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하나님의 부재와 현재


그러니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가는 곳곳에서 뭇 민족에게 멸시를 받게 한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을 뭇 민족에게 멸시받게 했지만 나는 야훼다. 내 이름이 다시는 멸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드날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희에게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뭇 민족은 이를 보고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대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에스겔 36:22-28)

오순절은 하나님의 현재가 불러일으킨 기적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자비와 평화의 하나님이 시기와 전쟁, 자기 열망과 고독,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험하게 일그러지고 찢겨진 이 세상에 현재 함께 하시는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 세상이 험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첫 오순절을 경험한 이후로 계속해서 오순절을 맞을 때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축하합니다. 예수님은 승천 이후로 그의 공동체 앞에서 사라졌고, 그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현재 하십니다. 인간이 자신들끼리 갈라놓은 울타리를 극복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현재는 드러납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인류 사이에서 서로간의 이해를 곤란하게 만드는 언어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일단 완전히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이 가능한 한 우리 모두는 여러 종류의 말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가 상호간에 얼마나 자주 부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스쳐지나가듯이 내뱉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모든 울타리는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 극복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사소한 개인적인 관심거리를 초월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님의 현재라는 이 기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가 성령이라고 일컬었던 현실성에 대해서, 또한 그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을 인식한 그 현실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정말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성과는 전혀 다른 경험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형성되는 분위기는 모든 측면에서,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소리를 울려댑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호소를 듣기는 합니다만, 이 소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소리에, 그 승리에 찬 큰 소리에 압도당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죽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부재중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각이나 판단에서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됩니다.

