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간 1부의 내용을 뒤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어떻게 뒤틀리고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 회자되었던 구원론, 막연하게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구원론, 뿌리가 깊어 정통이라고 인식되었던 구원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봤습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왜곡되고 뒤틀리게 된 배경 또한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추적해가며 살펴보려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교회사적 오류와 일탈을 반성하면서 구원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서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라는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무엇이 구원인가?’라는 구원의 내용에 깊이 천착하고자 합니다. 구원의 쪼가리가 아닌 구원의 덩어리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정직한 눈과 진지한 탐구의 정신으로 구원의 진실, 신앙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한국교회가 참된 구원에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기에, 또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복되고 창조적인 일은 없다고 믿기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고 탐색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내용입니다. how가 아니라 what입니다. what을 제대로 알면 how는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이므로 how보다는 what에 집중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탐색해가는 옳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맨 먼저 던져야 하는 물음도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가 아니라 ‘구원이란 무엇인가?’여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진짜 구원일까요? 구원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그처럼 목이 터져라 구원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원이 무엇이기에 모든 생명이 타는 목마름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구원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복되고 창조적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창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매우 생경하고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창조를 들여다봐야만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동떨어진 구원은 실체 없는 환상이나 망상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조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창조는 존재의 근원과 시작을 말하는 것이고, 구원은 망가지고 뒤틀린 존재의 치유와 회복을 말하는 것인 만큼 창조와 구원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와 구원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 사이에 비연속적인 측면도 많지만 연속적인 측면 또한 많습니다. 때문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반드시 창조가 무엇인지, 왜 창조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교회를 보면 웬일인지 이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알기 위해 창조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토대인 창조 이야기는 팽개치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내달리기 바빴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며 십자가 중심의 구원만을 설파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구원의 중심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빼놓고는 구원을 이해할 수도, 구원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닙니다. 칼 바르트가 “심판자가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이 사실에 모든 신학이 달려 있다.”(교의학 개요)고 말했을 만큼 십자가는 구원 사건의 중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십자가에도 구원의 근원과 내용이 들어있긴 하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지 구원의 원형은 아닙니다. 구원의 원형은 십자가가 아니라 창조입니다. 오직 창조만이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창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구원의 책인 성경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는 창조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선언은 매우 단순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세 가지 근원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천지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다.

2) 하나님의 창조가 앞으로 펼쳐지는 모든 이야기의 토대요 전제이다.

3)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천’(하늘)과 ‘지’(땅)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중에 1)과 2)는 덮어두고 3)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묻고 확인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天地)’의 세계가 과연 어떤 세계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구원의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가 뭘 뜻하는지를 묻고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천지(天地)가 뭘 뜻할까요? 한자어 그대로 물리적인 하늘과 물리적인 땅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총칭하고, ‘지’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총칭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이라고 이해하면 성경 이야기 전체가 풀리지 않습니다. ‘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비물리적 세계)를 총칭하고, ‘지’는 눈에 보이는 하늘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 세계(물리적 세계)를 총칭한다고 이해해야만 풀립니다.

 

한 번 확인해봅시다. 복음서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5:16,45,48, 6:1, 7:1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7:21, 10:32,33, 12:5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늘’을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창공(Sky)이라고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구름 속에 계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적 존재(세계내적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하늘’을 눈에 보이는 창공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초보에도 이르지 못한 유아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하늘’을 창공(Sky)이라고 이해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하늘’을 창공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바울의 말도 확인해보겠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하늘에 속한 것들’과 ‘땅에 속한 것들’이 만물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연이어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만물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하늘에 속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땅에 속한 것들은 보이는 것들이라고 설명하듯 말했습니다.

또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롬8:24-25).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4:18). 여기서도 ‘천지’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라고 이해하면 바울의 말이 도저히 해석되지 않습니다. 창조되지 않은 것을 바란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창조되지 않은 것이 영원하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오직 ‘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비물리적 세계)를 총칭하고, ‘지’는 눈에 보이는 창공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 세계(물리적 세계)를 총칭한다고 이해해야만 뜻이 통합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 볼 때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하늘’은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창공(Sky)이 아닙니다. ‘땅’도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Earth)가 아닙니다.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를 총칭하고, 땅은 눈에 보이는 창공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 세계를 총칭하는 게 분명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진 일원적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세계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 즉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창세기의 세계 이해가 잘 드러난 책이 욥기입니다. 욥기는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의 모습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먼저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다, 아들과 딸이 열이나 되고 재산도 많다,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라고 땅의 현실을 말합니다(1:1-5).

그리고는 돌연 비가시적 세계인 하늘로 장면이 바뀝니다. 여호와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회집해 있는 자리에 사탄도 들어가서 욥의 신앙을 시험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 때문임이 분명하니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보라고,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1:6-12).

이후 장면은 다시 땅의 현실로 바뀝니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보라는 하늘의 결재가 떨어지자마자 사탄은 곧바로 땅으로 돌아와 욥을 쳤습니다. 욥의 자녀들과 종들과 재산을 한꺼번에 다 쓸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이다, 라고 엎드려 예배했습니다(1:13-22).

그러자 하늘로 장면이 바뀝니다. 욥에게 무시무시한 재앙을 퍼부은 사탄이 다시금 여호와 앞에 나아가 논쟁을 합니다. 욥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 욥이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해 욕을 퍼부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그의 뼈와 살을 쳐보자고 제안했습니다(2:1-6).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땅으로 내려가 욥의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2:7-10).

