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이원적 요소로 구성된 오묘한 세계라는 것 - 비가시적 세계인 하늘과 가시적 세계인 땅이 차원도 다르고 속성도 다르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겹쳐 있으며,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라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오묘한 세계야말로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라는 근원 진실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하나님의 창조가 왜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6일 동안의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의 종언은 이렇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2).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은 “다 이루어지니라”, “마치시니”에서 확인되듯 일차적으로 창조 작업의 완성과 종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완성과 종료를 문자대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완제품으로서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뭘 만들 때 책상이든 자동차든 아파트든 좌우지간 완제품을 만들어 상품으로 내놓기 때문에 하나님도 세상을 만들 때 완제품으로 만드셨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제품으로서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무한히 변화하는 잠재력의 세계, 최종적인 완성(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개방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출생과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흠잡을 데라고는 일절 없는 완전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출산은 일단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오랜 세월 양육하고 훈육해야 합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쉼 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진실로 완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나 계획(master plan)에 부합하는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창조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창조란 더 이상의 발전이나 변화가 필요 없는 닫힌 세계로서의 완전이 아니었습니다. 무한히 변화하는 잠재력의 세계로서의 완전, 최종적인 완성(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개방된 세계로서의 완전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땅을 경작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래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창1:27-2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도 단순한 쉼으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완결됐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구상하고 계획(master plan)한 디자인이 있는데 그 디자인대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면 창조와 구원의 연결고리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구상하고 계획하신 디자인이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가?

 

우선 1)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구상하고 계획하신 디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바요, 대다수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직신학자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가 “창조는 단지 세상의 제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와 행위의 표현”이며, “창조는 그 근원에 의하면 하나님 안에 근거하며 그 안에서 인식되는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현실이며, 그 목적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이다”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조직신학. 157쪽).

구약학자 메리데스 G. 클라인(Meredith G. Kline)이 ‘우주는 생물들의 서식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고상한 기능으로는 창조주 자신의 거처’이며, ‘창조는 왕을 위해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우주는 위대한 왕의 궁전이요 언약의 종주되신 주권자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도 전적으로 옳습니다(하나님나라의 서막. 53쪽).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단지 물질세계를 존재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이 세계를 통해 세계 가운데 풍성하게 드러나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하나님나라 건설이었다는 것은 6일 간의 창조가 완결이라는 의미의 마침이 아니라 완전이라는 의미의 마침이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함의합니다.

 

이 함의는 2)를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창세기 2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안식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노동의 피로에 지쳐 쉬는 것을 뜻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 이후의 쉼이 아니라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건설됐음을 경축하는 일련의 축제입니다.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나라의 축복에 참여하는 기쁨의 축제, 여호와가 온 세상의 왕임을 선포하고 경축하는 왕위 즉위식입니다. 오늘날의 대통령 취임식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바로 정권 인수 작업에 착수하고 정해진 날 세계 열방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취임식을 한 후 청와대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전체를 다스리는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경축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안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 온 세계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을 선포하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하늘 보좌에 좌정하셨다는 왕위 등극을 경축하는 일련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홀로 안식하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의 노동에 지쳐 홀로 쉬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니 다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며 온 세계를 당신의 집에, 당신의 안식에 초대하사 큰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이 잔치가 바로 안식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약학자 메리데스 클라인이 하나님의 안식을 ‘영광의 왕께서 수행하시는 영원한 왕적 통치’를 의미한다고 풀이한 것이나(하나님나라의 도래. 34쪽), 존 왈튼(John H. Walton)이 “구약성경에서 안식이란 안정이 확보되었을 때 수행될 수 있는 정상적인 활동에의 참여를 가리키는 아이디어”(창세기1장의 잃어버린 세계. 108쪽)라고 풀이한 것은 안식을 속 깊이 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왈튼이 말한 대로 구약성경에서 안식은 단지 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2장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전하는데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너희가 아직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이르지 못했으나 여호와께서 너희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으로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너희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신12:9-12). 여기서 안식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서 안식은 단지 쉼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대적들의 방해나 공격 없이 평안히 사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호수아 21장 44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이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다’고 표현했고, 23장 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도 안식은 쉼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안정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2장이 말하는 안식 또한 단지 쉼이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구상하고 계획하신(master plan)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6일 동안 창조된 모든 세계가 매우 안정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제각각 따로 놀지 않고 서로가 겹쳐지고 섞이면서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삐거덕거리면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게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본래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안식의 의미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보다 훨씬 웅숭깊고 넓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최종 목적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잘 살펴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가 오직 안식을 향한 창조요 안식을 위한 창조였다고 말합니다. 안식이 창조의 피날레라고 말합니다.

