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구원론이 뒤틀리게 된 세 번째 배경은 종교화의 유혹과 무지입니다. 제가 기독교의 종교화를 유혹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독교를 종교의 범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독교에도 종교적 형식(기도, 예배, 교리, 교회당)이 있고, 구제와 선교 등의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느냐며 기독교를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기로 하고 우선은 종교의 세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교’(宗敎)라는 말은 본래 불교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라고 칭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어 Religion의 어원(re-ligio)을 따지면 ‘다시 묶는다, 다시 띠를 두른다’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전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삶의 절대적 한계 앞에서 느끼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정신활동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와 친근한 종교의 세계만 간단히 훑어보도록 하지요.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생의 한계와 사람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업)로 인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반복되는 것(윤회)을 발견하고, 업과 윤회에 속박된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결과 업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 변화하는 사물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사물에 대한 집착까지도 완전히 사라져 청정해진 마음의 상태를 얻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깨달음의 상태를 일컬어 열반(니르바나), 또는 공(空, 텅빔)이라 했습니다.

도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노자는 아주 독특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라를 평안케 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하고, 계획을 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려고 하는데 비해 노자는 그런 일들이 오히려 인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타락시킨다고 보았습니다(도덕경 57장). 그런 일들을 자연의 질서(道)에 어긋나는 작위(作僞)라고 보았고, 그런 작위들이 도(道)의 자발적 움직임을 거스르고 차단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위(無爲)를 주창했습니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도(道-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고, 대상 사물이 갖지 못한 부적합한 기능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물의 고유한 내재 법칙을 따르는 것,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 무위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렇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무위입니다. 노자는 이 무위야말로 작위로 인해 무너진 인간 사회를 본연의 상태로 돌이키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유교의 뿌리인 공자는 죽음이나 신(神)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나라들이 끊임없이 싸우느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사가 돼버린 세상을 보면서, 이런 사회는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안으로 인(仁)을 제시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은 사람(人) 둘(二)을 형상화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공자는 이런 인(仁)을 이룬 사람을 군자(君子)라 했고, 인이 가득한 사회를 대동(大同)이라 했습니다.

공자가 꿈꾼 대동은 이렇습니다. “대도가 실행되는 시대에는 천하를 사유물로 보지 않고 공유물로 보았다. 군주는 천하를 자기 자손에게 전하지 않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전하였으며,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하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뿐 아니라 남의 부모도 사랑하였으며, 자기 자식 뿐 아니라 남의 자식도 사랑하였다. 노인은 편안히 살다 죽을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껏 일할 수 있었으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고, 홀아비, 고아, 과부, 자식 없는 노인, 불구자들도 보살핌을 받았다..... 도둑도 난을 일으키는 자가 없었으며 대문을 닫을 필요도 없었다.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예기, 예운편).

 

