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이물질로 가득한 오물단지 구원론이라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사후 천국행’ 구원관, 죽은 후에 영혼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공간 이동’ 구원관, 몸은 죽고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영혼’ 구원관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됐으며, 문제점이 무엇이며, 폐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요란하기는 하나 내용은 없는 빈털터리 구원론이라는 사실을 살펴보려합니다. 얼핏 보면 있는 듯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려 합니다.

 

(1)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리얼리티(Reality)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욕망의 투사나 단순한 희망이 아닙니다. 환상이나 거짓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재(Reality)입니다. 내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의 존재는 영원 앞에서 순간에 불과하고, 순간에 불과한 나의 존재는 환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현실,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리거나 폐기되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하늘과 땅은 요동할지라도 결코 요동하지 않는 실재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실재(리얼리티)가 없습니다. 구원을 경시한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교회만큼 구원을 중시하고 강박적으로 말하는 교회,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강렬하고 구령의 열정이 뜨거운 교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도대체 구원의 리얼리티가 없습니다. 끝도 없이 구원을 말하기는 하는데 내용은 한없이 부실하고 상투적이고 막연합니다. 그저 주문을 외우듯 예수 믿으면 죽은 후에 천국 간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을 받으라고만 외칠 뿐,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방법론만 말할 뿐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당황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한국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다 죽음 이후로 미루어져버렸고, 하늘위로 올라가버렸고,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회귀해버렸는데 어느 누가 감히 죽음 이후의 일, 천상의 일, 영혼의 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리얼리티가 없는 것을 무슨 수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국교회에 유독 이단이 많은 것도 어쩌면 구원의 내용, 구원의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구원의 내용과 리얼리티가 분명하다면 이단이 이처럼 성할 리도 없을 것이고,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에게 빠질 리도 없을 것이니까요. 또 한국교회가 유난히 구원을 강조하고 강박적으로 좇는 것도 구원의 내용, 구원의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부터 빈 깡통이 요란한 법이니까요.

(2)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본질인 관계풀이(화해)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말하는 구원을 보면 질병의 치유, 가난의 극복, 사회적인 성공, 소원 성취, 만사형통, 문제 해결 등등 거의 대부분 문제풀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구원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구원의 본질은 아닌데 본질이 아닌 것들에 집착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문제풀이가 아니라 관계풀이입니다. 단절되고 막혔던 관계가 뚫리고,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져 하나 되는 화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구원입니다(롬5:1).

 

관계풀이로서의 구원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적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됨으로써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일차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평이 이루어져서 그의 기업을 상속받을 뿐 아니라 사랑과 순명의 인격적 관계로 회복되는 것, 즉 하나님과 아담이 최초에 가졌던 그 만남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근원적인 구원입니다.

2)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피상적이고 경쟁적이고 적대적입니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선린관계도 없지 않으나 본질적으로는 피상적이고 경쟁적이고 적대적입니다. 개인과 개인,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파와 교파, 교회와 교회 간에도 적대적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처럼 서로 경쟁하고 대적하는 관계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로 회복하는 것,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3) 세상과 나의 관계, 자연과 나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삶이 자연을 파괴하고 도구화하던 것에서 돌이켜 자연을 돌보고 경작하고 양육하는 것, 자연을 물리적인 대상으로 보던 것에서 돌이켜 마주보고 소통하는 상대로 보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즉 ‘그것’이었던 자연이 ‘너’로 다가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주 작은 일상으로 말하면,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감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관계의 회복, 화해, 관계풀이가 곧 구원입니다. 관계풀이로서의 화해가 빠진 구원은 다 가짜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본질인 관계풀이와 화해는 없고 가짜 구원만 득세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의 절정으로 윤색된 가짜 구원만 득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관계풀이와 화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문제풀이와 소원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관계풀이와 화해를 강조하지 않고 문제풀이와 소원풀이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제풀이와 소원풀이만을 구원이라고 외친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관계풀이와 화해에는 관심이 없고 문제풀이와 소원풀이에만 골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일을 성취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기에 바빴습니다. 일보다 중요한 것이 관계인데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앞세웠고, 일 때문에 관계를 헤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끝없이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가 된 것도 다 그 때문이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생활에 지쳐 힘들어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3)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통전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본래 존재 전체 · 삶 전체 · 역사 전체 · 우주 전체를 포괄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와 눈에 보이는 땅의 세계 전체가 참여하는 실로 광대하고 위대한 것입니다(엡1:10). 특히 하나님의 구원은 나누이지 않는 하나입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세계입니다. 통째로 하나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유통되는 구원에는 이런 광대함과 위대함이 없습니다. 통째로 하나인 구원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치유, 건강, 돈, 성공, 만사형통, 가문의 번영 등등 사적인 문제해결이나 소원 성취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광대하고 위대하기 이를 데 없는 구원의 지평이 사적인 영역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개인의 취향과 필요를 만족시키는 소시민적 욕망에 지배당했습니다. 구원의 공공성과 통전성은 온데간데없고 구원의 쪼가리들만 흉물스럽게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지나치게 개인화한 나머지 구원의 교회론적 지평조차도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 존재하기를 거부한 채 나 홀로 그리스도인(교회 안 나가는 것을 뒤집어 속칭 ‘가나안 성도’라 칭함)으로 지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의 부패에 대한 항거의 몸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구원의 통전성을 잃은 데서 비롯된 풍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통전성이 없습니다. 파편화된 구원은 구원이 아닌데도 파편화된 구원만 횡횡하고 있습니다.