안식일 계명을 보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처음 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이고,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이고, 셋째 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입니다. 이어서 사회적 계명이 나오는데 첫 번째로 나오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이 안식일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보다도 앞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안식일 계명을 사회적 계명 중 으뜸 계명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안식일도 없이 일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이 상할까봐 그랬을까요? 안식일도 없이 일에 파묻혀 살면 하나님을 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품을 떠날까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 하면 대뜸 어떤 일도 하면 안 되는 날, 어떤 것도 즐기면 안 되는 날, 금욕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일단은 옳습니다. 안식일 계명의 주요 내용은 분명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데 안식일의 의미를 두면 안 됩니다. ‘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단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느냐에 관심을 갖고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일을 명하신 진정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노동을 금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일을 놓아야 - 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에 푹 잠길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계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안식일에 너와 네 가족만 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와 네 가족은 물론이고, 남종과 여종을 포함해서 집에 머무는 식객까지, 심지어 가축까지 다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종들과 가축을 하루 종일 놀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인에게 매우 불리한 법입니다. 엄청나게 손해나는 법입니다. 또 생산성을 높여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매우 불편한 법입니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이 노동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일반화되어서 안식일 계명을 생산성 향상의 차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그런 차원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전제하면 이 법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법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법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왜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셨을까요? 안식일 계명이 단지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정도로만 말씀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이라,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경고하기까지 하셨습니다(출31:14).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종들이나 식객이나 짐승까지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들도 일을 놓아야만 하나님의 안식에 푹 잠길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향유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습니다.

2) 저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해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주인들만 안식하는 나라가 아니라 종들, 식객들, 짐승들까지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나라여야 하기 때문에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볼 때 안식일 계명의 참 목적이 노동을 금하는데 있지 않고 모든 생명이(심지어 땅까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케 하는데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안식일 계명은 안식년으로 확대됩니다. 출애굽기 23장에는 안식년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23:10-11).

레위기 25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여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고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25: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시점부터 계산하여 7년째 되는 해에는 온 땅을 쉬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앞서 살펴본 안식일 계명에는 안식의 대상으로 땅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안식년 계명에는 안식의 대상이 땅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적어도 7년에 한 번씩은 땅도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희년으로 가면 안식의 내용이 더더욱 확대되고 깊어집니다.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7×7=49년)의 다음 해로서 50년째 되는 해인데 기본적인 내용은 안식년과 동일합니다. 희년에도 안식년처럼 땅에 농사를 지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 난 것조차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희년에는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합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라.”(레25:10).

희년에는 정말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집니다. 50 여년이 지나다 보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땅을 잃고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각각 자기 고유의 권리와 기업과 가족을 되찾게 됩니다. 종살이에서도 해방되고, 모든 부채 또한 면제받습니다(신15:1-3). 그야말로 50년 동안에 발생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고 얽매임에서 해방되는 거대한 사회변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해를 희년, 즉 ‘은혜의 해’라고 합니다(사61:2).

이사야 선지자는 희년에 일어나는 일들을 메시아 시대의 구원과 연결시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희년)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을 인용하여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러 왔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무슨 말입니까? 나는 희년의 은혜를 성취하러 온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희년에 이루어져야 하는 모든 일들이 나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희년의 성취가 곧 구원이고, 희년의 성취가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자 요더(John Howard Yoder)가 “희년(禧年)은 하나님나라의 전조”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예수의 정치학).