이처럼 싯다르타나 노자나 공자의 가르침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말뜻 그대로 매우 훌륭하고 심오하고 덕스럽고 지혜롭고 이상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싯다르타나 노자나 공자를 사탄의 앞잡이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하고 덕스럽고 지혜롭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참된 구원의 길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에는 세계 내적이라는 한계,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요 사회비평가인 자크 엘룰이 “종교심은 궁극적 진리를 준거로 삼는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궁극 이전의 것을 준거로 삼고 있다.”(의심을 거친 믿음. 167쪽)고 지적한 대로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일견 현실을 초월하는 것도 같고,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같지만 실제로는 세계 내적인 차원, 궁극 이전의 차원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을 말합니다. 여기서 부활은 욕심을 죽이고, 마음을 정화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평안히 살고, 약자들도 보살핌을 받으며, 도둑이 없어서 대문을 닫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정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부활은 앞선 종교들이 제시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 무궁히 생명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이 태양의 온기를 받아 살듯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온기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종교의 다름은 이것 외에도 많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늘의 신을 향해 올라가는 상승운동인 반면, 기독교는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하강운동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관심사와 질문에 답변을 하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관심사와 물음을 뒤집어엎습니다. 종교는 교리와 윤리와 제도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반면, 기독교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구원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구원 욕망을 산산이 깨부숩니다. 종교는 내가 믿음을 휘두르는 반면, 기독교는 겸허히 믿음에 머무릅니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종교는 현세 기복적이거나 현세 도피적인 반면, 기독교는 현세를 초월함으로써 현세를 긍정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지혜가 발견하고 터득한 것에 의지하는 반면,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행위를 경험하는 은혜의 사건에 의지합니다. 종교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제도화하고 규정하는 반면, 기독교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은 성령의 재창조 사건입니다(요3:8). 이처럼 종교와 기독교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신앙의 뿌리 · 신앙의 행태 · 신앙의 양식도 다 다르고, 구원의 방식 · 구원의 차원 · 구원의 내용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기독교와 종교의 다름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라고 강조하면서 다른 종교를 멸시하고 증오하기만 했지 그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깊이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교회생활과 선교하는 일에만 열심이었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깨우치고 그 신앙의 깊이를 천착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이긴 했으나 그마저도 신앙을 강화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게 하는 데만 집중했지 신앙을 심화하고 세상의 모든 우상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세우고, 받은 구원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일에는 소홀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의 구원 욕망과 종교성을 산산이 깨부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현세를 초월함으로써 현세를 긍정하고, 잠잠히 믿음에 머물며 하나님의 구원을 사는 일에 집중하게 하는 법인데, 한국교회는 엉뚱하게도 인간의 구원 욕망과 종교심을 활활 타오르게 했고, 교리와 율법적인 규범으로 성도들을 억압했고, 만사형통의 복을 남발하며 교회성장에 몰입했고, 믿음을 휘두르기에 바빴고, 예배당 짓고 성도 관리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고작해야 종교의 차원에 속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런 것들에 전념했습니다. 교리와 말로는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멸시하고 증오했지만 실제로는 종교화의 길을 충실히 달려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 하나를 말해야겠습니다. 종교는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아무리 진화하고 또 진화한다 해도 종교는 결코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종교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든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세대부터 그랬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백성들이 아론에게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32:1)고 소리쳐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예, 이것이 바로 종교의 외침이고 종교의 행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는 신을 만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일을 요구하고 행했습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목도했던 저들이 잠시 잠간 사이에 종교의 자리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또한 종교적 의례는 무성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는 없었다고 탄식할 만큼 종교만 무성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렘5:1).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전인적인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강변하며 몸으로 막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내쳤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베드로는 매우 의리 있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제자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일갈하시면서 뒤로 물러나라고 내쳤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데,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일을 도모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은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종교적 시스템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었고요.

교회 역사도 보십시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종교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힘입어 로마를 정복했으나 복음에 정복당한 로마는 교회를 종교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자 말자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곧바로 고상하고 거룩한 종교의 옷을 입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세련된 장식품으로 바꿈으로써 십자가까지도 종교화의 아이콘으로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부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종교화의 옷을 입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톨릭이 종교화의 옷을 입은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이야말로 기독교가 종교화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최고의 종교시스템,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고 성스럽고 심오할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하기까지 한 최고의 종교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히 종교화된 기독교의 완성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에 비하면 한국의 개신교는 지나치게 유치하고 조잡하고 천박하고 세속적인 종교시스템입니다. 가톨릭은 종교적인 깊이와 성스러움이라도 갖춘데 비해 개신교는 그것조차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성스러움이나 문화적 심미안은 거부한 채 아주 거칠고 천박하게, 그것도 매우 노골적으로 자아의 욕망과 종교적 욕망을 표출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국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종교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면에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가톨릭은 우아하고 세련된 종교화의 길을 걸었고, 개신교는 거칠고 천박한 종교화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종교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계시로부터 볼 때 종교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시고 또 행하시는 것을 미리 취하려는 인간의 시도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종교는 하나님의 작품의 자리에 자신의 작품을 밀어 넣으려는 인간의 시도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계시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제공하고 설명하는 하나님의 현실성의 자리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놓아두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종교는 하나의 관심거리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의 하나의 관심거리입니다.”(칼바르트의 신학 묵상. 377쪽).

옳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성경의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적 체계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끊임없이 종교화를 시도해왔고, 거의 언제나 종교화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종교의 미덕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의 역할과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는 분명히 유의미한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 종교가 감당하는 사회적 역할은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종교화하는 것은 가장 심대한 기독교의 타락입니다.

