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구원론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에 덧붙으면 안 되는 이물질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항목이 많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마음 아픈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 아닌 이물질이 가득한 오물단지 구원론이고, 구원의 실재는 없는 빈털터리 구원론입니다. 참 교묘하다 싶을 만큼 마땅히 채워야 할 것은 버리고,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은 애써 채운 이상야릇한 구원론입니다.

 

그럼 이상야릇한 구원론의 실체를 들여다볼까요? 우선 오물단지 구원론의 실상부터 살펴보지요. 오물단지 구원론의 실상은 매우 소박하고 보편적인 구원 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르는 구원 이해가 무엇인가요? ‘예수 믿어서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좀 더 소박하게 말하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 즉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표현과 이해에 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천국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으니까(요3:16)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를 믿어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고, 그런 요약이 가능하다면 ‘예수를 믿어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과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예, 말인즉슨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비슷한 듯 다릅니다. 그리고 비슷한 듯 다른 미묘한 차이에서 구원에 대한 본질적인 왜곡과 뒤틀림이 발생합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간격이 벌어지듯 구원 이해의 왜곡과 뒤틀림 또한 아주 미묘한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사실 똑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남자 친구가 날 사랑하여 멋진 핸드백을 선물했다.”와 “남자 친구가 날 사랑하여 멋진 핸드백을 선물했다.”는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의 뉘앙스와 뜻은 무척 다릅니다. 전자는 남자 친구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고, 후자는 남자 친구에게서 멋진 핸드백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말의 표현은 똑같지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만남과 관계의 성격이 전혀 다르게 이해됩니다. 그런 면에서 방점의 차이가 모든 걸 말해준다고 해도, 방점의 차이에 근원적인 차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예수에게 방점이 있느냐 천국에 방점이 있느냐에 따라 말의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에게 방점이 있으면 예수가 구원의 주체이고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이 되는 반면, 천국에 방점이 있으면 예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게 되고 주된 관심사는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완전히 다른 말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무심했습니다. 예수에게 방점을 찍으나 천국에 방점을 찍으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천국에 방점을 찍어왔습니다. 예수를 목표로 하는 것보다는 천국을 목표로 하는 것이 훨씬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기 때문에 사람이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절로 천국에 방점을 찍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왔습니다. ‘예수 믿어서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은 은근슬쩍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고(예수가 빠졌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으로 전이되고 와전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적인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상식으로 굳어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다들 아는 듯 모르는 듯 예수가 아닌 천국에 방점을 찍다보니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구원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구원관에는 세 가지 내용이 함의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1)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사후 천국행).

2)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공간 이동).

3) 구원은 영혼이 받는다(육신은 땅으로 돌아가 소멸하고 영혼이 구원받음).

 

이 세 가지 내용이 사후 천국행 구원관의 핵심인데 이 셋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나왔습니다. 이원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원론(dualism)이란 세계가 근본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범주(category)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선과 악 등 존재하는 실재를 두개의 근본적인 범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상체계입니다. 플라톤은 고대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체계화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 실재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하늘은 진리의 세계로서 영원불변의 세계이고, 땅은 물질의 세계로서 변화무쌍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도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고, 몸은 변화무쌍한 물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터하여 구원을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영혼이 물리적 세계를 떠나 영적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구원의 대상은 오직 영혼이고, 영혼의 해방은 오직 육체가 죽어야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구원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구원이라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말합니다.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영혼과 육체가 다시금 조화롭게 되는 것,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금 통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엡1:10).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마6:10).

이처럼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명백히 다릅니다. 아니, 아예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이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관을 믿고 따랐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 기초한 사후 천국행 구원 -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 것이다 - 을 하나님의 구원인양 굳게 믿고 따랐습니다.

 

그 실상은 이러합니다. 우선 차례대로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의 내막부터 살펴보도록 하지요. 2005년에 한국인의 장례 문화에 대한 갤럽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한국사람 중 40.7%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41.6%는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뭐라 말할 수 없다’는 17.7%). 여기서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숫자(40.7%)를 가늠해보면 기독교인 숫자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타종교인 중에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꽤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비기독교인들의 구원관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들 중 대다수는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영혼이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후에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사후 세계가 ‘극락’이 됐든 ‘천국’이 됐든 ‘하늘나라’가 됐든 좌우간 이 세상보다는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함의되어 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후 내세’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구원관은 어떨까요? 기독교인의 구원관은 당연히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착하게 살면’이라는 조건 대신 ‘예수를 믿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사후 세계도 단지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후 세계에 대한 이해는 어떨까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기독교인이 믿는 ‘사후 천국행’ 구원관이나 비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사후 내세행’ 구원관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사후 세계를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느냐 ‘극락’이라고 하느냐 ‘좋은 곳’이라고 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다는 면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봐야 합니다.

