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웃으로부터의 자유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를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이다. 도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조급하고, 거의 불경스런 투로 깨어버린 인간적 연대는 사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친밀한 요소들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 친척과 형제 및 자매 상호간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 관계가 오늘보다 훨씬 공고했으며, 아주 기본적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 이외에도 직업적인 사회관계나 여러 친목 단체를 차례 차례로 열거하실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가족 간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계야말로 항상 특별하게 밀착되어 있으며, 거의 의무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다섯 번 째 계명에서도 보듯이 이 가족관계를 경홀히 여기는 행위는 중죄로 다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이 가족 간의 연대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변치 않고 증명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부모, 자녀와 형제 및 자매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정은 이 험악한 세월에서 안식과 인간다움을 제공하는 오아시스라고 말입니다. 이런 단란한 가정은 오늘날도 역시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출세를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을 의미 있게 지탱해주는 근본입니다. 부모의 행복이 아닌 자녀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부 상호간에 자신들의 삶을 성취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을까요? 가족은 분명히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안전한 울타리 노릇을 합니다. 이 안에서 자녀들은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주변 세계를 신뢰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가족적인 삶의 편안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종종 실망으로 변합니다. 가족 공동체에 대한 배려나 책임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누려야 할 자유가 제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개인들은 대개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관계 속에서 훨씬 풍부하게 삶을 실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가족 간의 연결을 해체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더 할 나위 없이 매우 냉정하게 말씀하신 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는 그저 이렇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입니다(마10:37). 그런데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 딸과 자녀들, 형제간의 삶을 미워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모든 관계를 끊어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듯 혹독하게 말씀하십니까? 이것은 원래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하라는 사신과 나무나 크게 상반되는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이렇게 저렇게 밀착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요구일까요? 만약 우리가 이런 주변 사람들을 거부해버려야만 한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적 관계가 절대적인 효력을 갖게되는 걸까요? 혹시 예수님이 생각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아무 생각 없이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뜻은 아닐까요? 만약 예수님이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이런 요구를 거절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의 요구야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우리가 저항하지 못하는 연약함과 혼동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부인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는 저항할 수 없다."는 니체의 진술은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의 사신을 연약한 무저항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물론 니체만 오해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은 니체 같은 이들의 모든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기준은 분명히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따라주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도 이에 해당합니다. "누가 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도 주며, 누가 오리를 함께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시오."(마5:40,41). 이러한 가르침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 이웃이 요구하기만 하면 아무 망설임 없이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담긴 절대적인 연결을, 그 혈연적인 연결까지 깨어버리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적 관련들이 전혀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또한 전혀 구속력이 없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유나 재물이 무조건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어느 부자 농사꾼의 잘못은 그의 재물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신뢰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가족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경우에 이 가족적인 연대는 그 가족 간의 삶에서 모색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가족의 삶에서 궁극적인 생명을 성취해보려고 할 경우에는 가족 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부부상호간에도 종종 갈등과 실망이 생깁니다. 또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불효를 탓하며 실망합니다. 그 자녀들이 성장해서 독립적인 개체가 되면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발달의 자연적인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과도한 요구들을 다른 곳으로 돌리십니다. 인간이 규정되어야 할 심연을 실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십니다. 삶의 의미는 부부나 가족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삶의 의미가 재물의 소유나 재물을 통한 즐거움에 담겨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궁극적인 데서 발견합니다. 이웃의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또한 유복한 생활조건이 성취되어도 사람들은 내적으로 불안해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어떻게 심연을 성취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우선적입니다.