자크 엘룰은 기독교가 종교화되면 “계시의 순간을 제도의 영구성으로, 약속을 율법으로, 희망을 성직 수여로, 사랑을 일련의 행위와 자선의 실천으로, 성령을 법률가로, 말씀의 폭발을 의식들과 축제로, 지금 여기의 의지를 고정된 계명으로, 대화를 교리문답으로, 상징적 헌금을 구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을 선한 행실들로, 진리를 도그마로, 자유로운 은혜를 예정의 체계로, 자유로운 선택을 특권과 우월성으로, 주어진 구원을 타인에 대한 정죄로 변질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의심을 거친 믿음. 203쪽).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기독교의 종교화는 하나님과 성경의 모든 내용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가장 심대한 죄악이요 가장 근원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부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언제든 종교화의 옷을 입었고, 종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왜일까요? 왜 기독교는 항상 종교화의 옷을 입고, 종교화의 덫에 걸려 넘어진 걸까요? 자크 엘룰은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로는 모든 인간이 안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모든 인간이 계시가 던져주는 자유를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죠(의심을 거친 믿음. 204쪽). 옳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가 됐든 보호막을 필요로 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가 던져주는 자유-이 자유는 모든 뒤틀린 철학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기 위해 세워진 장벽들을 허물고, 모든 흐트러진 생각과 감정과 충동을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삶의 구조에 맞게 변화시키는 자유(고후10:4-5)-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쉽게 종교화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행위는 이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증법적 긴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항상 깨어 경계선상을 걸어야 하는데 비해 종교의 길은 몇 가지 교리나 종교적 규칙(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등)을 지키면 되니까, 그것이 심리적 안정을 얻는데도 유익하고, 교인을 통제하고 종교적 질서를 유지하는데도 편리하니까 쉽게 종교화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종교화는 매우 우아하고 고상하고 성스럽고 평안하고 멋질 뿐 아니라 실로 매혹적입니다. 거기다가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공생하는 길이고,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원하는바 위로와 평안을 얻는 실용의 길입니다. 종교화라는 게 이처럼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종교화의 유혹에 빠져 들었고, 지금도 빠져들고 있고, 앞으로도 미끄러지듯 빠져들 것입니다.

 

그런데 자크 엘룰이 지적하지 않은 또 하나의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무지입니다. 옛말에 ‘무지가 병을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무지는 몸뿐 아니라 마음을 병들게 하고, 가정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이처럼 심하게 골병든 것도 8할은 목회자의 무지 때문이고, 2할은 성도들의 무지 때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한 번 보지요. 한국교회는 그동안 신앙의 열심만 있으면 기본적인 학습 능력을 갖추지 못했어도 신학 공부를 시키고 무작위로 목사를 배출했습니다. 신학교도 난립하여 부실했을 뿐 아니라 정규 신학교라 해도 성경과 신학의 전반을 충실히 가르치고 훈련시키기보다는 사명감을 강화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분위기도 공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신학교를 은혜(?)로 졸업하고 현장에 나가면 다들 교회 성장을 위해 두 발로 뛰어야 했으니까요. 성도들도 공부하는 목사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발로 뛰는 목사를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충성스런 일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목회를 잘 하려면 책을 많이 읽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용이 부실한 교회, 무지가 범람하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한국교회만큼 성경공부에 열심인 교회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좀 한다는 성도들 중에 유수한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없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정말 성경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고학력인데 비해 머리에 든 것이 없는 것처럼, 한국교회 성도들도 성경공부 프로그램은 열심히 이수했는데 영적 지식은 턱없이 빈약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기는 했는데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고, 일차적인 성경 지식은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구원과 영생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한국교회가 무지의 늪에 빠진 것 같지 않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무지의 늪에 빠져 있는 게 확실합니다. 사회의 큰 이슈가 터질 때마다 목회자들이 하는 발언을 들어보면 압니다. 하는 말마다 무지가 하늘을 찌릅니다. 성경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인간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목사들이 정말 수두룩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무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구원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이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믿음과 지식을 배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구원의 확신과 구령(救靈)의 열정을 무지의 늪에 빠뜨린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을 부정적으로 보아서가 아닙니다. 아시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은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긍정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좀 달라졌지만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뜨거웠습니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령의 열정 또한 차고 넘쳤습니다. 그 덕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지나치게 강고하다보니 다들 열정적으로 믿음에만 매달렸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세심하게 묻고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구령의 열정도 워낙 뜨겁다보니 길거리에 나가 복음 전하는 데만 열심이었지 내 안에 임한 구원 속으로 잠잠히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조용히 구원의 삶을 음미하며 천착할 여유도 갖지 못했고,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저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것도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호세아 선지자의 탄식이 말해줍니다(호4:6). 신약 시대의 바울 또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질타했습니다(고전2:8). 이스라엘 백성이 오류에 빠지게 된 배경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내세운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롬10:2-3).

매우 역설적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낳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가 됐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구령(救靈)의 열정이 오히려 무지를 낳는 역설적 원인이 됐습니다.

 

한국교회가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된 두 번째 원인은 믿음과 이성(지식)을 배타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성(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성(지식)은 믿음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고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토론이나 질문을 거의 금기시했습니다.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대뜸 믿음이 없는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기 일쑤였습니다. ‘형제님, 의심의 영에 사로잡히면 위험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열심히 기도해서 의심의 영을 내쫓으세요.’라고 권면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말라고 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커져서 믿음의 걸림돌이 된다며.

