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자기가 전할 이야기는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이란 좋은 충고나 훈계나 이론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같은 것일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인 이유

 

그렇다면 물읍시다. 왜 예수일까요? 왜 예수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고집하는 걸까요?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여호와만을 유일신으로 섬겼지 않습니까. 여호와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참 신이시고, 세상을 구원할 참 신이라고 믿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만이 만군의 ‘주’라고 믿었지 않습니까. 바울도 그런 유대인이었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신이라고 믿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한 걸까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주’요 ‘그리스도’라고 한 걸까요?

다른 배경이 없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사렛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지금까지 들어왔던 하나님 이야기,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 나사렛 예수 이야기를 새롭게 보고 재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기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새롭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물어야겠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뭘 본 걸까요? 뭘 봤기에 예수를 핍박하던 그가 180도 바꿔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한 걸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이요 인간이라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를 인간적 차원에서만 봤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로만 알았습니다. 직접 고백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그렇습니다. 육신을 따라서만 알았던 예수를 육신 이상의 차원(부활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명의 차원)에서 새롭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v.4).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본 이후로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경배를 예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여기서도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를 나란히 병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감히 발설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보니 예수가 하나님인 게 맞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고,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것이 전부예요. 예수가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바울과 사도들의 신앙의 토대였고,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토대입니다.

 

성육신에 대한 오해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인간이자 신이라는 사실은 지난 이천 년 동안 그치지 않는 논쟁거리였습니다. 이단 논쟁이 가장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그럴 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 혼합되거나 뒤섞일 수 없을 만큼의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절대타자이시거든요. 바울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딤전6:16). 전도서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전5:2). 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물질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저편에 계시고 인간은 세상 이편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는 것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창조자가 피조물이 됐다는 것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합리적인 이성을 내려놓고 백기투항을 하지 않는 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는 최고로 신성화된 인간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잠시 인간으로 현현한 것일 거라고. 이렇게라도 해야 어느 정도 납득이 되니까 이런저런 주장을 했습니다. 유명한 빌립보서 말씀도 그런 생각을 부추긴 측면이 있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6-8) 여기서 ‘종의 형체를 가졌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성육신, 창조의 유비

 

예수님은 최고로 신성화된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이 잠시 인간의 모양으로 현현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반반씩 혼합되거나 뒤섞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요한이 말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요1:14).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 칼케돈 공회(451년)에서 명확하게 정리됐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단일성은 “섞이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이자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 낯선 분입니다. 그래서 쉬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신성화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인간입니다. 안 먹으면 배고프고, 채찍으로 맞으면 아프고, 상한 음식을 먹으면 설사를 하고, 심적인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고, 성적인 욕망이 추동하고, 세포가 성장했다가 늙어가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입니다.

동시에 나사렛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변장한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 태초부터 있는 분(요1:1),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빌2:6),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요 나중이며 시원이요 목표이신 분(계22:13),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13:8), 능력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히1:3)으로서 유일한 참 하나님입니다.

