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횃불이 된 사람 루터는 1515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의할 때 바울이 로마서를 쓴 주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의 주요 목적이 육적인 모든 지혜와 의로움을 파멸시키고 근절시키는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의로움이 바른 마음에서 실행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훌륭하고 본받을 점이 많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 부정되고 파멸되고 근절되어야 마땅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있다고 보았습니다(로마서 강의. 88쪽).

 

인간의 모든 걸 부정하는 바울

 

물론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쓴 주요 목적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당연히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어떻게 다스려왔나,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관계가 어떠했나 하는 독특한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로마서를 썼습니다(폴 악트마이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의로움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하여, 바울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의로움을 완전히 깨부숩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추앙받는 모든 가치와 철학과 정의와 미덕을 부정합니다. 눈곱만큼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인간의 모든 행위와 지혜와 업적을 깡그리 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 됨을 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홍수로 쓸어버렸듯이(창6:5-7) 바울도 세상의 모든 것(인간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홍수로 싹 쓸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눈을 씻고 봐도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아무리 의롭고 선량한 사람이라도 다 죄의 종노릇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인간의 자존심을 산산이 깨부수는 이야기를 할까요? 엉덩이를 두드려줘도 부족할 판에,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해 쌓아올린 문화, 종교, 도덕, 정치, 교육, 사상, 과학기술 등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업적을 깡그리 부정하며 깨부수는 것일까요? 도덕적으로 새로운 눈을 떠서일까요? 젊어서는 보지 못했던 세상의 헛됨,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서일까요? 종교적인 회심을 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다메섹)로 가던 길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행22:6-14).

 

바울의 전환

 

다 알다시피 바울인 사울은 유대인입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과 성을 쏟은 바리새인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은 크게 두 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

힐렐 학파는 로마의 통치 하에 있는 현실을 수용하는 부드러운 입장이었습니다. 로마와 공존공영 하는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토라를 연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상황만 허용된다면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지 않고 수용하는 부드러운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로마의 압제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시도를 해야 한다는 과격한 노선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행하고 따를 때 유대인의 독립이 이루어지고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이들은 매우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자유와 메시아의 세계 도래를 지연시키는 배교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엄격하게 배척하고 혐오했습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주후 66-70년에 일어난 로마와의 전쟁에도 샴마이 학파 바리새인들이 많이 앞장섰습니다.

 

사울은 힐렐 학파보다는 샴마이 학파에 속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혐오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선 것을 보면 매우 엄격하고 과격한 샴마이 학파 바리새인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선 것은 아마도 신명기 21장의 말씀 때문이었을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생활 규범을 이야기하는 중에 죄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라. 하지만 나무에 매달라 둔 채로 밤을 지내지는 말고 그날에 장사지내라. 그의 시신을 밤새 매달아 놓는 것은 하나님이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21:22-23) 사울은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또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혐오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사울은 이런저런 배경 속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통해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었는데,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기 앞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라는 걸 몰랐습니다. 단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큰 빛이 비치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렸을 뿐입니다. 바울은 당황하여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러자 또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행22:7-8)

사울은 ‘나사렛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화들짝 놀랐을 겁니다. 아마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을 겁니다. 사울을 비추었던 빛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았던 빛과는 차원이 다른 빛이었던 데다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자가 자기 앞에 나타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으니까요. 아마 등골이 서늘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울의 삶을 받쳐주었던 토대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을 겁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 사건은 태초에 빛을 창조한 사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인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한 걸 보면 짐작이 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보았던 빛은 하나님이 창조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그분의 빛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저 빛은 하나님이 창조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로 그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빛을 보고 모든 것이 어둠임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율법의 빛이 충만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일뿐더러 율법에 비추어 흠 잡힐 데가 없었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자기 의를 인정하실 거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나니까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자기의 세계가 온통 어둠이요 죽음임이 드러났습니다. 자기가 딛고 서있는 토대가 전혀 토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허구요, 모든 것이 거짓이요, 모든 것이 어둠이요, 모든 것이 죄악이요, 모든 것이 죽음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기를 지탱해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뼈아픈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겁니다. 온 세상의 지축이 흔들린 겁니다. 바울은 땅바닥에 고꾸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맥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졌습니다.

 

비로소 어둠을 보았음

 

이 사건 이후로 바울은 자기를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와 하나님의 율법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습니다. 성경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 파멸과 비참함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고 한 대로입니다.”(롬3:9-18)

여러분,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를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본 자의 눈에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것이 비록 바른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위대하고 의로운 행위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부정하기가 짝이 없고 어둡기가 한량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을 본 자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심히 어둡고 사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니까, 100% 진실이니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한 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한 자도 세상이 어둡다 말하고, 인간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해도 하나님의 빛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말은 그 깊이와 밀도가 다릅니다. 석가모니나 노자나 공자가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과 바울이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은 내용의 깊이와 밀도가 다릅니다. 석가모니나 노자나 공자는 세상이 어둡다, 인간이 악하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자기의 어둠을 깨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인간이 자기의 어둠을 깨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어둠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3:20).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만이 빛이시고, 하나님만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사람 안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의로움을 완전히 깨부수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추앙받는 모든 가치와 철학과 정의를 부정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어둠이고,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불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종 된 사도, 종 된 주체

 

하나님의 영광을 빛을 본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앞에서 완전히 고꾸라졌습니다. 사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고, 온 세상의 지축이 흔들렸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에 대한 인식과 자기에 대한 인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서두에서 자기를 말할 때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도”라고 소개했습니다.