그러나 이 모든 건 모짝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성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불러내지 않았습니다. 무지의 세계로 부르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계시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진리와 빛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참된 지혜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이 지혜가 비록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지혜이고, 이성의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긴 하나 어쨌든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진리와 지혜의 세계로 불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십시오. 그는 진지하게 진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마니교에도 깊이 들어가 봤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리에 눈을 떴다고 고백했습니다(참회록). 저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어둠에 있었습니다. 정말 알아야 할 어떤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눈이 밝아졌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눈이 밝아졌다고 했는데, 저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빛 · 하나님의 지혜에 눈이 열렸고,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빛 · 하나님의 지혜에 눈이 열리자 세계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잠자던 이성이 깨어나고, 지적인 호기심과 사고력이 왕성해지고,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생기고, 물음이 많아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눈을 감았을 때는 물어야 되고 눈을 뜨면 물음이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까 오히려 물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세상이 재미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등지고 십자가만 보게 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히려 세상이 흥미진진해졌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귀하고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황홀하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을 등지기는커녕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뛰어들게 됐습니다. 이성을 멸시하거나 배척한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이성과 지식을 멀리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손을 잡아 책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믿음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온 세상이 아름답고 푸근하게 다가오는 게 당연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성을 주셨으니까 이성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이성이 깨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골2:3). 또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골3:10).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벧후3:18).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령한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넘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의 감옥에 가두어놓지 않습니다. 무지의 감옥에서 해방시킵니다. 무지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구원의 요소입니다.

물론 지식이 믿음은 아닙니다. 지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는 지식으로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 속에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도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 속에도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용이 충실한 믿음, 뿌리가 깊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지식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아적 신앙, 자기중심적 신앙, 자기도취적 신앙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신앙 인격이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믿음은 자기 확신에 그치기 쉽고, 은혜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은혜는 거짓 평안에 그치기 쉽고, 구원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구원은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것에 그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 은혜, 구원에 꼭 있어야 하는 지식을 폐기처분해버렸지 않습니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골2: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골3: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벧후3:18) 말씀했는데 한국교회는 이런 말씀은 다 폐기처분해버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3:16),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마7:7)만 주문처럼 반복했지 않습니까? 정말입니다. 믿음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믿음이고, 은혜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은혜이고, 구원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구원인데 한국교회는 목이 터지라고 믿음과 은혜와 구원만 강조했지 그 속에 있어야 하는 알짜배기 지식은 다 폐기처분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믿음은 자기 확신이 돼버렸고, 은혜는 거짓 평안이 돼버렸고, 구원은 자기 욕망의 투사가 돼버렸습니다. 속은 텅 비고 쓸데없는 것들만 덕지덕지 붙은 이상야릇한 믿음, 이상야릇한 은혜, 이상야릇한 구원이 돼버렸습니다.

결국 무지가 원인입니다. 목회자의 무지와 성도들의 무지가 성도들을 골병들게 했고, 한국교회를 골병들게 했습니다. 종교화의 유혹 앞에 무릎 꿇게 했고,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추종하게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몽의 시대를 거쳐 이성이 활짝 꽃핀 과학 기술 시대에 웬 무지를 들먹이느냐고.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무지에 갇혀 있습니다. 무지로부터 많이 빠져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캄캄한 무지에 갇혀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무지는 매우 심각합니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가 “내 경험으로 보자면 많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희망이 정말로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9쪽)고 말한 걸 보면 영국교회의 형편도 한국교회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는 이성을 배척하지도 않고 지식을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잠자는 이성을 깨워 무지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이 시대의 탁월한 문화비평가인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는 신화의 계몽’이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르는 정언입니다(정일권.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이성이 회복된 자입니다. 무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입은 자입니다. 때문에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교만하지도 않지만 무지의 늪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밝은 이성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살면서도 회복된 이성으로 살고, 회복된 이성으로 살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날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걸어갑니다.

주님 안에서 회복된 이성은 믿음을 부정하지 않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이성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성이 극단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한 채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왕이 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반대로 이성이 믿음의 하인이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성이 믿음을 짓밟는 왕이 되는 것도 위험하고, 이성이 믿음의 하인이 되는 것도 위험합니다. 믿음은 이성과 동행해야 하고, 믿음은 이성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이성을 외면하고 거부함으로써 무지에 빠졌고, 무지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는 종교화의 길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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