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약속

요 15:26, 16:13-15

대학교에서 취급되는 일에는 진리의 영보다 훨씬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을까요? 앎을 추구하는 대학교의 모든 노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과연 핵심으로 작용합니까? 진리와 앎에 대한 노력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을 하나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기의 특별한 목마(木馬)를 타지 않고 대신 진리의 가르침에 봉사하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연구와 학설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은 아주 명백하게 참된 것으로 증명된 학설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판단 없이 배우면 안 됩니다. 그래야 배움을 통해서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의미에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생각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무엇이 참인지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많은 경우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든 우리의 판단은 아무리 상이한 기준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잠정적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근대 학문이론에서도 체념과 의혹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진술의 정당성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당성에 이르는 길의 방법론적 명백성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늘 극도로 위대한 언어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개인들의 경우에는 모든 다른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장에 대해서 단지 옳다, 또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일상의 삶에서 진부한 주장을 쏟아내면서 진리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완전한 진리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학문에서는 우선 진리론적인 바탕을 잃게 되면 그 어떤 인식도 없으며 주장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 진리에 대한 요청을 실제로 완전히 전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주는 진리의 영이 있는데, 이 영이 바로 해결책입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속임수를 벗어나게 하며 진리를 구별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이로써 동시에 우리가 판단할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안전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대학생활만이 고유한 과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자유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학문적 유행의 지배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실질적이지 못한 논쟁이나 야망, 원한이 지배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우리 인간의 삶 일반은 진리의 인식과 단단히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근대가 학문을 통해서 기대했던 바의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간적 학문은 여러 면에서 단절되었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별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영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연구나 인식 추구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성서의 생각은 지적인 통찰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반적 언어관용에서 ‘진리’라는 말은 이와 달리 지성과 인식에 일방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에 대한 개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요한복음이 보도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이 말하는 영과 진리의 관계에서 무엇이 핵심인지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영의 도래가,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영의 증거가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되는 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만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 요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진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당연히 전체 창조는 이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욜 2:28,29). 이것은 오늘날 여전히 모든 인간이 영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성령강림 사건에서 기억해야할 약속입니다. 영의 활동은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이미 영의 완전한 다스림과 능력에 대한 값이 미리 지불된 것입니다(롬 8:23).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마지막 때 주어질 요엘의 약속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요엘 예언자에게는 영을 받았다는 것이 특별히 예언의 은사였습니다. 마지막 때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길을 인식하는 예언의 은사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의 은사를 협의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엘의 경우에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특징화 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포함합니다. 인식은 생생한 일치에서 발생합니다. 그 역도 옳습니다. 즉 인식은 인식하는 자와 그가 인식하려는 자를 일치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갱신됩니다. 인간 생명의 갱신은 일반적으로 창조의 궁극적 완성에서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임하게 된다는 사실의 선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제2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사 44:3).
하나님의 영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성서의 가장 오래된 창조보도에 의하면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숨’(Odem)을 불어넣었을 때 순간적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창 2:7).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숨입니다. 그 숨은 전체 창조에 임했습니다. 시편 104편에는 지구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적 호흡(Geisthauch)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시 104-30). 따라서 새로운 생명은,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함으로써 얻어지는 생명은 영의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인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희망하게 됩니다(롬 8:11).
바울에 따르면 이러한 새로운 생명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처럼 단지 영의 창조적 활동에서만 출현하는 게 아니라 생명의 영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희망하는 이런 생명을, 또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현실이 된 이런 생명을 일종의 ‘영적인’ 생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생명의 하나님과 일치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부어준다는 다른 성서 말씀의 약속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예언의 은사에도 역시 하나님과의 일치가, 즉 모든 예언의 토대를 구성하는 하나님 인식이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갱신과 하나님 인식은 이제 요한복음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견인하는 영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언급된 영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영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런 영은 예수님의 약속에서(요 15:26) 진리의 영으로 일컬어집니다. 요한에 따르면 우리 생명이 이렇게 갱신됨으로써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요 8:32).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된 언어관습과 성서의 언어관습과의 차이에서 볼 때 ‘진리’라는 단어의 이해에는 공동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독립적이며 신뢰할만한 것으로 증명되는 것들을 가리켜 ‘참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우선 주장의 신뢰성이나 주장된 사태를 생각합니다. 이런 진술의 진리와 달리 성서에서 ‘진리’를 언급할 때는 완전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생명 일반에 있는, 그리고 인간 본질에 있는,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는 ‘존재론적 진리’와 영속성과 신뢰성이 관건입니다. 여기서 통용되는 법칙은 스스로 영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진술만이 제한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참되다’고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무상하기 때문에 마지막은 영원한 하나님에게만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단어는 그분에게만 해당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그 분은 참으로 영원하시고, 따라서 신뢰할 만하며, 우리의 생명을 존속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속성은 그의 행위와 그 말씀의 신뢰성에서 증명됩니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상환되는 한에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은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그의 창조에서 증명됩니다. 세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이런 창조에 신실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에게만 신실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실성은 그의 진리입니다. 즉 구약 말씀은 ‘신실’과 ‘진리’를 ‘에메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씁니다. 이런 기준에 볼 때 진리와 신실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적당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미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말입니다(시 31:6).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를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르기를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 세상에 왔다.”(요 18:37)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 육신이 된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 했다고 말입니다(요 1:14, 17). 이 요한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즉 그의 명예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계시되었습니다. 그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여기에 바로 창조에 대한 신실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말합니다(요 14:6).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이로써 생명과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들과 예수님을 진리로 간주하는 모든 말들을 아버지가 진리의 영을 보내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들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영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할 것입니다. 이로써 이 영은 진리의 영으로 증거 될 것입니다. 물론 기만과 속임수의 거짓 영도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거짓 영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증거하고, 자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성을 증거 하는 데서 확증됩니다. 따라서 이 진리의 영은 아들로서의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학문적인 삶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탐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약속의 성취는 대학의 탐구와 학설 가운데 있는 진리 추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결정적인 언급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전체 창조는 모든 피조물들이 의지하고 있으며 눈여겨보아야 할 전체 창조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에 집중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일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영원을 갈망하며, 무상성의 짐에 눌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살아가는 한에서 피조물들은 이미 현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나오는 반사광을 피조물들에게서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모두 영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일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체 창조와 화해하심으로써 이제 하나님과의 일치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생명이, 또한 우리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학생활의 연구나 학설과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영 사이에 물론 연관성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적 현실성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창조의 완성에 대한 그 현실성의 증거를 듣게 될 때 완전히 인식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단지 정당성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피조 세계에 있는 진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광채가 창조 활동에 임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아들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롬 8:22) 무상성이라는 멍에 밑에서 신음과 진통으로 시달리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죽음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인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지금 하나님과 그의 신실성을 그의 행위에서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영은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다시 거듭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즉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미 시작된 창조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이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진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될 일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일치의 완성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바이며,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눈 성만찬의 징표에서 우리에게 이미 현재적으로 축제가 된 것입니다. (1986.5.11,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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