 

히브리서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4:1),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4:9),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4:11)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을 잘 읽어보십시오. 창조시의 안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안식, 즉 약속된 안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4장 10절에서는 종말론적 안식과 창조시의 안식이 다 나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셨다’는 것은 창조시의 안식을 말하고, ‘성도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은 종말론적 안식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창조시의 안식과 종말론적 안식을 통전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창조시의 안식을 처음 창조의 완성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완성으로까지 밀고 나갑니다. 즉, 처음 창조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종말론적 완성은 분명히 성취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종의 언약적 성격의 안식으로까지 밀고 나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처음 창조가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완전한 출발이었지 하나님나라 건설의 완결이나 종결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창조의 피날레요 오메가 포인트는 안식이고, 안식은 하나님나라의 삶의 성격이자 구원의 내용입니다.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것은 모짝 구원이 아닌 겁니다. 돈이 아무리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지혜와 깨달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인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예술이 아무리 고상하다 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다 가짜 구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는 참된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하나님의 안식만이 구원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피날레요 오메가 포인트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만이 구원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안식은 깨졌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 온 생명은 복된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안식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라. 너희가 향유해야 할 안식이 나에게 있으니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은혜로운 안식에로 초대함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합니다. 특히 주일은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표징입니다. 주일은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구원을 경축하고 향유하는 표징의 날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안식을 선취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단지 쉬는 날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하는 날이 아닙니다. 단지 세속의 노동을 멈추고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날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금욕의 날, 옴짝달싹도 못하게 억누르는 억압의 날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일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안식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선취하는 날입니다. 모든 노동과 염려를 내려놓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를 내려놓고, 사람들 사이에 높이 쳐진 장벽을 허물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시간 ‧ 가족 ‧ 물 ‧ 태양 ‧ 바람 ‧ 이웃 ‧ 개 ‧ 나무 ‧ 꽃 ‧ 심지어 아픔까지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날입니다. 종말론적 안식을 기억하고 희망하며 향유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최고의 향연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부활생명을 경축하고 맛보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나라 실현에 대한 굳은 약속을 신뢰하고 희망하며 기뻐하는 날입니다.

 

어디 주일뿐이겠습니까?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하고 향유할 수 있는 이 땅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를 따라 하늘과 땅이 통일된 삶을 사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가 하나로 통합된 삶을 향유하는 것이 곧 안식입니다.

예,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며 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보며 삽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호흡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봉오리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물론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황량하고 사악하고 폭력적인지도 봅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가련한 존재인지도 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과 황량함과 사악함만 보지는 않습니다. 못나고 가련한 내 모습만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도 함께 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작품이고 선물이라는 사실도 보고, 하루의 삶과 생명이 얼마나 위대하고 값진 은총인지도 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는 반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본다는데 근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차이가 온갖 차이를 부릅니다. 위대한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며 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습성을 따라갑니다. 소유와 지위로 삶을 평가하고, 생명의 근원적인 한계와 삶의 절망 앞에서 동요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구원에 참여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보며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습관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죽지 못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비록 전쟁터와 같고 비루하며 버텨내기 힘든 일이 많을지라도 순간순간을 감사하며 삽니다. 경쾌하게 삽니다. 깊이 삽니다. 당당하게 삽니다. 생생하게 삽니다. 감동하며 삽니다. 결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앞에서 기죽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행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세상을 가로질러 갑니다.