여러모로 차이가 있긴 해도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상황이 요즘의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침묵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도시와 성전을 유대인의 원수들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무능한 분으로 증명된 게 아닐까요? 아주 무기력한 자로, 그래서 결국은 현실적이지 못한 자로 증명된 게 아닐까요?
무력한 겉모습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 명예를 잃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명예를 잃은 것일까요? 고대 세계에서는 신의 능력과 권능에 대한 기준이 그 신을 신봉하는 자들을 어떻게 지켜주는가에 따라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조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파손 당하는데도 그들을 단 한번도 옳게 지켜준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야웨는 당연히 바벨론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인간의 삶과 운명을 주관하는 분으로 믿지 않는 오늘의 이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에게서 능욕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하나님과 그의 행위가 개입할 그 어떤 영역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에스겔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재를 호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상황이 곧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충고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말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능력을 과신함으로써 바로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마법에 걸린 듯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사실상 우리에게도 이미 하나님의 징벌이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에 근거해서 계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의 자기 해방과 자기 구원이라는 징표를 내다보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흡사 인간의 자기 실존을 실현되지 못하게 한, 수 천년이나 오래된 환상을 이제야 다시 인간이 쟁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해방의 열정은 애초부터 참된 자유와 인간성의 해방이라기보다는 그 끝장이었습니다. 그것의 매혹적인 광채에서 우리는 개인의 삶을 내적인 공허와 사회의 억압적인 제도화로 몰아가는, 그리고 사회가 독재자의 먹이가 되거나 외부 세력의 간섭에 먹이가 될 때까지 만인이 만인과 싸우게 만드는 죽음의 싹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징표가 아니라 심판의 공적인 선포요 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욕망과 그 결과에 내버려두십니다. 우리는 이런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강제력 없이 살아갈 때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유해한 광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면에서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게 좋다는 허영심이 자극됩니다. 그게 지나쳐서 이제는 기독교 시민들이나 기독교 정당들도 기독교적인 됨됨이를 증명하기는커녕 기독교적인 이름을 부끄러워합니다. 육체대로 뿌리는 사람은 그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이 말에는 신비주의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상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리고 무상한 것에 자기의 삶을 걸어두는 사람은 이 무상한 것들과 더불어 몰락할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이 무상한 것들이 종종 그에게 그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에게 남아있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판의 두려움은 오순절 설교로서는 결코 즐거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이런 두려움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입만 열었다하면 늘 하나님의 부재나 하나님의 죽음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은 그 심판의 두려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재는 무서운 일이니까요. 하나님의 부재는 끓어오르는, 혹은 이미 시작된 심판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라는 외침을 심판의 징표로 읽어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오늘날 성령의 현재라는 오순절의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예언자의 말씀은 한결같이 영에 대한 약속을 향해 움직여나갑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우리에게는 그 심판이 여전히 앞에 놓여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허락하지도 못하는 인간해방과 자기구원에 대한 어리석은 교만으로부터 우리가 적시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현실로 일어나게 될 그 심판이 말입니다. 에스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당시에 야웨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내팽개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교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교회를 돕습니다. 교회를 향한 비판은 너무 많은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영을 계속해서 부정합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의 조직들이 교회가 자랑하는 사랑의 봉사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징표로 남아있습니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인들과 교권자들의 자화자찬입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보다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소문 앞에서 일으키는 발작과 체념의 영이 다층적으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체념과 자화자찬이 오늘날 교회 안에 아주 당연하고도 아주 분명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기독교의 영이 분리의 영이지 일치와 사랑의 영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을 계속해서 분리된 교회의 현실에서 살아가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교회를 교회가 행하는 악에 의해 파멸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 악을 극복하는 능력은 은폐의 방식으로 교회 안에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예언자의 상황과 다른 가장 큰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영이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세례를 통해서 영에게 맡겨졌고 정화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 그리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사신은 사랑의 거룩한 영이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늘 거듭해서 갱신하는 원천입니다. 그 영이 현재 함으로써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모든 자기 해방은 망상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영의 현재를 상실해버리지 않고 숙고하기만 하면 그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떤 능력입니까? 우리가 언급하는 영(Geist)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단체나 학급, 혹은 가족의 정신(Geist)이라는 어법을 알고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도 씁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수년간 시대정신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바람은 다른 방향에서 불어옵니다. 이것은 그 바람이 교회를 향해서 거세게 불어온다는 말입니다. 지난날 별 깊은 생각 없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꽃망울을 터뜨린 곳에서 이제는 사회주의 개념조차 일종의 금기가 되었습니다. 시대정신의 이러한 비약적인 변화에 따라 개인적인 삶의 기분과 정취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이런 기분과 정취는 이유와 방식도 모른 채 변화합니다. 흡사 입김처럼 사람들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악한 영을, 우울케 하는 영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변덕스러운 유행의 시대정신처럼, 인간의 기분과 정취처럼 그분의 활동에서 파악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비합리적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일종의 주관적인 기분 같은 어떤 것뿐이라면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분 같은 어떤 것은 우리가 착각에 빠지도록 우리를 흔들어댈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영은 변화하는 기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창조하는 힘의 넓이와 능력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오순절 절기에 이렇게 축하하는 영의 임재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도 훨씬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을 창조한 분입니다. 시편 104편은 피조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낯을 숨기시면 그들이 떨며, 당신이 그들의 숨을 취하시면 그들이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어 그들을 창조하시며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 104:29,30)
생명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오늘 우리의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의 주변세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피안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갑니다. 무기물의 세계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타당합니다. 즉 무기물 사이에 벌어지는 변화 작용의 영역이 그것들의 형태를 결정하는 본래의 자리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도 자기 자신의 피안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유기체의 진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생명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뛰어넘게 하는 영의 작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창조는 우리가 전혀 표상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영은 모든 자연적 능력 안에서 작용하는 비밀이며, 모든 것에 생명을 공급하는 거대한 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들은 영을 거절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죽어버립니다. 만약 모든 생명체가 자기 자신의 피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린다는 것은 곧 그가 생명으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영을 향해 열려있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도 역시 이런 영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채 생명을 확인하려고 듭니다. 우리가 자기에게만 열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제 각각으로, 또는 반대로 움직인다는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죽음이 죄와 고용관계에 있다고 진술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열중에 빠져서 단절시키고 있는 그것이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죽음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한 생명의 모사(模寫)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즉 그 근원으로부터, 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한 생명의 모사를 말입니다. 창조자인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죽음을 마지막 사건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따라서 죽지 않을 이 생명은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이며,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적인 몸, 즉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은 일종의 다른 세상, 즉 피안에만 속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서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으로 현재 하는 모든 곳에서 시작합니다. 예언자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집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는 약속이 실현됨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사건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항상 돌같이 딱딱한 마음으로, 자기 열망으로 자기를 폐쇄시켜 놓은 채 살아가는 게 아닙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미 다른 생명을 생생하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만큼, 그리고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성만찬의 친교를 통해서, 더구나 사랑을 통해서, 기쁨과 자유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음이 승리를 구가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당신들 안에 거하면 당신들의 죽을 몸도 당신들 안에 거하는 그의 영으로 인해 살게될 것이오."(롬8:11)

어느 누구도 이 영과 그 새로운 생명을 자기 혼자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이 영은 우리가 우리 삶의 자기 폐쇄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재 하시는데, 이 영은 사랑이 활동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사랑에서 유래하여 우리 삶에 내재하는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울타리를, 인간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를 극복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영은, 아니 그 영만이 바벨탑을 쌓다가 자기 스스로 존립하려는 자기 열망에 빠져서 집단과 개인간에 서로 다투던, 그래서 상호간에 더 이상 이해가 불가능했던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주십니다. 사람들은 공연히 자기 열망이라는 바벨탑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서로간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울타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영만이 인간들에게 참된 자유의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사분 오열 되어있는 마당에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는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됨으로써 불신앙적 집단이 되었습니다. 이 분열이 계속되는 한 기독교인 스스로 하나님의 부재를 확인해주는 셈입니다. 오순절의 영은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일치를 이루어가도록 용기를 주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서로 대립하여 갈라진 이 세상에서 기독교 교회가 일치의 한 전형이 되어 하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지금 함께 하신다는 징표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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