 

혹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몇 가지만 확인해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종종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좋은데 꼭 젊어서부터 믿어야 합니까? 성경에도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구원받은 강도가 나오던데 그 사람처럼 젊었을 때는 세상 재미 좀 보며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 믿어도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믿으나 죽기 직전에 믿으나 결국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똑같다면 굳이 젊어서부터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 젊어서부터 믿는 것은 오히려 손해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십자가상의 강도야말로 최고의 행운아라는 생각이 은근히 들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을 때 대충 뭐라고 묻습니까? 십중팔구는 ‘형제(자매)님,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형제님, 지금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자, 왜 이렇게 물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나온 사후 천국행 구원관이 깊이 깔려 있습니다. 사후 세계를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느냐 ‘극락’이라고 하느냐 ‘좋은 곳’이라고 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다는 면에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기어코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옮겼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오는데 그 때가 곧 이 때라고 했습니다(요5:25). 산상수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죽은 후에 천국을 볼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지금 천국을 본다고 했습니다(마5:3).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한 번도 ‘사후 천국행’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은 지금 여기의 문제였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치유 받은 사건도 보십시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군중 틈에 끼어들어가 지나가던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곧바로 병이 떠나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마9:22).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이 죽음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의 천국행을 약속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여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선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신 것도 죽은 후에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살라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혼자로서는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함께 모여 서로 가르치고 배우라고 교회의 지체로 불렀고 교회 속으로 불렀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구원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종말의 그 날까지는 한없이 부족한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 땅의 아픔 가운데 뒤섞여 있고, 이 땅의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우리의 슬픈 상처 속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 속에, 이 시간 함께 드리는 작은 예배 속에, 서로가 정성껏 준비하는 식탁 교제 속에 어렴풋이 녹아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구원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구원의 진실이요 믿음의 현실입니다.

 

두 번째로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의 내막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믿어서 죄 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복음의 요지요 구원의 요체라는 생각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천국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은 옳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하늘의 어떤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영어와 한자로 표기하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하늘의 어떤 장소’는 영어로 ‘the Kingdom in heaven’이고, 한자로는 ‘천당’(天堂)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The Kingdom of God’이고, 한자로는 ‘천국’(天國)입니다.

여기서 ‘천당’과 ‘천국’을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당’과 ‘천국’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초점이 있는 반면, 천당은 지상의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 세계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초점이 있는 반면, 천당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무관한 영들이 사는 세계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천국과 천당은 이처럼 완전히 다릅니다. 천국은 성경적인 개념이고 천당은 비성경적인 개념, 즉 플라톤의 공간적 이원론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천국과 천당의 차이를 거의 무시했습니다. 천국이 곧 천당이고, 천당이 곧 천국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천국’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으레 ‘천당’(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the Kingdom in heaven)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단지 영들이 거하는 세계로 변질시키는 엄청난 왜곡인데도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왜곡인지를 모른 채로 별 문제의식 없이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몇몇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지요. 제가 대학 시절 C.C.C(한국대학생선교회)라는 선교단체에서 신앙훈련을 받을 때 많이 부른 찬양을 보겠습니다.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여기서 구원은 온전히 하늘나라 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구원 열차 타고 속히 떠나야 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고,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차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여기서도 이 세상은 죄 많은 곳이요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니 정들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고 저 하늘에 있는 천국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다 가짜이고 하늘에 있는 저 천국이 진짜 집이라고 말합니다.

 

찬송가에도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만 보겠습니다.

 

1절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2절 :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5절 :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여기서도 이 세상은 괴롬과 죄만 있는 곳인 반면, 천국은 저 높은 곳에 있으며 영원한 복락이 넘치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 레퍼토리도 대부분 이런 내용 일색입니다. 이 세상은 저주 받은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다, 저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이고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나그네길일 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뭐 이런 이야기를 끝없이 반복했습니다.

