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의 여유만으로도 마음이 충전되었지요? 그러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해봅시다. 우리는 앞에서 죽음은 죄의 삯이라는 것,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르는 삶의 체계라는 것, 죽음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것, 죽음은 존재론적이지 않고 관계론적이라는 근원 진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죽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죽음이 죄의 삯이 아니고 생명의 순리라면 - 하나의 생명이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포식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라면 죽음은 당연히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에서 구원해야 할 이유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 자체가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죽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고 죄의 삯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죽음이 죄의 삯이라면 죽음 문제를 풀어야 할 이유도 있고 죽음 문제를 풀 방법도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성경이 구원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한 다음 추적한 원인에 합당한 방식으로 죽음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물론 죽음 이전에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흡족한 세계였으며 죽음의 필연이 요청되는 세계가 아니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세계, 즉 생명과 죽음의 갈래 길이 모두 열려 있는 세계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죽음의 굿판으로 떨어진 것, 모든 생명이 죽음에 잡아먹히게 된 것, 즉 하늘과 땅의 하나 됨이 깨어지고 분열된 것은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히 뒤집을 수 없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창2:15-3:24).

그렇다면 이 죽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죽음이라는 재앙을 초래한 원인을 제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죽음을 치유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위반한 죄가 죽음의 원인이니까 이 원인을 제거하면 죄의 삯인 죽음, 죄의 지배력인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백 번 옳습니다. 죽음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면 죽음 문제 또한 풀린다고 봐야 합니다.

 

관건은 방법론입니다. 죄를 제거하는 방법론.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죽음의 원인인 죄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가장 쉬운 길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죄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바울이 인간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두가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롬3:10-12)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인간이 무슨 수로 죄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겠습니까? 죄의 종인 인간이 무슨 수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나 달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산이나 바다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호랑이나 곰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신묘한 약초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들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가당치 않습니다. 인간도 해결하지 못하는 죄를 그런 것들이 해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오직 하나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해결자와 해결책이 되는 것.

 

