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기독교인의 십자가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6:24,25)

우리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로 삼았습니다. 사실상 기독교 신앙에 속한 특별한 요소들 중에서 십자가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 사신을 전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사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특히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죄와 죽음의 극복을 가리키는 게 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기독교의 구원 사신이 자리잡고 있는 그 깊이를 오해하게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려가셨던 그 깊이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그 깊이를 말입니다. 그 깊이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심연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해주는 곳이며 모든 인간을 새롭게 해주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매년 수난절 절기 때마다 예수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과 그것에 연관된 사건들을 생각합니다. 오늘 수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심사숙고 해야할 예수님의 말씀에도 역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로 작용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무 사심 없이 듣는 사람은 분명히 이 말씀의 냉정한 요구 앞에서 당혹스러워질 것입니다. 이 냉정한 요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계속 고수됩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는 한 예수님과의 일치는 순교를 준비하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죄인이라는 판결을 받고 고통스럽게 죽어야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 그의 길을 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베드로가 이를 만류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조심스러운, 그러나 어리석은 이 시도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으로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행동에 대해서 매우 극단적으로 반응하십니다. 그는 베드로를 향해서 자기를 잘못된 길로 빠뜨리는 사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빗나가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그리고 곧 이어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는 고난을 피하고 자기를 지키려는 행위는 인간이 생각하는 자기 보호의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게 바로 그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가야할 그 길의 원리를 제자들에게 천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편 타당한 생명의 형식을 제시한 것입니다. 즉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한다고 말입니다. 자기를 포기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참된 생명을 얻게될 것입니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자기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매우 사실적으로, 가장 직접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순교 당할 각오를 하라는 부르심으로 말입니다. 박해가 심했던 초대교회 때는 사실상 많은 경우에 순교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가려고 할 때 지불되어야할 값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종종 가장 잔인하게 고통 당하며 죽는 길이 되었습니다. 역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자기 생명으로 지불해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의 초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박해 상황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거듭해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해 냉담하고 업신여기는 듯한 주장과 행동들이 큰 물결을 이루기는 했어도 기독교의 신앙고백 자체가 박해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는 오늘날 더 이상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활방식을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에 대한 적개심과 박해가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의 상황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또한 순교자들의 교회에 주어진 이후로 계속적으로 기독교 교회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의미가 오늘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아주 분명하게 밝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곧이곧대로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순교의 운명이 닫혀져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부족한 기독교인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반대로 오늘 우리의 이런 상황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의 길이 무조건 예수님의 길이나 초대 기독교의 길과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원시 기독교 시대는 그 이후 시대와는 아주 다른 특별한 상황이었으며, 이를 통해서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황과 아무리 다른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에는 그런 박해 시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그 무엇인가 보편타당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겁니다. 이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이 대하던 삶의 태도와 우리의 태도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직하게 생각하려면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야외예배를 드리러 나온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짐으로써 순교자적인 자세로 살아야한다고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배가 끝나기만 하면 불고기를 구워먹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독교의 위대한 말씀이 무의미해질 때까지 그저 낭비되고 공허해집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어떻게 대립해 있는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이럴 때만 그 말씀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전제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볼까요?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언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사실입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의 특수성과 기독교인이 가야할 길 사이에 놓인 차이는 이 말씀에 전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의 특수성은 오늘의 본문 이외에도 십자가를 언급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사신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이 바로 우리의 길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야기된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때문에 지셨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당한 십자가의 고난에는 모든 인류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사실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는 보상으로서, 혹은 인류와 맺은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의 희생물로서 선포되는 모든 곳에서 그의 죽음은 모든 다른 인간의 역사와 대립된 특수한 예수님의 길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다른 인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성공해야한다는 강압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고난 당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물리친 이유는 그 고난이 그가 바로 앞서 고백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을 파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파멸은, 즉 죄인으로 당한 죽음은 최후의 승리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행위를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 실현은 불확실해졌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실현해 볼 수 있는 선택과 가능성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의도를 성공시켜야겠다는 강압과 그 투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해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당한 실패가 곧 무(無)로 몰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기 실현의 잠정성과 허약성을 견뎌낼 수 있으며,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모든 것들을 유효한 것으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의 삶이 불확실하고 허약하지만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입니다. 질병이나 궁핍이나 사회적 고립, 억압이나 박해, 그리고 합법을 가장한 불의한 사형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는 국가의 판단이나 그 어떤 법정도 우리의 양심을 강제하는 마지막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고유한 혁명이며, 모든 지배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의 카이저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예수님과 연합한 이들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확신할 수 있으며, 이로써 모든 지상 권위와 모든 생명의 성쇠에 전혀 매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게됩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교적인 자유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가 숙고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로 살아가는 기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인의 길이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의 길과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는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감당한 그 특별한 운명을 흉내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삶으로 돌아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할 그 고유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삶의 모든 성쇠,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견뎌낼 수 있는 고난, 질병, 외로움과 죽음입니까? 기독교인의 고난이 그 어떤 정황적 설명 없이 종종 십자가와 동일시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 어떤 결정적인 요소가 망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에게 일어난 어떤 한 인간적인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결과로 인해 감당해야만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자기의 사명에 성실하려면 그것 때문에 유발된 적개심을, 또한 그것 때문에 파생된 대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걸지 말라는 베드로의 선의의 충고를 예수님이 왜 그렇게 야박하게 물리쳤는지 분명합니다. 이 충고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배반한다는 뜻이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자기에게 닥칠 그 모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오. 즉 자기 사명을 배신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그 생명의 의미를, 자기 자신을 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명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 사명과 연결된 모험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주어진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와 모험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그런 일에 과감하게 걸어두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더 이상 인간이 자기를 실현해보려다가 부닥치게된 한계로 이해되면 안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일을 성취하려는 모든 행위들이, 그리고 그런 일들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모험들이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과 상응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 실현이 아니라 자기 사명과 관련됩니다. 분명히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과업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의 생명을 어디에 걸어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테오도르 쾨르너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쉴러의 싯귀 "이 전쟁에 생명을 걸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코 생명을 얻지 못하리라"는 구호로 1815년 민족 해방 전쟁에 참가하라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구호는 오늘 우리에게는 쉴러의 시를 오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족주의라는 우상숭배에 희생물이 되어 대량 학살된 이 사람들은 결코 이 희생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뜻하지 않게 그런 사건에 얽혀드는 비극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차원에서 참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기의 삶에서 고유한 사명을, 고유하고 인격적인 삶의 과업을 발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만 생명의 약속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마가복음은 "복음을 위하여"라는 구절을 보충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은 생명을 얻게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겉모습과 허위와 기만에 걸어두지 않고 영원한 것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일에 걸어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합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모험을 감당해야만 합니까? 이것은 곧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직결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답변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삶의 과제를 심사 숙고하는 가운데서 답변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실존에 따라오는 모험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그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별로 모험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수동적이며, 또한 적절하지 못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명은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는 데서만, 즉 사회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이나 버려진 이들과 연대하는 데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명의 핵심은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에 놓여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그 사명이 역동적으로 추진되려면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 속한 근본적인 주제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닙니다. 이 주제는 오히려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인류에게 이루어져야할 진정한 일치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역시 종교적 일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런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산으로 내려온 분열의 모든 울타리를 벗어나서 예수님 자신이 제정하신 공동 식사에 참여하고, 이런 축제를 기점으로 교회의 종교적 일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공동식사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그의 재림에 대한 희망 안에서 일치시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인간성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살았고, 이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과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해야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에 신실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받아들인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기 자신의 삶에 따라오는 모험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예수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삶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는 죽음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또한 부활의 약속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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