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한국교회가 말하는 구원론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뒤틀리고 왜곡된 구원론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겠기에 공부의 순서를 그렇게 정했습니다.

 

인간은 한 번도 자기 앞의 생을 그냥 살지 않았습니다. 항상 보다 새로운 삶, 보다 완전한 삶을 꿈꾸며 도전해왔습니다. 불의와 고난으로 가득한 현실의 벽 앞에서 때로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금 궁극적인 행복과 완전한 평화를 상상하면서 눈앞의 절망을 해쳐왔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정체하지 않고 쉼 없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도 오늘보다 나은 내가 되고,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오늘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뜨거운 갈망과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갈망과 에너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솔직히 그 진원지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진원지가 경쟁심이라고 하기에도, 모방 욕망이라고 하기에도, 상상력이라고 하기에도, 창의성이라고 하기에도, 영(靈)이라고 하기에도 뭔가가 부족합니다.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실체조차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갈망과 에너지의 정체 또한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망과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구원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이라고 하면 대뜸 종교를 떠올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적 환상을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욕망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절대 한계와 삶의 궁극적 한계를 정직하게 인식한데서 비롯된 가장 현실적인 욕망이고, 모든 욕망의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입니다. 모든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기를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는데(롬8:21-22)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진실로 모든 인간은 구원을 갈망합니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 심지어 구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까지도 부지중에 구원을 갈망합니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부정할지 몰라도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을 갈망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삶의 공허감을 느낍니다.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다가도 불현듯 삶의 근원적인 공허감 앞에서 멈칫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 웃고 떠들며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다가도 뿌리칠 수 없는 공허와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직면하고 고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또 돌연히 온 몸에서 삶에의 의지가 빠져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왜 사는지, 나는 누구이며 삶은 무엇인지,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게 됩니다. 생명과 삶의 근원 진실을 묻는 거지요. 바로 이런 것이 근원적인 구원 갈망의 현상들입니다.

구원이란 지금 여기의 삶과 동떨어진 저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멀고 먼 종말의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늘의 일상과 잇닿아 있는 실존의 문제이자 존재와 삶 전체의 운명이 걸린 최고의 화두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떨쳐내지 못한 인류 지성사의 오랜 화두입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에게 ‘구원’이라는 화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잠시 정신적인 사치를 즐기고 싶을 때, 인생이 나를 코너로 내몰 때, 세상에게 상처받았을 때 한 번씩 꺼내 만지작거릴 뿐 내적 공허감의 실체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추적할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구원 문제는 유치한 종교적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기도 하고,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다 가면 그만이지 뭘 더 고민하느냐며 기꺼이 운명에 순응하기도 하고,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자조했던 공자를 들먹이며 선을 긋기도 하고, 역사의 진보가 곧 구원이라고 강변하며 긍정의 걸음을 내딛기도 하고, 그저 생활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눈앞의 현실과 필요만을 좇기도 합니다.