혹 그런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시나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시나요? 예,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게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 구원을 받았든 안 받았든 세끼 밥 먹고, 직장에 출근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전혀 다릅니다.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조촐한 밥상을 대하는 것까지 모든 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하루 일당으로 10만원을 버느냐 50만원을 버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습관적으로 사느냐 감사하면서 생생하게 사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학생이 학기말 시험에 50점 받느냐 100점 받느냐 하는 것도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시험 점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느냐 참된 앎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대한 문제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고 사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보며 사느냐 하는 것은 실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오늘의 문제, 우리의 존재와 삶 구석구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의 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취미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모든 소비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매 순간 숨 쉬는 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오늘의 문제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기왕 안식을 말했으니 한 가지 더 짚고 가겠습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에게는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 만들어진 아담에게는 첫째 날이었습니다. 아담이 창조된 후 처음 맞이한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삶이 노동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담의 삶이 안식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안식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해줍니다. 옳습니다. 삶이란 안식으로 시작해서 안식으로 귀환하는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6일 동안의 노동도 삶의 주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으나 안식이야말로 삶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적 진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식일의 축복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있지 않습니다. 안식일의 축복은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에 풍덩 잠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음미하고 향유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음미하고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구원의 은총을 향유하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로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음미하며 향유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꼭 그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일에는 하나님의 안식에로 귀환하시기를 바랍니다. 6일 동안 사람들 틈에서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안식이 깨집니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다가 안식이 깨지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안식이 깨지기도 하고, 크고 작은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식이 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일에는 무조건 하나님의 안식에로 귀환하시기 바랍니다. 시간 ‧ 가족 ‧ 물 ‧ 태양 ‧ 바람 ‧ 이웃 ‧ 개 ‧ 나무 ‧ 꽃 ‧ 1천억 개나 된다는 은하계까지를 몽땅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존재와 삶 자체를 환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고 창조 세계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대자연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읽어내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 자신을 최상의 선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기이한 선물로 긍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돈 ‧ 명예 ‧ 힘 ‧ 이데올로기 ‧ 성공 ‧ 성취 ‧ 인정 욕구 ‧ 욕망 ‧ 전통 ‧ 관습 ‧ 비교 ‧ 염려 ‧ 두려움 ‧ 경쟁 ‧ 아픔 ‧ 상처 등등 여러분을 옭아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안식에 대한 이야기가 꽤 길었습니다. 창조가 안식과 연결되어 있고 안식이 구원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하나님의 창조가 순전히 안식을 향한 창조요 안식을 위한 창조였던 만큼 안식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 이야기의 절정은 안식입니다. 안식이 창조의 목적이요 내용이요 피날레입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왕위 등극과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이자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셨고, 이 안식일은 안식년으로, 안식년은 희년으로, 희년은 예수님의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전조로 연결되고 확대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성경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창조세계는 하나님나라였다는 것, 하나님나라의 삶의 성격은 안식이었다는 것, 이 안식을 고리로 해서 창조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창조와 구원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며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고 확인했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종말론적 구원의 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창조의 세계와 다른 세계입니다. 연속성도 있지만 비연속성이 훨씬 많은 세계입니다(고전6:14, 15:58). 언젠가 봉인된 모든 책이 열릴 때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분리되고 연합할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계속 살아갈 질서정연한 자연이 어떻게 변할지, 우리가 지금 보고 있고 알고 있는 별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산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지, 무엇을 의미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변화된 세계일 것이 분명합니다(칼 바르트의 신학묵상. 410쪽). 성경이 구원세계를 일컬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계21:5) 하신 것도 그래서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고 말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할 만큼의 질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치 않는 진실은 창조 세계를 떠난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창조가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라는 것, 구원은 오직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창조를 통해 구원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 창조를 통해 구원을 바라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은 환상이나 망상으로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실 수 있는 최상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총동원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조화롭고, 가장 다채롭고, 가장 황홀하고,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다차원적이고, 가장 창조적인 세계입니다.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 창조의 영광이 퇴락했고, 균형도 깨졌고, 피조세계 전체가 불화와 부조화의 늪에 빠져 신음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계는 신묘막측하고 다채롭고 환상적인 세계입니다. 어떤 천재도 감히 상상하거니 모방할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하고 놀라운 세계입니다. 수 천 년이 흐르고 수 만 년이 흘러도 항상 새롭고 생생한 참으로 역동적인 생명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감탄과 감동이 바닥나지 않는 참으로 멋진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아름답고 다채롭고 영광스러운 세계를 멸하지도 않으시고,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세계를 온전케 하십니다.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 퇴락한 창조의 영광과 조화로움을 회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퇴락한 창조 세계의 영광을 회복하고, 이지러지고 으깨어진 창조 세계의 질서를 완성하는 작업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 하늘로 솟구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구원을 위해 땅에 처박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땅에서 살되 하늘과 소통하면서 하늘의 방식을 따라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지 못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도 자잘한 일상 속에서 하늘과 비밀스럽게 소통하며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상의 여기저기에 흔적 없이 임하는 하늘의 세계를 보고 감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대할 때에 주님을 대하듯 하고, 일을 할 때에 주께 하듯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망이 왕노릇하는 시스템을 추종하던 삶에서 생명이 왕노릇하는 시스템을 추종하는 삶으로 전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세계의 방식을 따라 일상을 사는 것이면 충분치 않겠습니까? 창조는 구원의 원형이자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