가장 깊고 궁극적인 인간 생명의 의미가 성취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예수님이 전하신 사신에서 언급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늘 찾으려고 애쓰는 결정적인 평안과 생명의 성취를 하나님 안에서만 이미 지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공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의 정의와 평화도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하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 우리의 시간과 능력,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안락함에 대한 그 어떤 인간의 요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우 냉정하게, 그리고 매우 도발적이고 배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수님의 사신은 십계명의 첫 계명이 말하는 배타성과 같은 요구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그 어떤 경쟁적인 요구도 참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인간은 그의 부르심에 답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비록 당장 처리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할 농사일이나 소를 파는 일이나 밭을 가는 일처럼 중요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거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경건한 예절의 의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보다 우선적으로 실행되어도 된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첨예한 갈등이 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번쯤 있게됩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뒤편으로 제쳐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가까운 가족과 친척을 더 이상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처럼 대하셨습니다(눅8:19 이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기 위해서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졌습니다. 이제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이런 배타성은 이 세상에서 거듭해서 충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짊어져야만 할 짐, 곧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배타성 요구는 어떤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가에 대한 고백과 그 해명도 몹시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있었던 그런 충격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배타성 요구를 과감히 실행하여 이 사회를 격분케 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독교의 이런 배타적인 태도를 주로 비판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배타성 요구에 의해서 기독교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 힘을 통해서 기독교는 다른 모든 진리를 압도하고, 그리고 살려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시는 나머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여기시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서 최우선적인 자리에 있을 때만 인간의 삶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기독교의 유일한 내용으로 설명되는 곳에서 믿음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되고, 그뿐만 아니라 결과적인 일이지만 사랑도 역시 그 능력을 상실하게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이웃 사랑이 인간의 실존에 휩싸여버리기 때문인데, 이 인간 실존은 그 뿌리가 너무나 박약합니다. 하나님이 우선하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우선하는 곳에서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토대를 둔 세계의 미래, 즉 새로운 생명이 전개될 세계의 미래가 우선하는 곳에서만 다른 이들을 부패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의 인간 사랑이 역동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값을 지불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무언가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런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포기는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을 쌓는 일과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포기와 금욕은 그것이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에만, 또한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수단일 경우에만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랑 설교자였던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은, 그리고 예수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꺼이 감당해야만 했던 짐입니다.
세상의 여러 요구 앞에서 우리가 난감해지는 이유는 주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거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현재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것이 최소한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만은 확연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 안에 현재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바친다는 것은 모든 길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현재 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만찬으로 현재 하는 공동체 안에서 말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요구는 교회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오늘도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기독교의 공동체적 삶과 그 업무를 올곧게 세워나가는 데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 지역교회와 전체 교회는 새로운 사회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과 계속적으로 일치를 도모하지 않고는 더 이상 교회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교회라는 기구의 틀 안에서만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로서는 세상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특별한 기구로서 교회는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어떻게 온전하게 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인 삶의 실현에서 그 현재적 모습을 획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서 말씀은 이제 우리와 새로운 관련성을 맺게됩니다. 전 인류를 포괄하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희망, 사회 정의를 올곧게 세워나가는 희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희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하는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희망과 관계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 어떤 값을 지불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서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혹은 너무 불확실하며, 또한 무계획적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일은 이제 더 이상 개인 윤리로 넘겨지면 안됩니다. 개인 윤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사이에 놓인 거리는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기독교 윤리의 한계라는 명분 하에 너무나 안이하게 이 세상을 개인적인 행위의 영역으로 내팽개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적 실존의 값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삶의 영역을 예수님의 사신이 말하고 있는 배타성 요구로 끌어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만이 아니라 직업적인 삶도 역시 그 중심을 하나님의 통치 안에 두어야 합니다. 삶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각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다른 것처럼 제 각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순환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서 완전히 정리될 것이며, 우리의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그 미지근함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불신 받고 있는 바인데, 바로 그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결과적으로 대학 사회에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학문작업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과 전문 영역은 하나님의 한 진리를 수행하기 위해서 유별난 법칙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인 삶에 대한 예수님의 배타성 요구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야합니다. 사회적 삶을 성취해나가기 위한 그 작용은 이미 이런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어떤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학문 현장에 내재해있는 규칙을 방해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신의 배타성이 옛날부터 불러일으켜 온 분노에 상응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배타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학사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당연하고도 구체적인 귀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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