소설, 동화, 영화도 천국을 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John F. 케네디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가 쓴 [착한 사람이 가는 곳 하늘나라]란 동화책은 할머니의 죽음을 어린 딸에게 설명하는 이야기인데요, 이 책에서 작가는 할머니의 죽음을 천국에 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천국은 푹신한 구름 위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란다. 밤이 되면 이 우주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옆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단다. … 평생 착하게 살았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천국에 가게 되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천국으로 데려가신단다.”

이 동화뿐 아닙니다. 거의 모든 동화가 천국을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도 비슷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있고, 다니엘도 있고, 베드로도 있고,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있고, 한경직 목사도 있더라,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하고 모든 길이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더라, 뭐 이런 내용입니다.

성경은 어떨까요? 성경에도 이런 생각을 부추기는 이야기들이 즐비합니다. 십자가상의 강도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애원하자 예수님이 즉각 응답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예수님이 하나님을 말할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5:45)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라고 탄식했습니다. 바울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도 하늘과 땅을 대조적으로 말함으로써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 주변에는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하게 할 만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찬송을 비롯해서 설교와 동화, 소설, 영화, 심지어 성경까지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특별한 장소,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 성도들이 하얀 구름 위에 앉아 하프를 켜면서 끝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이 매우 비성경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세계관이 온통 그러하다 보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별 문제의식 없이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렇게 읽었고요.

우리나라만 이러는 게 아닙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습니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영국 교회의 상황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구원받은 혹은 복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49쪽). 톰 라이트가 지적한 대로 세계 교회는 전통적으로 천국을 천당이요 영들의 세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늘(영들의 세계)과 땅(물질의 세계)을 배타적인 두 세계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늘과 땅을 하나의 세계로 봅니다. 상호 공존하고 협력해야 하는 통합적 세계로 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세계관은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한 마디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엡1:10)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것, 더 이상 배척하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사역의 궁극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물질세계를 멸하거나, 영혼을 물질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하늘과 땅을 다시금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삶, 죽음의 권세에 짓밟혀 ‘죽임살이’를 하는 삶에서 구출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생명살이’를 하는 삶으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선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으로 돌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최초로 외쳤던 말씀이 뭐였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습니다(막1:15). 이 말씀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떠날 채비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했으니 삶의 방식을 전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뭐라고 간구했습니까?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에도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도 세계 열방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고,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것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사2:2,4; 미4:1-3). 구원의 날이 이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11:6-8).

 

이처럼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구원을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세계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성 깊은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ehart)도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창조주의 아름다운 섭리를 찬양할 때, 이것이 구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세계 교회와 한국교회는 그동안 구원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적 구원관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를 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상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육신은 죽고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의 내막을 살펴보겠습니다. ‘육신은 죽고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원관은 언뜻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인 것 같아 보입니다. 잠간만 생각해보세요.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100년도 살지 못하고 대부분 죽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어떻습니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육체와 달리 영원을 생각하고 꿈꿉니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가없는 미래까지 상상의 날개를 펴고 맘껏 넘나듭니다.

플라톤은 이런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했습니다. 몸과 영혼은 전혀 다른 실체라고. 몸은 연약하고 일시적이고 타락한 것인 반면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며 깨끗하다고. 감각적인 것은 저급하고 영적인 것은 고상하다고. 몸은 영혼을 담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 떨어지는 것이요 영혼이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고. 자연히 죽음은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고, 육체 안에 갇혀 있던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어떻습니까? 상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몸과 마음이 모순 속에 놓여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또 죽음이라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육 이원론’과 ‘영혼 불멸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확장된 교회의 변증가들이 보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반갑게 플라톤의 이원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혼이 구원을 받으며, 죽은 후에는 영혼이 하늘에 들어간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점차 교회의 중심 메시지로 자리를 잡아갔고, 나중에는 교회의 전통으로 확고하게 굳어져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의 모든 교회가 믿고 따르는 보편적인 구원관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만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고, 나와 관련된 삶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피조세계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성경 66권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창조