종과 사도, 이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완전히 모순된 조합입니다. 종은 당시의 노예입니다.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한 신분도 없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도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에게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처럼 종과 사도는 완전히 모순된 조합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모순된 두 신분이 바울 안에서 공존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어느 때는 종이고 어느 때는 사도라고 한 게 아니라 항상 종이고 항상 사도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만일 바울이 예수의 종이 아니었다면 사도의 직분에 충실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느라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멸시를 받았고, 감옥에 갇히고, 돌로 맞고, 채찍으로 맞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었는데(고후11:23-27), 그런 고난을 다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불가능했을 겁니다. 중간에 그만 두든지, 아니면 적당히 복음을 변형하거나 왜곡하든지 했을 겁니다.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 적당히 복음을 포장하고 이용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온갖 시련과 아픔과 비방을 참아내며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종이니까, 예수의 종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으니까 온갖 시련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곡진하게 복음을 전한 겁니다. 로마서와 같은 위대한 복음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예수의 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안에서 예수의 종 됨과 사도 됨은 항상 공존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종과 사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고 모순된 조합이고 공존할 수 없는 조합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 됨과 사도 됨은 항상 공존했고 공존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종이었으나 그냥 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종이나, 왕의 종이나, 욕망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그것도 팔려간 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부름 받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종이요,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복한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의 종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종일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종, 세상 모든 것으로 해방된 자유인 - 주체인 종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종인 주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으로써 세상 모든 것 위에 우뚝 선 주체, 어떤 권세나 위협 앞에도 굴복하지 않는 주체,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주체였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바울은 아주 중요한 주체적 인물”(사도 바울, 11쪽)이라고 한 것은 바울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이 현실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었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주체일 수 있었고,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주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에 올인하는 사도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종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 종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예수의 종이었기 때문에 주체로서 세상 모든 것 위에 우뚝 설 수 있었고, 흔들림 없이 예수의 사도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주체 됨의 역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체로 우뚝 서려면 든든한 배경이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다른 능력이 있든지, 남다른 배경이 있든지, 좌우지간 힘이 있고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배경이 있어야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힘에 겹도록 자식 교육에 힘쓰는 것이고, 아이들 기죽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티끌만한 것이라도 자긍심을 내세울 뭔가가 있으면 자랑하는 것이고, 자기가 성취한 것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습니다. 근원 진실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직계 후손인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다가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배웠습니다. 또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빠질 게 없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유대적인 것, 그리스적인 것, 로마적인 것 모두를 섭렵하고 소유한 진정한 의미의 세계인이었습니다(빌3:4-6). 정말 주체로 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바울이 주체로 섰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주체로 우뚝 선 것은 그 많은 배경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이런 것으로 자기가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이 모든 것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빌3:8),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시103:14),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엡2:3)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고, 세상 모든 것으로 해방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나요?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눈으로 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엉터리라고 생각될 겁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엉터리가 예수 안에서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의 종이 되게 함으로써 주체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임으로서 살리시고, 우리를 부정함으로써 긍정하시고, 우리를 심판함으로써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기에 빠트림으로써 건져내십니다. 예,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지 않고는 살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부정하지 않고는 긍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고는 건져내지 않습니다. 우리를 종이 되게 하지 않고는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주체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주체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절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종이 되어야만(물론 이것은 우리의 지혜나 결단으로 되는 것 아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주체로 설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주체인 사람은 결코 주체로 설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주체인 사람은 뭔가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종, 세상의 종, 돈의 종, 욕망의 종, 대중의 종, 이데올로기의 종, 지식의 종, 국가의 종, 권력의 종, 쾌락의 종, 일의 종 등등 뭔가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잘 보십시오. 사람은 돈방석에 앉음으로써 돈의 종이 됩니다. 권력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권력의 종이 됩니다. 지식의 왕관을 씀으로써 지식의 종이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누군가의 종이 됩니다. 자기 스스로 주체가 됨으로써 자기의 종이 됩니다. 항상. 필연적으로.

 

바울을 보라

 

바울이 산 증인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 되기 전에는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종교의 종이요 자기 의의 종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통해 인간의 지혜와 의로움이 똥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추앙받는 모든 가치와 철학과 정의와 미덕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앎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써 비로소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오래된 유대 율법의 체제와 막강한 로마의 체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의 길을 끝까지 곡진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닙니다. 겸양의 제스처로 한 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과 그 사건에서 비롯된 신앙과 신학이 농축되어 나온 말입니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압축되고 압축되어 나온 말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한, 기독교 진리에 관한한, 인간과 세상의 근원 진실에 관한한 가장 깊고 넓은 강입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넓은 이 강을 감히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깊고 넓은 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힘들 것입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조차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롬11:33)이라고 탄식하듯 자백했으니 당연히 힘에 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첫 벌음을 떼었습니다. 바라기는 이 깊고 넓은 강을 건널 즈음 우리의 입에서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이 한 마디에 기독교의 모든 것 - 신앙의 모든 것, 신학의 모든 것 - 이 들어 있으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