사실입니다. 자본의 위력을 맛보고 영상의 현란함에 익숙한 현대인, 신자유주의 사회의 세상살이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구원 같은 근원 문제에 착념하지 않습니다. 불의하고 부실한 세계의 현실, 절대 한계에 갇힌 삶의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희생자인 현대인은 무한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주체로 살아가느라, 온통 시장이 된 사회에서 자기의 상품성을 입증해야 하는 자기 경영자로 살아가느라 구원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뿐 아니라, 자본을 획득하는 일에 삶의 진액을 쏟아 붓기 위해서라도 구원과 같은 근원 문제는 애써 회피합니다. 대신에 재미 ‧ 여가 ‧ 게임 ‧ 화려함 ‧ 안락함 ‧ 사치 ‧ 행복 등의 사적 욕망에 매진합니다. 불의하고 부실한 현실 속에도 빼먹어야 할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빼먹는 일에 동분서주합니다. 이렇듯 인간과 삶 전체를 상품화시키는데 성공한 신자유주의 사회는 구원 문제를 인간의 삶에서 퇴장시켜버린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고 있는 성경은 온통 구원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주고자 하신 최고의 선물이 구원이고(요3:16),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깨우치고자 하신 것도 구원이고(요4:14),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구한 것도 구원이고(마19:16),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도 그 안에 영생(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요5:39),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고 누리고 드러내고 증언해야 할 최고의 실재 또한 구원입니다. 구원은 실로 하나님의 화두이자 성경의 화두입니다.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 화두가 현대인의 삶에서는 증발되었고, 교회 안에서는 심각할 정도로 뒤틀리고 왜곡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스무 살 되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떤 형태의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존재도 부정했었는데 정말 뜻하지 않게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게 뭔지,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벼락 맞듯이 알게 된 후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담겨 있다는 것, 그 구원이 나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성경을 알아갈수록,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나를 알아갈수록, 세상과 인생의 어떠함을 알아갈수록 점점 더 빛을 발하는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이 얼마나 찬란하고 광대하고 심오하고 오묘한지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원의 찬란함, 구원의 영광, 구원의 광대함, 구원의 심오함에 눈떠갈수록 한국교회가 가르치고 추구하는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많이 다르다는 것,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비해 빈약할 뿐 아니라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 매우 피상적이고 종교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구원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달라야 하는데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솔직히 기독교는 본질적인 면에서 종교가 아니거든요. 종교는 인간의 질문에 답변을 가져다주지만, 기독교는 인간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욕망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 초월을 향해 나아가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의 현실로 내려옵니다. 종교는 내가 믿음을 소유하지만, 기독교는 믿음이 나를 소유합니다. 종교는 현세 기복적이거나 현세 도피적이지만, 기독교는 현세를 초월하면서 현세를 긍정하고 현세를 긍정하면서 현세를 초월합니다. 이외에도 종교와 기독교는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칼 바르트는 종교를 비판한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는 로마서 주석에서 종교야말로 최고의 죄이며 타락의 죄, 곧 신인동형론적 죄라고 했습니다. 종교가 열망하는 것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욕, 지식욕, 다른 욕구들과 같은 반열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 종교가 제아무리 평화스럽고 추앙할 만하다 할지라도 종교의 실체는 추하고 색욕적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복음은 종교의 절대 부정이며, 그리스도는 종교의 마침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옳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성의 부정이요 마침입니다. 때문에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달라야 합니다. 구원의 방식도 다르고 구원의 내용도 달라야 합니다. 만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유사 기독교일 뿐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기독교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교회에 유통되는 구원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세우는 교리는 좀 다른 듯 하나 내용을 뜯어보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별반 다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다른 종교(불교, 유교, 회교)가 가르치고 추구하는 구원보다도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입니다. 속 좁은 편견과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집단이 된 것도 한국교회가 가르치고 추구하는 구원이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이고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혹 동의가 안 되시나요? 한국교회가 믿고 따르는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신가요? 아마 대다수의 소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많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보다도 훨씬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이고 편협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본래 위대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깊고 오묘하고 다채롭고 광대한 생명의 세계요 삶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힘입은 화해와 평화의 세계입니다. 죽음이 왕 노릇하는 시스템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시스템으로의 우주적인 전환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 안에서 유통되고 있는 구원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담겨 있는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풍성함과 심오함과 오묘함과 다채로움과 광대함이 증발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로 물러나버렸고, 개인의 욕망과 소원성취의 문제로 쪼그라들어버렸으며, 영혼의 문제로 탈바꿈해버렸습니다. 우주와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구원이 사적 욕망으로 쥐방울만해져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약학자인 스캇 맥 나이트도 같은 이야기를 했더군요. “성경이 복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새롭게 고민하면서 깨달은 중대한 사실은, 내가 자라면서 복음이라고 배워온 것이 실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예수 왕의 복음. 14쪽). 그가 잘못된 교회에서 잘못된 복음을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신실한 부모님과 목회자들로부터 성경의 복음을 듣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복음이라고 배워온 것들에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키에르케고르도 19세기 당시의 유럽 교회를 보면서 “기독교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로부터 멀어졌다.”고 탄식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교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곤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교회는 지금 총체적 부실의 차원을 넘어 총체적 와해의 국면에 처해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기막힌 처지에 내몰려 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 산다’는 옛말처럼 한국교회가 지금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한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기는 합니다만,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행태를 보면, 또 끊임없이 출몰하는 추문들을 보면 총체적인 와해의 국면에 진입한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윤리적인 타락에서부터 제도적인 문제까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의 현상들에 불과하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잘못된 신앙과 신학에 있습니다. 특히 왜곡과 뒤틀림이 심한 잘못된 구원론에 문제의 근원이 있습니다. 구원론의 왜곡과 뒤틀림이야말로 한국교회 일만 악의 근원입니다. 자고로 생각과 가치관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행동과 삶도 잘못 가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이 잘못되면 신앙과 교회의 행보가 잘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lple Way) 설립자인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이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혼란스러운 것들의 대부분이 악의를 품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나쁜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확신하며, 나쁜 신학에 대한 해결책은 신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학’을 갖는 것이라고 믿는다.”(신광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23쪽에서 재인용). 옳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신학의 왜곡과 뒤틀림에서 비롯됐습니다. 특히 구원론의 왜곡과 뒤틀림에서 비롯됐습니다. 정체불명의 비성경적 구원론,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욕망이 야합한 욕망의 구원론, 교회에 들어오는 문턱을 낮춘 값싼 구원론, 천국행을 보장하는 내세 구원론, 속 좁은 편견과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신념의 구원론, 달라붙지 않아야 할 이물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짓 구원론에서 비롯됐습니다.

몇 년 전 ‘메가 처치’ 문제를 파헤친 신광은 목사는 최근에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교묘하게 뒤섞은 ‘아르뱅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천하무적 아르뱅주의. 27쪽). 신약학자 김세윤은 아예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파적 복음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도 사실상 같은 복음을 선포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개혁의 중심 구호인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칭의와 성화. 80쪽).

옳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하지 않은 구원을 말해왔고,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구원을 약속해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변질시켰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구원 이야기를 들여다보십시오. 모든 구원 이야기에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구원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과 번영에 골몰하는 것도 그렇고, 심리적인 위로와 평안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죽음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는 한국교회의 맨얼굴입니다. 제가 이토록 거칠게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외장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