물론 이 방법에도 넘어야 할 걸림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결자와 해결책이 된다고 해서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최고 전능자이시고 최고 통치자시니까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더욱이 하나님이 친히 해결자와 해결책이 되시는 거니까 어떤 걸림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구잡이식 전능자가 아니시거든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도 매이고, 아담과 맺은 언약에도 매이는 분이시거든요. 어떤 신학자들은 창조 자체를 하나님의 언약 행위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은 창조 질서에도 매이는 분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말씀과 창조의 언약이라는 테두리, 또 아담과 체결한 에덴동산의 계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아담과 체결한 계약으로 인해 죽음 문제가 발생했으니까 그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해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과 맺은 계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계약을 깬 아담과 세상을 죽음에서 구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에덴동산의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죄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해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 또한 묘안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단절된 데다가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길이 막힐 때마다 항상 근원으로 돌아가서 다시 추적하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길이 의외로 보일 때가 있거든요. 하여, 다시 최초의 계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계약에 의하면 죽음은 불순종의 값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인해 죽음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해법이 보입니다. 일단 인간의 죗값을 치르면 될 것입니다. 죗값도 치르지 않고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아담과 맺은 계약을 공수표로 만드는 것이 되므로 일단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죗값은 죽음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죽음입니다. 아담의 죗값으로 소나 양이나 천사가 죽는다고 한 게 아니라 아담이 죽는다고 했으니까 죗값 또한 반드시 인간의 죽음으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죗값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죗값으로 죽은 존재의 죽음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의 죽음으로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눈감고 아옹’하는 것이고, 죗값으로 이미 죽은 존재를 또 죽인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됩니다. 결국 죗값을 정당하게 치르려면 죄 없는 인간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인간이 죄 있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 것만이 아담과의 계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계약을 깬 아담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해법입니다. 하지만 이 해법을 실행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천지 어디에도 죄 없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하여, 하나님께서는 아주 기상천외한 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해법을 구사하셨습니다. 그게 뭘까요? 무척 궁금하시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죄 없는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죗값을 치르는 길 말입니다. 아~ 실망이신가요? 잔뜩 기대했는데 너무 싱거우신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침히 해결자와 해결책이 되는 것만이 아담과의 계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계약을 깬 아담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해법이랍니다. 정말이에요. 하나님이 아무리 지혜자시고 전능자시라 해도 이것 외에는 다른 해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스스로 이 길이 되셨고 이 길을 가셨습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몸속에 하늘 영광을 감추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핏덩이 예수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고, 인간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인간의 죄를 자기 몸에 다 짊어지셨고, 인간의 죗값으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의 죗값을 온전히 치르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이라고 말합니다(롬5:8-10, 빌2:5-11).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막10:45).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는다(요6:3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의 죗값을 치르는 대속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죗값을 치르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실로 엄청난 선언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요19:30).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자, 어떤가요? 매우 합리적인 해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극히 합리적일뿐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은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방식이 아니라 짊어지는 방식, 원수인 사탄을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패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해결책이 되시고 해결자가 되시는 자기희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밖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구원 사건이 인간 안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인간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이 구원 사건을 일컬어 ‘객관적 구원’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와 같은 객관적 구원 사건은 당연히 일회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데서 알 수 있듯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구원 사건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구원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객관적 구원 사건이 곧 온 세상의 구원이 되는 건 아닙니다.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 자동적으로 모든 자의 구원으로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만일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구원 사건이 자동적으로 모든 자의 구원으로 연결된다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비인격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삶과는 무관한 한낱 사물로서의 구원, 사후 천국행을 보장하는 티켓 정도의 구원으로 전락하는 건 물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또한 구원의 방편으로 떨어져버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것이거나 싸구려 커피와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구원 사건은 반드시 개인 안에서 주관적 구원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개개인이 객관적 구원 사건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도 형식적인 참여가 아니라 인격적인 참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는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개개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것 없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구원 사건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라는 것,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신 예수님의 속죄가 구원의 시작이요 토대라는 것,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을 향해 열려있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이자 독특함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했다는 것, 인간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해결했다는 것, 특히 죄의 삯인 죽음으로 죽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이자 독특함입니다. 여타 종교가 말하는 구원은 이렇지 않습니다. 여타 종교는 수행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도모하는 것, 마음을 다스려 세상사로부터 해탈하는 것, 영혼이 신과의 합일에 들어가는 것, 죽음을 통해 영적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역사 발전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교와 사상이 제시하는 온갖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 안에도, 세상 안에도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고, 흠 없는 예수의 죽음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다. 천만 번 엎드려 절해도 부족한 황공무지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빚어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했다는 것은 어쨌든 인간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가 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인간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가하지 않는데 비해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인간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가하기 때문에,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경이 시종일관 죄의 삯인 죽음으로 죄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도모한다거나, 마음을 다스려 세상사로부터 해탈한다거나, 영혼이 신과의 합일에 들어간다거나, 죽음을 통해 영적 세계로 이행한다고 하면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커다란 거부감이 없는데, 성경은 시종일관 죄의 삯인 죽음으로 죄 문제와 죽음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이 동정녀의 몸을 통해 성육신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상식에 어긋나는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니 정신 멀쩡한 사람들이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무시하고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하면 성경의 구원 이야기가 여타 종교나 사상이 말하는 구원 이야기보다 훨씬 합리적입니다. 사실 여타 종교나 사상은 죄와 죽음 문제의 근원을 건드리지 않거든요. 단지 현상을 보고 현상을 극복하는 처방에 그칠 뿐입니다. 한 마디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문제의 근원까지 파고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한 행위 계약까지 파고듦으로써 죄와 죽음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진단할 뿐 아니라 문제의 근원에 합당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죽음의 근원은 죄다, 죄의 삯으로 죽음이 왔다, 그러니 죄의 삯을 지불하면 된다, 죄의 삯인 죽음을 지불하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죗값을 지불하는 죽음을 죽었다, 그 결과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도록 합리적인 역설이지 않습니까? 성육신과 부활이라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걸림돌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죽음 문제의 근원을 밝혔다는 점, 문제의 근원에서부터 해결책을 찾았다는 점, 죽음은 죄의 삯이고 죄의 저주인데 죄의 저주인 죽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이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은총 안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역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합리적인 이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멀리하면 되겠습니까? 죽음을 죄의 저주라고만 생각하고 혐오하면 되겠습니까? 요즘 시대는 다들 죽음을 멀리하고 혐오할 뿐 아니라 죽음을 볼 수 없도록 감추기에 급급한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눈 감으면 죽음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은총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죽음에 눈 감으면 그저 열심히 죽음을 살다가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질 뿐 구원의 자리,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지는 못하니까요. 정말입니다. 열심히 죽임살이를 하다가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죽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죽음에 눈 떠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신비에 눈이 뜨이고, 하나님의 구원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해서 죽음이 죄의 삯이요 죄의 저주라는 사실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미화될 수 없는 생명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경적 진실이요 역사적 진실입니다. 특히 죄 없는 하나님의 죽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복음의 진수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복음의 진수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