2) 예수님의 성육신

3)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이 세 가지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과 몸에 대한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물질적인 세상을 긍정하셨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또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몸을 긍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부활은 인간의 몸을 긍정하는 최고의 사건이요 최고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몸은 결코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예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증언한 것도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사도들의 증언이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믿는 자들도 부활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때에 영혼만 구원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몸도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했고(롬8:11), 우리는 모두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롬8:23). 이처럼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분리된 영혼과 육체가 다시 재결합한다는 것이 저들의 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믿음을 증언하고 가르쳤던 초대교회가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들어가자 말자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는 플라톤의 사상을 넙죽 받아들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활신앙과 플라톤의 구원관(육신은 죽고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은 결코 한 묶음이 될 수 없는데도 기이할 만큼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플라톤 사상은 거침없이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와 하위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실제로 영혼이 있고, 구원을 받는다면 바로 그 영혼이 받으며, 구원의 내용인즉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71쪽). 독일의 교의신학자 몰트만 또한 “교회의 신학이 영혼 불멸이라는 플라톤의 관념을 일찍이 받아들였으며, 플라톤의 관념이 오늘까지도 교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94쪽). 니체는 아예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기독교라고 조롱했습니다. 옳습니다.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화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처럼 대부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사후 천국행 구원관을 열심히 믿고 가르쳤습니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기초한 구원론을 성경적인 구원론인양 굳게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 신앙과 삶의 괴리가 발생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후의 천국을 위해 신앙으로 살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신앙과 삶의 괴리, 신앙과 삶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실로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 신앙생활의 본질과 성격이 변질됐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본래 사후 천국행 보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공기를 호흡하듯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 일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는 것인데 ‘사후 천국행’ 구원론에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향유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과 성격이 죽고 난 후의 천국행을 보장받겠다는 내세 보험으로 변질되는 중차대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3) 천국이 천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인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사후의 운명이 지옥행이냐 천당행이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고, 하나님나라는 하늘에서 임하는 것인데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4)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관계성이 단절됐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이 세상은 완벽하게 구원에서 제외되는 문제, 지금 여기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영혼 구원에만 신앙생활을 몰입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5)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이 무의미하게 됐습니다. 영혼만이 참된 실재이고 영혼만이 구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이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종교적 신화로 추락했습니다.

6) 죽음 속에 있는 저주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희화화시켰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의하면 존재의 근원인 영혼은 죽지 않고 껍데기인 육체만 죽는 것이니까 죽음 속에 있는 죄의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마저도 대속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7) 예수님의 부활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부활절도 매년 지키지만 부활의 리얼리티는 사실상 없는 입으로만의 부활신앙으로 퇴락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믿고 따르는 한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밖에 없고,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구원을 향유하는 일이 아니라 죽고 난 후의 영생을 얻기 위한 사후 보험으로 굴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말한 일곱 가지 오류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신앙과 삶의 괴리에 고민하기도 하지만 그런 고민은 잠깐이고, 이내 곧 삶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정신없이 자기 욕망에 깔때기를 꽂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면서, 때로는 거룩한 비전으로 자기 욕망을 포장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이 세상이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라고 되뇌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세상의 온갖 좋을 것들 - 성공과 부와 명예 - 을 다 거머쥐려 안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인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부활을 부정하는 실로 엄청난 도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송두리째 짓밟은 패악 중의 패악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기이한 상황에 빠져들게 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말한 플라톤의 이원론이고, 또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세계는 하늘과 땅 ‧ 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 ‧ 영혼과 육체라는 두 세계로 분리되어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은 실재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 이해가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보편화시킨 첫 번째 배경이고, 이 세상은 죄와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사탄이 왕 노릇하는 저주받은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며 사람 또한 죄로 인해 죽음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적 세계 이해가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보편화시킨 두 번째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 것이라는 사후 천국행 구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이 합해진 기형적 결과물일 뿐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믿음을 주사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신 성령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원론입니다. 성경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며, 기독교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왜곡하는 끔찍한 도발입니다. 성경에는 없는 이물질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별 문제의식 없이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성경적인 구원론인양 믿고 가르쳐왔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을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라고 믿고 가르쳐왔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이상야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 기이하고 이상야릇한 일을 끝내야 합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성경적 진실이 아닌 것을 성경적 진실인양 호도하고 몽매하게 따랐던 사후 천국행 구원론, 헬라 철학이라는 이물질을 털어내야 합니다. 아예 헌 고무신짝 버리듯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사후 천국행 구원론이라는 이물질을 털어내고 버려야만 앞에서 지적한 일곱 가지 신앙생활의 오류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요. 신앙과 삶의 괴리를 넘어설 수 있고, 변질된 신앙생활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영혼 구원에서 전인 구원과 온 삶의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포함해서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삶 전체, 그리고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부조화로 일그러지고 깨어진 하늘과 땅을 다시금 조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