(4)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휴머니즘(humanism)이 없습니다. 본시 구원의 요체는 타락 이전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살전5:23). 영혼이 구원받아 천사처럼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었을 때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누렸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왕적 지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인간성 회복과 인간의 왕적 지위 회복에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되레 인간성을 억압해왔습니다. 인간성은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기독교는 신본주의이지 인본주의가 아니라며 인간성을 부정하고 억압해왔습니다. 인간성 회복은 외면한 채 절대순종만 강조해왔습니다. 누군가가 인간성 회복을 말하기라도 할라치면 대뜸 인본주의자(humanist)라고 낙인찍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풍부한 인간성과 인간미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상하게도 개신교인들을 보면 대체로 사납고 전투적입니다. 자기 확신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천박합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인간성 자체를 찬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적인 휴머니즘(humanism)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세상의 휴머니즘에는 인간을 우상화하는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세상의 휴머니즘은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휴머니즘입니다. 이런 휴머니즘은 거부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참된 휴머니즘의 원조는 정녕 하나님이시고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든 것 자체가 최고의 휴머니즘이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최고의 휴머니즘이며, 인간을 구원하신 것 또한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의 가치를 높인 분이 없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휴머니즘이 가능하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양 위에서만 참된 휴머니즘이 자랄 수 있고 꽃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인간이어야 하고, 인간성 · 자유 · 정의 · 평화 · 창조계의 보존을 위해 몸 바쳐야 한다. 인간 실존을 희생시키는 그리스도인 실존이란 있을 수 없다. 양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실존이 인간 실존보다 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의 확장 · 심화 · 철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인간 실존을 하나님 신앙 안에 굳게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을 영위함으로써.”(믿나이다. 263쪽)라고 옳게 말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은밀하게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이 되는 것’과 동일시된다. 참된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에게 관계없든지 소연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참된 인간 본성 안의 아무 것도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객관적 현실성을 공격하거나 능가하거나 무효하게 하는 것은 없다.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그리스도인 신앙에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그리스도와 아담. 59쪽)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도 인간은 인간성 안에 있고, 인간성은 인간 안에 있다.”(61쪽)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휴머니즘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이처럼 빛나는 휴머니즘, 마땅한 휴머니즘이 없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5)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근원 실재인 하나님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것만이 구원이고, 하나님나라만이 구원의 실재라는 것은 기독교 구원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것 외의 다른 구원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하나님나라가 탈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영적 세계인 천당으로 굴절된 이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으로서의 하나님나라는 탈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적인 복을 받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데는 신경 쓰지 않고 믿음이라는 신묘한 방망이를 휘두르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는 마음이 없고 선교업적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인 평화와 샬롬(shalom)은 등한히 하고 정복과 승리와 영광에만 눈독을 들였습니다.

박철수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가 성경의 최고 주제인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경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며, 엉뚱하게도 기복주의와 성장주의와 성공주의에 몰입하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하나님나라. 32쪽).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믿고 가르치는 구원론에는 창조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인 하나님나라, 구원의 궁극 실재인 하나님나라가 없습니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주님의 몸에서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 굴러 떨어진 것도 그 때문이고요.

 

(6) 한국교회의 구원론에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진리가 왜곡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상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기 때문에 핵심만 거칠게 말한다면, 한국교회는 ‘오직 은혜’라는 진리로 행위를 몰아내고,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로 이성을 짓밟는 폭거를 자행했습니다. ‘오직 은혜’라는 깃발 아래에서 행위는 반은혜의 공로주의와 내통하는 것으로 단죄를 받았고, ‘오직 믿음’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이성은 반믿음의 합리주의와 내통하는 것으로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본래의 의미를 저버린 채 도구화의 길, 마술화의 길로 치닫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약학자 김세윤도 전통적인 칭의론의 문제를 “전통적인 칭의론 이해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와 종말론적인 유보를 간과함으로써 칭의 또는 의인 됨(구원)과 의인으로 살기(윤리)가 구분되는 문제를 낳게 된 것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칭의와 성화. 79쪽).