이처럼 욥기에는 하늘과 땅의 세계가 교차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로만 이루어진 ‘일원적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세계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가 교차합니다. 이원적 세계가 서로 소통합니다. 하늘에서 땅의 일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고, 하늘에서 결정된 일이 땅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선악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고 대립하는데 비해 성경이 말하는 ‘이원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계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전혀 다른 두 세계인데 비해 성경이 말하는 ‘이원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입니다. 하늘은 지혜와 사랑으로 땅을 다스리고, 땅은 하늘의 지혜와 영광을 담아내는 참으로 조화롭고 복된 세계입니다.

인간도 세계와 같이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조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혼과 보이는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루아흐- 하나님의 호흡, 생명의 바람)를 불어넣으심으로써 흙이라는 땅의 요소와 생기라는 하늘의 요소가 조화를 이룬 이원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창2: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 사는 동안 줄곧 ‘만나’라는 특이한 음식, 즉 땅에서 거두지 않은 색다른 음식을 먹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땅에서 거두지 않은 만나를 먹이셨을까요? 모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저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만 먹어도 되는 일원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하는 이원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땅에만 속한 일원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도 속한 이원적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그 진실을 깨우치시려고 40년을 하루같이 만나를 먹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창조의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가득한 일원적 세계를 제조하지 않으시고 물질과 비물질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창조한 이원적 세계는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창조의 메시지이자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신 걸까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만 만들어도 될 텐데 왜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신 걸까요?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중요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시편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시104:1-4).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반문하듯 말했습니다(사66:1).

무슨 말입니까? 시편은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적 행위’라는 이야기이고, 이사야서는 ‘창조는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나라)을 세우는 원대한 작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구석구석에 펼치기 위해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질로만 이루어진 일원적 세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낼 수 없고 오직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라야 가능하겠으니까, 또 그래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집(나라)이 될 수 있겠으니까 굳이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플라톤이 추론한 ‘이원론적 세계’와 하나님이 창조한 ‘이원적 세계’를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해보겠습니다.

 

하늘 (실선으로 원을 표시)

땅 (점선으로 원을 표시)

(그림1)

 

플라톤이 생각한 ‘이원론적 세계’는 (그림1)과 같이 하늘과 땅이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실선으로 확실합니다. 하늘은 실재하는 진정한 세계이고 땅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땅은 점선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창조한 ‘이원적 세계’는 (그림2)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 (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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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실선)

(그림2)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원적 세계’는 (그림2)와 같이 하늘과 땅이 모두 실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늘과 땅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겹쳐있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에 하늘이 함께 있습니다. 하늘 없이 순수물질만 존재하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태양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달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꽃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밀림의 호랑이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바다 깊은 곳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사람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차원도 다르고 속성도 다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는 결코 지양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종말의 날에도 땅은 하늘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며 하늘은 땅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겹쳐 있을 것입니다. 하늘 속에 땅이 침투해 있고, 땅 속에 하늘이 침투해 있을 것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 사실을 매우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창조는 필연적으로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중의 세계임을 주장하면서 “하늘은 땅의 상대적 피안을 나타내고 땅은 하늘의 상대적 차안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또 “하늘과 땅으로 나타나는 이원의 세계는 균열되었고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 이원성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세계의 파멸을 의미한다.”고 단언했습니다(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22쪽). 옳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오묘한 창조세계가 바로 구원의 원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구원 계획이 있었다,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려고 미리 세워놓으신 원대한 구원 계획이 있었다, 그 원대한 구원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엡1:3-10).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원적인 창조세계의 본래적 회복이 곧 구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던 ‘천지의 세계’, 즉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오묘하고 조화로운 세계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창조세계가 구원의 원형이라는 걸 함의합니다. 예수님의 말로 표현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6:10).

 

지금까지 짧게 성경의 여러 증언을 살펴봤습니다. 어떻습니까? 창조와 구원이 원형과 완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구원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입니다.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는 이 명제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설명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나 이원론자들은 창조와 구원을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창조의 세계를 떠나 이데아의 세계,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유토피아주의자들이나 진화론자들은 창조와 구원을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창조의 세계가 발전하여 완전케 되는 과정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은 창조와 구원이 별개라고도 말하지 않고, 과정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조와 구원을 구별하면서도 서로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H.G.푈만. 교의학. 242쪽).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명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빠뜨려서는 안 되는 대명제이자 기본 토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든 하나님의 창조라는 토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형해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하늘로 치솟지 않을 수 있고, 죽은 후에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으로 뒤틀리지 않을 수 있고, 세상만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종교화하지 않을 수 있고, 존재의 신성화로 굴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창조의 원상을 회복하고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는 것으로 정상화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완성된 세계에 참여하는 것으로 복원될 수 있습니다. 환상이나 망상이 아닌 실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이 근원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창조를 통해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기본기가 중요한데 - 건물도 기초가 중요하고, 운동도 기본기가 중요하고, 학문도 기초 학문이 중요하듯 구원 또한 기본 토대가 중요한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는 구원론의 기본 명제를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이 심각할 정도로 뒤틀리고 왜곡됐습니다. 구원이 하늘로 치솟아버렸고, 죽은 후에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으로 뒤틀려버렸고, 세상만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종교화되어버렸고, 존재의 신성화로 굴절해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의 토대인 창조세계를 상실했습니다. 구원의 리얼리티를 상실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창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창조와 구원을 통시적으로 보고, 창조를 통해 구원을 말해야 합니다. 만일 창조와 구원을 통시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은 환상으로 형해화하거나, 망상으로 추락하거나, 죽음 저편으로 증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말하지 않고 창조만 말하면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뭘 위해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가 없고, 반대로 창조를 말하지 않고 구원만 말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창조와 구원을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창조도 의미와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고, 구원도 토대와 내용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여, 저는 창조와 구원을 통시적으로 바라보며 작업해나갈 것입니다.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는 구원론의 기본 명제에 터하여 구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해갈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뼈아픈 실패를 돌아보면서 구원의 방법론이 아니라 구원의 내용에 천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