 것에서 찾는다면 예수님이 가져온 참된 생명을 인류에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 밥을 제공하는 일은 사실상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징표이긴 합니다만 본질적인 사안은 아닙니다. 교회는 인류에게 생명의 밥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가 음식으로 제공한 밥을 말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며 하나님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즉 그 생명의 진리를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발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그 사명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이며, 성취된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밥을 예수님의 몸과 일치시키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분명히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성만찬에서 쪼개지는 빵은 생명의 밥입니다. 왜냐하면 이 빵은 바로 예수님과의 일치를, 즉 그의 ‘몸’과의 일치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에서 쪼개지는 빵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예수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징표입니다. 그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굶거나 목마르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예수님의 양식이며 음료였습니다. 분명히 성만찬의 빵은 단지 징표일 뿐입니다. 성찬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상징적 사건이며, 상징적 실천입니다. 그러나 전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말걸음이고 상징적 찬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체 피조물들을 대표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찬양에 참여하고 여기서 이런 사건의 의미에 침잠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아주 가깝게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가깝게 계심으로써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의미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 성만찬은 결코 부록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서 예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되시려고 합니다. 교회의 생명에 토대를 놓고 특징화하는 모든 것이 이 성만찬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와 하나될 수 있는 토대를 놓아주십니다. 교회의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것 중에서 이것보다 더 시급하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을 따르고 그의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이 생명의 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예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되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일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밥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유한 신적인 사명을 우리에게서 성취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세상의 생명을 위한 그분의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그분과 연결된 모든 일과 일치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사명을 깊이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 생명은 곧 그분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제공해 주신 최고의 생명 사건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이 사명은 곧 예수님의 먹거리였으며, 또한 예수님과 우리의 생명입니다.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아멘. (1974.5.12,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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