사실 믿음과 이성, 은혜와 행위는 대척점에 있지 않습니다. 변증법적 긴장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척점에 있지는 않습니다. ‘알기 위해 믿는다’는 안셀무스의 명제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명제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것은 성경과 삶 전체가 증언하는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3:10)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이라는 깃발을 가지고 이성을 추방시킴으로써 무지의 신앙을 양산했고, ‘오직 은혜’라는 깃발을 가지고 행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값싼 용서’와 ‘값싼 구원’을 남발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얼핏 보면 있는 듯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확인해보았습니다. 적잖게 여섯 가지나 드러났습니다. 사실 이 여섯 가지가 구원의 알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없으면 안 되는 구원의 알짬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소중한 구원의 알짬이 다 빠져 있습니다. 지나칠 만큼 구원에 열광했는데 사실은 속이 텅 빈 빈털터리 구원만 요란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과 종합하면,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첫째로 플라톤의 이원론이라는 이물질로 오염된 오물단지 구원론이고, 둘째로 구원의 알짬은 다 빠져 있는 빈털터리 구원론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너무 비판적으로 정리했나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들만 들추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정직하게 보고 경험한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믿고 따르는 구원론은 정체불명의 비성경적 구원론, 인간의 세속적 종교적 욕망과 야합한 욕망의 구원론, 교회에 들어오는 문턱을 낮춘 값싼 구원론, 속 좁은 편견과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신념의 구원론, 자기중심적 이기심에 갇힌 사적 구원론, 사후 천국행을 보장하는 내세 구원론, 속 좁은 편견과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신념의 구원론입니다. 한국교회가 가리키고 추구하는 구원은 지극히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가리키고 추구하는 구원이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앙양태 또한 속물적이고 가볍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변명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맨얼굴입니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메가처치 왕국인 한국교회, 영혼 구원에 남달리 뜨거웠던 한국교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지나온 40-50년간의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솔직히 인간의 욕망이 넘쳤지 하나님의 구원이 넘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지요. 구원이 넘치긴 했으나 욕망의 노예가 된 구원, 이물질에 더럽혀진 구원, 진짜로 있어야 할 것은 없는 빈털터리 구원이 넘쳤지 진짜 구원이 넘치진 않았습니다. 아주 야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은 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넘쳤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니 이사야 선지자의 불호령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

정말 정곡을 찌르는 이사야의 불호령입니다. 사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교회와 주님을 위해 힘에 부치도록 수고를 많이 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면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나라와 관계없는 헛수고를 하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는 일에 목숨 걸기보다는 믿음으로 욕망을 정당화하고 채우는데 목숨 거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목사들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교회와 주님을 위해 목사 개인의 삶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까지도 쏟아 붓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양식을 먹이기 위해 힘쓰기보다는 교회 성장과 목회 성공이라는 파랑새를 쫓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보화에 심취하고 구원의 부요함을 향유하기보다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 몸부림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세우기보다는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지금 목사, 성도 할 것 없이 다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목사와 성도 모두 지나온 40-50년 동안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라 진력을 쏟은 나머지 다들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독일에서 학문 활동을 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21세기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규정하면서 긍정의 과잉이 피로사회를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성과사회의 주체인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한다고 말했습니다(피로사회. 12,28쪽). 한국교회가 꼭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긍정의 과잉을 낳았고, 긍정의 과잉에 도취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성과사회의 주체가 되었고, 성과사회의 주체가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자가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목사와 성도 모두 구원을 향해 내달렸지만 정작 구원은 비켜가고 종교적 성취만 얻는 바보짓을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형성됐습니다. 지금도 교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예수의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추적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엉뚱하게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의 철학이 교회 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기독교의 중심을 뒤흔들었고, 하나님의 구원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침식해버렸습니다. 특히 플라톤의 이원론이 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완전히 변질시켰습니다. 이원론이 성경과 전혀 다른 구원을 추구하게 했고, 성경과 전혀 다른 신앙을 믿고 따르게 했습니다. 매우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는 놀랍게도 예수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플라톤에게 머리 숙였습니다. 성경의 구원론과 플라톤의 구원론은 눈곱만큼도 타협의 여지가 없을 만큼 다른데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플라톤의 구원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제는 플라톤의 구원론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플라톤의 구원론에서 해방되어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