결국 나사렛 예수 안에는 백퍼센트 하나님과 백퍼센트 인간이 공존합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최고의 걸림돌입니다. 바보, 멍청이, 쪼다라는 말을 듣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해 부활하신 예수를 본 제자들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백퍼센트 인간 안에 백퍼센트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초역사가 역사 속에 들어온 것이고,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 것이고, 절대가 상대 속에 들어온 것인데, 또 역사에 갇힐 수 없는 분이 역사에 갇힌 것이고, 죽음에 갇힐 수 없는 분이 죽음에 갇힌 것이고, 죄의 짐에 사로잡힐 수 없는 분이 죄의 짐에 사로잡힌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셨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였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였듯이 성육신 또한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였습니다.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였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창조의 한 유비다.”(교의학 개요. 153쪽)라고 말했는데 옳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조성을 부여하시기로,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로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결정하고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육신, 세 가지 근원 진실의 계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적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세 가지 근원 진실을 계시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근원 진실, 둘째로는 인간의 근원 진실, 셋째로는 세상의 근원 진실을 계시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근원 진실을 드러낸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한없이 연약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오해와 배척을 받았지만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정말 옳고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홀로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고고한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지극히 겸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겸손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연약하신 만주의 주이십니다. 패배함으로써 승리하시는 분, 전능하시기에 오히려 무력함을 감내하시는 분, 온전하시기에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오해와 배척과 심판을 받으시는 분, 온갖 멸시와 배척을 받으면서도 그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 죄 된 인간이 되심으로써 죄 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인간 없이도 부족할 것이 없는 절대주권자이시지만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을 위하시는 인간의 하나님이기로 결정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는 이런 하나님의 진면목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줬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과 인간 역사의 실상을 보여준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냄새나고 어둡고 비좁은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태어나자말자 헤롯의 핍박을 피해 이집트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적잖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빵으로 배불렀고 병 낫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지 예수를 진실로 알고 신뢰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다 떠났을 만큼 예수님은 일평생 고독하고 외로웠습니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베들레헴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버림을 받고 배척당하고 핍박받고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생애를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고난을 받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줬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을 배척하고 외면하고 핍박하는 존재라는 것,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철저하게 오해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악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이 무엇인지를 보여줬습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인간의 어떠함과 인간 역사의 어떠함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생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편 다른 형태의 계시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백퍼센트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역사 속에 들어왔고, 시간 속에 들어왔고, 물질 속에 들어왔고, 어둠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온갖 멸시와 박해와 오해를 사랑으로 품어냈습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짊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뜻임을 확인하고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눕고, 아버지와 함께 일어나고, 아버지와 함께 걷고, 아버지와 함께 말하고, 아버지와 함께 먹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아버지와 함께 쉬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인이었고 주체였습니다. 오직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세상의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참 자유인이었고, 세상 모든 것 위에 우뚝 선 참 주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원형적 인간, 종말론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옳습니다. 원형적 인간, 종말론적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된 인간, 하나님과 하나 된 인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병든 인간, 부패한 인간, 왜곡된 인간, 분열된 인간이었던 반면 성육신한 예수님은 원형적 인간, 종말론적 인간, 그래서 참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 최고의 계시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보여줬습니다. 수동적 방식으로는 지금 여기에 있는 부패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줬고, 능동적 방식으로는 원형적 인간, 종말론적 인간의 실재를 보여줬습니다. 인간의 미래를 보여줬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준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으로서 세상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세상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의 일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이신 예수님이 어떤 존재였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였습니다. 하늘과 땅이 통합된 존재였습니다. 예수라는 존재 속에 하나님과 인간이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었고, 하늘과 땅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런 예수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예수야말로 우리에게 알려진 세상과 알려지지 않은 세상이 교차하는 절단면을 뜻한다. ……그때 그 지점은 시간과 영원, 사물과 근원,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은폐된 교차선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로마서. 144쪽)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세상과 알려지지 않은 세상이 통일을 이룬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세상의 일부인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면 세상 또한 예수님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는 곳, 하늘과 땅이 분리될 수 없이 통합된 곳 아니겠습니까?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신묘막측한 곳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물질 덩어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따로따로인 곳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신비한 조화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에게 침투하고 스며드는 곳입니다. 물론 하늘과 땅은 차원도 다르고 속성도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지양되거나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상호침투하며 공생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이 상호내주하며 공생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본래 이런 곳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성경은 이 진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1:1) 예수님은 바로 근원 진실, 성경의 첫 구절이 선포한 근원 진실을 온 몸과 삶으로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이 계시한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근원 진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근원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 세 가지 근원 진실을 보여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인간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 아닙니다. 심리학을 공부한다고 인간을 아는 것 아닙니다. 물리학과 사회학을 공부한다고 세상을 아는 것 아닙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봐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알 수 있고,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스라엘의 역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모든 것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실체가 다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아직은 하나님을 다 모르고, 인간을 다 모르고, 세상을 다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 가지 근원 진실이 계시됐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로 인해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전무후무한 계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하는 것이고, 하늘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 어떤 도덕도, 어떤 종교도, 어떤 혁명도, 어떤 변혁도, 어떤 사상도, 어떤 지식도, 어떤 예술도, 어떤 국가도, 어떤 사회도, 어떤 정치체제도 복음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 중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