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삶의 차안과 피안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로마서 11:33-36)

삼위일체 축일은 기독교 교회력 중에서 별로 인기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주일의 동기는 성금요일,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과는 달리 어떤 한 사건이 아니라 한 교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교회가 나중에 이 교리의 근거라고 생각했던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신약성서에는 이 교리가 아직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세례 명령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직접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씀도 역시 삼위일체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4세기에 열렸던 두 공의회를 통해서, 즉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확정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 공의회에서는 하나님과 아들의 단일성이 기독교 신앙에서 포기될 수 없는 토대라는 점이 주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 째 공의회는 영을 하나님의 신성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영을 통해서 교회의 삶에서 다시 우리에게 현재 하게되었으며, 우리는 교회의 전승과 그 삶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연관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완성한 삼위일체론은 영이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라는 교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오순절과 가장 밀접한 이웃 관계로 자리를 잡게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그리고 우리 교회가 거의 모든 대축일에 언급하고 있는 신앙고백을 축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신앙고백입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주교단은 이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니케아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고, 그리고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의회가 "니케아"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이렇듯 뒤늦게 기독교 도그마로 형성되었지만 이 교리는 분명히 기독교가 이해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뒤늦게 명확한 형식으로 발전했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선포에서 처음부터 핵심적인 기능으로 작용한 하나님 이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과 그에게서 유래하는 영이 하나님과 일치하며 짝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영 안에서 관계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지 그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이 교리의 사실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오랫동안 습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와 창조자로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현실성이 완전하게 드러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과 영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본질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은 첨가물이나 혹은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한 부가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생각에 갇혀 있게되면 삼위일체론은 아주 졸렬하게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나 세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라는 한계 안에서 이미 고갈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히려 아들과 영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일이 몹시 어렵게된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 바로 그 모습으로 생각하는 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의 은폐된 곳에서 땅을 관리하는 아버지요, 창조자라는 표상이 지난날에는 아주 오랫동안 당연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표상은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전통적인 하나님 표상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오히려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인 구도에서 생각하는 우리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사상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고대 기독교가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만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능력이 정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러한 연결이 교회의 신앙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과 그의 통치가 그저 우리에게 요원한, 하늘의 은폐된 곳에 숨어있는 현실성을 의미한다고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안에서 하나님은 현재의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사상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실성이 피안의 세계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현실성은 자체적으로 확고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계시된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간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경우에도 이미 그 하나님의 실존은 그가 세상이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야웨라는 자신의 이름을 바꿔 부르게 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일종의 퍼즐 게임을 하듯 해석한 그 유명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현존하게될 자로서 현존하게 될 것이다."(Ich werde dasein, als der Ich dasein werde.)(출3:14). 이 문장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현존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미래와 그 성취의 때를 수세기에 걸쳐 기다려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이 거듭되어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미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직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현실성은 단순 명료하게 이미 결정되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기독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료되어버리지 않은 역사로 인해서 여전히 논쟁적인 대상으로 머물러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현재적 현실성은 아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재는 그 미래를 통해서 이미 규정되었으며, 또한 그 미래의 지평에서 밝혀졌다고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그리하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이 당신들에게 주어질 것이오." 이렇게 하나님의 미래적 통치를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금 이미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현재 그 사람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현재 통치하고 계십니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통치가 온전하게 작용하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어버린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현재 우리의 이 세상에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은 현재 생명의 영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영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현현 했으며,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사신을 통해 활동하는 그 분을 말합니다.

영, 이 분은 하나님이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실성입니다. 다가오는 나라의 주(主)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그에게 임한 그 영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영은 예수님과 완전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예수님에 관한 사신을 듣고 영접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유지하고 밝혀주기 위해서 선포된 예수님에 대한 사신의 능력 앞에서 우리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현실성입니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듯이 영은 모든 진리를 추구합니다. 영은 우리 실존의 심연을 개방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창조자로 증명됩니다. 그는 바로 배부름과 자기 만족에서 머물러있지 않는 영입니다. 이 세상의 고난과 불의의 중심에서, 우리의 반목하는 삶의 중심에서 자유를 일구어내는 영입니다. 전쟁과 죽음으로, 무의미와 의혹으로 뒤범벅이 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평화의 영입니다. 생명과 관계된 일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을 희망하며 신뢰하는 영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내재한 무상, 고통, 고난에도 불구하고, 또한 늘 미흡한 우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기쁨을 몰아오는 영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영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하고 그 일에 관계하는 사랑의 영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이란 모든 인간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며, 이런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현실성이 지금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 현실성의 바람을 너무나 미약하게 감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피안에서만이 아니라 차안에서, 바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 찾아야합니다. 하나님의 피안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피안에서만 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라면 참된 하나님이 아닐지 모릅니다. 피안의 하나님은 그가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그 모든 생명 활동을 야기하고 유지시키며, 또한 우리 생명을 규정하고 밝혀나간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현실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현재의 생명에서만 현실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이 이미 모든 현실성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급은 공연한 일이며 쓸 데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이 작용하는 부분은 우리의 생명이 자신을 초월하는 모든 곳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훨씬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하는 힘에 의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초월은 기쁨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고난과 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 생명의 기쁨을 강탈해 가는 일상의 소심증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사물이 근본적으로 불안정하지만 생명을 신뢰하는 데서 이런 초월이 일어납니다. 그 초월은 우리의 이웃이 전혀 사랑 받을만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 차안의 세계에 사는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러한 피안이 없는 한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불합리하며, 참된 자유와 의미 실현과 내적인 평화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는 비밀은 우리 자신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우리 인간 삶의 고유한 비밀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내면의 심연을 개방시키는, 그리고 피안으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피안적인 분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에 차안적으로 현재 함께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피안적으로 현재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우리가 삶의 한계, 불의, 모순으로 고통 당하는 곳에서,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고통 당하는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당한 모든 이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의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는 고난과 위기의 근원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삶의 현존에 나타나는 무의미성과 과도한 업무에서 찾아드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는 인내심을 통해서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됩니다. 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써 우리의 현존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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